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언제였더라.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갈릴레오가 운동의 법칙을 설명하더니 마침내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내놓았던 그 때. ‘모든 물체는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만물의 법칙을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2000년 치하는 끝이 났다. 과학혁명이 17세기를 뒤흔들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세상을 설명하는 법칙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구에서 태양으로, 신에서 인간으로, ‘왜’에서 ‘어떻게’로 생각하는 방법이 바뀌었다. 몇 줄의 글보다 한 토막의 수식이, 지루한 궤변보다 간단한 실험이 더 믿음이 갔다.
20세기 초 다시 한번 과학혁명의 바람이 불었다. 섬광처럼 나타난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절대법칙을 뒤흔들며 모든 것을 상대법칙으로 만들었다. 세상은 3차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4차원이었고, 일직선의 ‘모노드라마’가 아니라 굽은 곡선의 ‘멀티드라마’였다. 메가, 기가, 테라의 거대한 세계는 뉴턴의 것이었지만 마이크로, 나노, 피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다가갈수록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100년이 지난 오늘, 이제 혁명은 끝났는가?
대답은 ‘아니다’다. 세상은 지금 또 다른 혁명의 폭풍을 경험하고 있다. 1948년 트랜지스터가, 1959년에는 집적회로가 등장하면서 컴퓨터는 점차 진화하기 시작했다. 크기는 작아지고 머리는 좋아졌다. 0과 1이라는 숫자 두개로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는 연속적인 아날로그 신호를 끊어진 디지털 신호로 바꾸면서 세상을 디지털로 물들였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1970년대 실험실에만 있던 컴퓨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1980년대 집집마다 놓인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며 네트워크를 이루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인터넷은 월드와이드웹을 만나 네티즌(누리꾼)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1999년에는 인터넷 이용량이 100일마다 2배씩 늘어났다. 컴퓨터가 만들어낸 ‘디지털 혁명’이 절정에 달했다.
디지털 혁명을 설명하고 예상하는 법칙들도 잇달아 등장했다. 근거리 통신 ‘이더넷’(ethernet)을 발명한 미국의 밥 메트컬프는 ‘메트컬프의 법칙’을 얘기했다. 인터넷의 폭발적인 확산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트컬프는 네트워크의 가치가 네트워크에 연결된 참가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말했다. 회원 10명에 1명이 늘면 네트워크의 비용은 10% 증가하지만 네트워크의 가치는 11의 제곱인 121이 돼 21%가 증가한다.
‘카오의 법칙’도 있다. 네트워크의 창의성이 네트워크에 접속한 사람들 중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수의 지수배로 비례한다는 것.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그만큼 정보교환이 활발해져 창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PC)의 성능은 좋아져도 가격은 항상 5000달러를 유지할 것이라는 ‘매크론의 법칙’은 1990년대 초 3000달러로 떨어지기 전까지 15년가량 들어맞았다.
디지털 혁명이 핑크빛 미래만 약속하지는 않았다. 유명한 ‘머피의 법칙’은 디지털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방화벽을 재구성하고, 백신을 업데이트하고, 서버까지 패치해도 자칫 조그만 실수 하나에 전체 서버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시스템을 포맷해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번 주도권을 잡으면 2등은 필요 없는,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수확체증의 법칙’도 디지털 세계의 비정한 일면이다. ‘락의 법칙’은 반도체의 제조 설비 비용이 4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얘기한다.
디지털 메트로놈
디지털 혁명을 이끈 일등 공신은 ‘무어의 법칙’이다. 컴퓨터의 생각을 담당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기억을 담당하는 메모리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개수가 2년에 2배씩 늘어난다는 것. 1965년 미국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연구개발 책임자였던 고든 무어가 처음으로 얘기했다.
무어의 법칙에 따라 반도체는 진화를 거듭했다.
마치 음악의 템포를 맞추는 메트로놈처럼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의 진화 속도를 규정하는 ‘디지털 메트로놈’이었다. 반도체 칩의 집적도가 증가할수록 칩의 크기는 더 작아지고, 가격은 더 내렸으며 생산량은 더 늘었다. ‘더 작게, 더 싸게, 더 빠르게’. 무어의 법칙은 디지털 경제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반도체 칩에 트랜지스터 10억개를 집적시키려면 지름이 1mm도 안되는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최소 2억개는 넣어야 한다. 지난해 인텔이 출시한 마이크로프로세서 ‘아이테니엄 2’에는 무려 5억9200만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다.
트랜지스터 하나의 평균 가격은 1954년 5.52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0.000000191달러였다. 신문에 인쇄된 글자 하나 값이다. 전기 스위치를 15조번 켜고 끄려면 2만5000년 정도 걸리지만 요즘 트랜지스터는 1초에 같은 수만큼 켜고 끌 수 있다. 무어의 신화는 계속되는가? 불투명하다. 2010년이 되면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줄이는 기술이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무어와 함께 디지털 혁명도 끝나는가.
제2의 디지털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선봉장은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황창규 사장. 황 사장은 2002년 반도체 메모리의 용량이 1년에 2배씩 늘어날 것이라는 ‘황의 법칙’을 ‘도발’했다. 그의 무기는 모바일. 새로운 디지털은 컴퓨터 대신 모바일을 타고 스피드를 높였다.
제2의 디지털 혁명은 컴퓨터가 아니라 모바일 기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무어의 법칙이 컴퓨터 혁명을 이끌었다면 황의 법칙은 새로운 모바일 혁명을 이끌 것이다.
디지털은 움직이는 거야
휴대전화, MP3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디지털 캠코더 등 ‘움직이는’ 디지털이 컴퓨터를 대체하고 있다. 전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디지털에 만족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원하는 곳에서 필요한 때에 맘껏 디지털을 즐기는 ‘디지털 노마드’족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데이터는 이미지로, 유선은 유무선 통합으로 디지털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 중심에 황의 법칙이 있다.
무어 VS. 황
고든 무어
•국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출생.
•나이: 1929년 1월 3일생(현재 76세).
•소속: 인텔 은퇴(명예회장). 집적회로를 발명한 로버트 노이스와 함께 1968년 인텔 창립 후 1987년까지 CEO로 활동.
•전공: 물리화학박사(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법칙: 2년에 2배씩 반도체 집적도가 증가. 발표 당시 1년에 2배로 예측했으나, 1975년 2년에 2배로 수정. 이후 인텔 경영진이었던 데이비드 하우스가 다시 18개월에 2배로 수정. 무어 본인은 18개월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음.
•시기: 1965년 4월 19일(당시 37세).
•당시: 페어차일드 반도체개발소장.
•계기: 미국의 공학전문잡지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가 35주년 기념호에 전자업계의 현 상태를 요약해달라며 무어에게 기사를 청탁.
•제목: 집적회로에 더 많이 구겨넣기(Cramming more components onto integrated circuits).
황창규
•국적: 한국 부산 출생.
•나이: 1953년 1월 23일생(현재 52세).
•소속: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
•전공: 전자공학박사(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법칙: 1년에 2배씩 반도체 집적도가 증가.
•시기: 2002년 2월 4일(당시 49세).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
•장소: 국제반도체회로학술회의(ISSCC)에서
•제목: IT 시대의 반도체메모리(Semiconductor Memories for IT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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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법칙 지고, 황의 법칙 뜬다
01. 섬씽 디지털이 판치는 세상
02. 플래시 터뜨리는 황의 법칙
03. 빠른 비트에 몸을 맡겨라
04. 디지털의 화려한 플래시댄스
05. 기하급수의 세상에서 사는 법
06. 디지털 우주의 빅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