‘디지털 다윈이즘’이란 말이 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디지털 시장에서는 진화하는 업체만 살아남는다는 이론이다. 일례로 인터넷에서는 원하는 정보를 무한정 내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공급이 초과돼 결국 적자생존의 원칙인 다윈주의가 그대로 적용된다.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라고 말한다. 붉은 여왕의 세계에서는 주변 세계도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리 달려도 풍경이 바뀌지 않는다. 최소한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달려야 하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려면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이것이 ‘붉은 여왕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방법은? 스피드를 올려라. 두 이론은 이렇게 충고한다. 디지털 기기도 마찬가지다. 플래시메모리는 황의 법칙을 따라 진화하며 무어의 법칙이 더 이상 가이드라인이 되지 못함을 맨 먼저 증명했다. 이제 황의 법칙은 각종 디지털 기기에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황의 법칙이라는 고속 엔진을 달고 1년에 2배씩 질주를 시작했다.
휴대전화는 황의 백과사전
휴대전화를 ‘펼치면’ 황의 법칙을 따르는 각종 ‘단어’들이 즐비하다. 휴대전화의 발전은 곧 휴대전화에 내장된 각종 반도체 칩들의 발전. 벨소리는 음원 칩이, 그림은 이미지센서가, 휴대전화에 들어오고 나가는 각종 데이터는 메모리가 관장한다. 이들은 모두 평균적으로 1년에 2배씩 증가했다.
일단 벨소리. ‘목소리’는 자연스러워졌다. 2000년 4화음으로 ‘띠리리’ 울리던 시끄러운 전자 벨소리는 16화음(2001년), 40화음(2002년), 64화음(2003년) 그리고 지난해 MP3까지 평균 1년에 2배씩 화음수를 늘렸다.
‘시력’은 ‘망원경’ 급이 됐다. 2000년 30만화소에서 130만(2003년), 300만(2004년) 그리고 700만화소(2005년) 카메라폰이 등장했다. 이미지센서 역시 평균 1년에 2배씩 화소수가 늘어난 셈. 이미지센서 개발 기업인 엠텍비젼의 이주석 연구소장은 “이미지센서에 광다이오드를 많이 집적할수록 화소수가 많아진다”며 “이미지센서 기술은 반도체 기술과 마찬가지로 집적도의 문제”라고 말했다.
휴대전화의 무게는 어떨까? 초기 휴대전화 광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배터리가 작고 가볍다는 점을 선전하기 바빴다. 크기와 무게가 곧 휴대전화의 기술을 상징했다. 1983년 모토롤라가 개발한 최초의 휴대전화 ‘다이나택’은 1.3kg이었다. 5년 뒤 ‘다이나택 8000’은 771g으로 무게가 절반가량 줄었다.
하지만 최근 휴대전화는 몸집 줄이기를 포기했다. 이보다는 음악, 영상, 인터넷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면서 ‘전화’에서 ‘컴퓨터’로 변신 중이다. 자동차나 항공기가 무어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작아질 수 없는 것처럼 휴대전화도 크기 만큼은 황의 법칙을 따라 무한히 작아지지는 않는다.
주연 노리는 하드디스크
메모리를 보자. 요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는 플래시메모리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다. MP3플레이어, 디지털 캠코더, 휴대전화 등 플래시가 가는 곳에는 HDD도 있다.
‘하드디스크, 크고 무거워서 PC에만 쓰이잖아.’ HDD를 이렇게 취급하면 ‘컴맹’처럼 황의 법칙도 모르는 ‘황맹’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간 HDD의 홈그라운드는 컴퓨터였다. 1956년 최초로 등장한 HDD는 용량이 불과 5MB였지만 몇 년 뒤 16비트 컴퓨터에는 40MB짜리가 장착됐다.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HDD는 부지런히 용량을 늘리면서 컴퓨터의 주기억장치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초부터 가속이 붙었다. 연세대 기계공학과 박영필 교수는 “거대자기저항헤드가 개발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HDD에는 데이터를 읽고 쓰는 ‘헤드’가 있다. 레코드판 위를 움직이는 전축 바늘과 비슷하다. 손바닥만한 디스크 위에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려면 헤드가 작을수록 유리하다. 이 때문에 HDD는 1년에 2배씩 용량을 늘릴 수 있었다. 지금은 최대 400GB까지 등장했다.
