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생명의 비밀이 많이 풀렸지만, 생명현상의 많은 측면이 우리에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자기조립(self-assembly)이다. 생명체는 수십억년 동안 자기조립을 통해 만들어져 각종 기능을 훌륭히 해내는 수많은 나노구조를 진화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불과 20종의 아미노산, 5종의 핵산, 10여종의 지질, 20여종의 당분자와 그들의 대사물을 재료로 해서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예들 들어 세포내 단백질 제조 공장인 리보솜을 구성성분인 3-4종의 RNA와 50-60종의 단백질로 분해해 따로 보관하다 1년 뒤 섞어주면 놀랍게도 이들은 스스로 조립돼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리보솜이 만들어진다.
현재 많은 과학자들이 생체분자의 자기조립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원자나 분자가 스스로 결합해 정교한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기계나 나노구조물을 만드는 비법, 즉 상향식(bottom-up) 모델을 자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현재 하향식(top-down)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여러 분야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반도체칩은 현재 크기를 줄이는데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조각가가 정과 망치로 원하는 형상에 이를 때까지 돌을 깎아내듯이 반도체칩은 원리적으로는 같은 과정인 리소그라피, 즉 식각공정기술로 만들어진다. 집적도를 더 높이려면 ㎚수준의 정밀도로 회로를 설계해야 하는데 하향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잘 만든 정이라도 인물상의 속눈썹 하나하나를 조각해내기에는 너무 뭉툭하듯이 리소그라피로는 분자크기인 나노소자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생체분자의 자기조립화 메커니즘은 극히 일부가 밝혀졌을 뿐이지만 이를 응용한 연구는 벌써 시작됐다. 특히 DNA와 단백질의 자기조립화를 이용해 나노튜브와 나노선, 나노격자, 나노거푸집 등 각종 나노구조물을 만들고 있다. 세포를 구성하는 성분에서 최첨단 나노신소재로 변신한 생체분자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DNA가닥으로 만든 정8면체
먼저 생명체의 유전정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 매체인 DNA를 보자. DNA가 나노소재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먼저 DNA이중나선의 크기가 나노스케일이기 때문이다. DNA는 5개의 탄소로 이뤄진 당분자인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염이 뼈대를 이루고 디옥시리보스 한쪽 끝에 4종류의 염기(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중 하나가 결합돼 있는 실같은 분자다.
이때 염기는 2개씩 서로 쌍을 이루는데 (아데닌-티민, 구아닌-시토신), 하나의 DNA가닥은 각각의 염기가 서로 상보적인 또 하나의 DNA가닥과 쌍을 이뤄 이중나선을 만든다. DNA이중나선의 지름은 약 2㎚고 나선이 한바퀴를 돌았을 때 길이가 약 3.5㎚로 이 사이에 약 10개의 염기쌍이 들어있다.
또 한가지 장점은 DNA가 천연 생체분자로 세포내 수용액 상태에서 존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리콘화합물 같은 인공 나노소재의 치명적인 약점인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않는 생체 친화적인 소재다.
뭐니뭐니해도 DNA가 매력적인 나노소재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염기 서열 조작, 즉 프로그래밍을 통해 DNA 스스로가 특정한 구조로 조립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원하는 구조를 갖는 나노크기의 분자를 대량으로 쉽게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분자생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DNA염기서열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연구자들은 DNA사슬 중간 중간의 염기 서열을 교묘하게 조작해 흥미로운 나노구조물을 만들고 있다.
현재 DNA 구조물 연구의 세계 1인자는 미국 뉴욕대 화학과의 나드리안 시먼 교수. 그의 연구팀은 DNA를 떡주무르듯이 조작해 다양한 구조물을 발표하고 있다. 6종의 DNA단일가닥으로 만든 ‘DNA정6면체’ 가 대표적인 작품. DNA가닥은 4개의 단위로 이뤄져 있는데 각 단위는 다른 DNA가닥의 한 단위와 상보적인 염기서열을 갖게 설계돼 있다. 즉 6개 가닥의 총 24단위가 12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6종의 DNA가닥을 넣어주고 섞어주기만 하면 자기조립화 과정을 통해 DNA이중나선 골격의 정6면체가 만들어진다.
