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가 암모니아를 합성하고 독가스를 만든 것은 모두 조국 독일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데···. 그는 결국 나치에 의해 축출됐다.
19세기에 들어서 유럽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농업은 마침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한계란 ‘질소의 위기’였다.
질소는 식물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될 원소이다. 땅속에 있는 질소화합물은 초석(질산칼륨)과 유기물질인데, 식물에게 착취를 당한 후 보충되지 않자 농업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19세기 초 칠레사막에서 엄청나게 큰 초석광산이 발견돼 19세기 말까지 질소비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 각국에서 칠레 초석을 앞다퉈 사가다 보니 그것도 남아날리 없었다. 결국 초석을 대체할 질소화합물을 찾는 일은 19세기 말 화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질소화합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길은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1868-1934)가 열었다. 그는 공기 중 5분의 4나 차지하고 있는 질소를 수소와 반응시켜 암모니아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19세기 말 화학자들은 공기 중의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얻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에너지 소모가 적은 경제성 있는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없었다. 암모니아만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을 산화시켜 질산을 만들고 다시 질산염을 만드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그런데 1905년 프리츠 하버가 1천℃에서 철을 촉매로 사용해 질소와 수소로부터 소량의 암모니아를 합성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촉매를 바꿔 5백℃ 2백기압에서 6-10%의 수율로 암모니아를 합성해냈다. 1913년에는 바스프(BASF)사의 카를 보슈(1874-1940)와 협력해 하루에 20t의 암모니아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하버는 BASF로부터 엄청난 기술료를 받아 졸지에 백만장자가 됐으며,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해 인류의 식량난을 막은 공로로 191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보슈도 1931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하버와 독일 화학자들이 암모니아 합성에 그토록 열을 올렸던 이유는 비단 농업생산력을 높일 비료를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군사대국의 꿈을 키우고 있던 독일에게는 폭탄을 생산하기 위한 엄청난 질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하버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전쟁이 길어져 탄약 보급이 문제가 됐으나, 하버의 도움으로 질산을 생산하고 이를 이용해 탄약의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하버는 화학병기부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조국의 승리를 위해 독가스를 연구했다. 그가 개발한 염소가스는 1915년 4월22일 프랑스 이프르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여기에 대해 세계 언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그는 “독가스도 폭탄과 다를 바 없다”며 이를 반박했다. 독가스가 신체적 상해가 아닌 정신적인 파탄을 주는 것이므로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는 자살하고 말았다. 인류를 식량난에서 구한 하버가 다시 인류를 독가스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