박 교수는 “최근 1인치 안팎의 소형 HDD가 개발된 것도 황의 법칙이 성립한 주된 이유”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PC에는 3.5인치, 노트북에는 2.5인치가 주로 쓰였다. 휴대용으로 쓰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크기다. 그런데 1.8인치, 1인치 그리고 최근 0.85인치까지 개발되면서 HDD는 디지털 기기에 꼭 맞는 크기가 됐다. 1.8인치 HDD가 탑재된 애플의 MP3플레이어 ‘아이팟’은 2001년 5GB에서 2004년 40GB로 평균 1년에 2배씩 용량을 늘렸다.
숫자전쟁 승리 비법
2002년 46인치(삼성전자), 2003년 55인치(LG필립스), 2004년 65인치(일본 샤프). 요즘 LCD는 ‘인치전쟁’ 중이다.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현재까지 승자는 삼성. 지난 3월 82인치를 개발해 LCD 전쟁의 강자로 떠올랐다. 승리의 비결은 뭘까?
삼성전자가 세대마다 발표한 LCD 크기를 보면 재밌는 결과가 나타난다. 1세대 LCD는 270×360mm, 2세대는 370×470mm로 면적이 약 1.8배 늘었다. 2세대에서 3세대는 2배, 3세대에서 4세대는 약 1.9배, 이런 식으로 7세대 82인치 LCD까지 1세대마다 면적이 거의 2배씩 늘었다.
LCD를 만들 때는 커다한 유리원판 하나를 여러 개로 자르는데 이 유리원판의 크기에 따라 세대가 나뉜다. 원판이 클수록 기술은 까다로워지지만 그만큼 원판 하나에서 얻을 수 있는 LCD 수가 많아진다. 웨이퍼가 유리원판이라면 반도체 칩 하나는 LCD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무어의 법칙을 따랐다면 LCD의 크기는 1년이 1세대로 바뀌었을 뿐 황의 법칙과 비슷한 형태로 발전했다.
경희대 정보디스플레이학과 장진 교수는 “앞으로 MP3플레이어 화면에도 황의 법칙이 성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초기 단계지만 차츰 MP3플레이어에도 휴대전화처럼 화면이 생길 것이고 이 때 화면의 크기는 분명 한계가 있겠지만 화소수 만큼은 황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디지털 발전 속도 빨라져
디지털 세계는 관성의 법칙이 지배한다. 외부에서 방해하는 힘이 없는 한 진행 방향으로 계속 발전한다. 발전 주기를 시간으로 놓고 증가량을 거리로 생각해보자. 통신 스피드가 1년에 2배씩 빨라진다는 길더의 법칙이나 메모리반도체의 용량이 1년에 2배씩 는다는 황의 법칙은 발전의 속도를 의미한다. 무어의 법칙에 비하면 황의 법칙은 속도가 2배로 빨라진 것이다.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현대원 교수는 “최근 디지털 기기가 황의 법칙을 따라 발전하는 현상은 일면 당연하다”고 밝혔다. 점점 사람들은 CPU가 더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길 바라고, 처리된 정보를 실어 나르는 대역폭은 더 넓어지길 바라며, 실어 온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는 더 커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조준일 부연구위원은 “황의 법칙이 디지털 기기의 발전 기준을 제시해 준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황의 법칙은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 삶의 속도도 바꿔놓았다. 현 교수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가 기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의미”라며 “1980년대에는 2~3년마다 한번씩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최근에는 대략 1년마다 휴대전화를 바꾼다”고 말했다. 황의 법칙은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 삶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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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디지털의 화려한 플래시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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