단 하나의 긴 DNA가닥으로 입체나노구조물을 만든 기발한 연구결과도 나왔다. 미국 스크립스연구소의 윌리엄 시 박사팀은 1천6백69개의 염기로 이뤄진 DNA단일가닥에 40개의 염기로 구성된 5개의 보조 DNA단일가닥을 넣어 정8면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결과는 올해 2월 12일자 ‘네이처’ 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 나노구조물의 전자현미경 사진을 보면 지름 약 22㎚의 정8면체 구조가 뚜렷이 나타난다.
DNA를 벽돌로 이용하면 건물의 벽이나 담장 모양을 한 나노두께의 2차원 판도 만들 수 있다. 역시 시만 교수팀의 아이디어로 연구자들은 수십개의 염기로 이뤄진 DNA단일가닥 5개가 자기조립된 DNA벽돌 2종을 만들었다. 각 벽돌의 끝부분에는 2개씩의 단일가닥이 여전히 노출돼 있는데 서로 다른 벽돌간에 서로 상보적인 염기서열을 갖게 만들어져 있다. 이들이 모르타르 역할을 해 두 벽돌이 서로 교차하면서 달라붙는다.
열십자형(十)의 DNA 단위체로 만든 나노격자도 발표됐다. 9개의 DNA단일가닥이 자기조립돼 만들어진 DNA 단위체의 끝부분에는 서로 상보적인 단일가닥이 노출돼 있어 역시 자기조립을 통해 나노격자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격자는 단백질을 올려놓는 지지체로도 쓰일 수 있음이 입증됐다.
이렇듯 DNA로 다양한 구조체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색하는 단계다. 다만 머지않아 주기적인 패턴을 갖는 구조물이나 나노기계, 나노전자공학의 소자나 바이오센서 소자 등에 DNA가 폭넓게 쓰일 것으로 예상된다. 시먼 교수는 “DNA만으로 이뤄진 유용한 장치나 기계가 나오기는 어렵다고 본다”며 “DNA는 나노기계의 중요한 부품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펩티드로 만든 나노거푸집
DNA를 이루는 염기가 4가지인 반면 단백질과 펩티드의 구성단위인 아미노산은 20가지나 된다. 그 결과 단백질과 펩티드는 DNA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최근 과학자들은 적절한 아미노산을 선택해 흥미로운 구조를 만들고 있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슈광 쟝 교수의 분자자기조립연구팀은 세포막을 이루는 인지질 분자를 모방한 펩티드를 만들어 펩티드 나노튜브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2002년 4월 16일자 ‘미 국립과학원회보’ (PNAS) 에 보고했다. 인지질 분자에는 물을 좋아하는(친수성) 부분과 싫어하는(소수성) 부분이 있다. 그 결과 소수성 부분이 서로 마주보고 친수성 부분이 바깥쪽에 배열한 이중막이 자발적으로 형성된다.
연구자들은 소수성 아미노산 6개와 친수성 아미노산 1개를 일렬로 결합시켜 길이 2㎚의 펩티드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인지질 분자처럼 2중막이 만들어지면서 지름 30-50㎚의 나노튜브를 형성했다. 연구자들은 “펩티드 나노튜브는 제조비가 싸고 화학적인 변형이 쉽다”며 “도체와 반도체 나노결정을 만들 때 틀로 이용하는 등 여러 응용분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에후드 가지트 교수팀은 펩티드 나노튜브를 거푸집으로 써서 지름 20㎚의 은나노선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2003년 4월 25일자 ‘사이언스’ 에 보고했다. 즉 나노튜브 속에 은이온을 확산시킨 뒤 환원반응을 통해 은나노선을 만든다. 겉의 나노튜브는 단백질분해효소로 제거하면 된다. 기존의 탑다운 방식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었던 지름 20㎚의 전선도 나노구조를 써서 간단히 만들 수 있게 된 셈이다.
역시 자기조립을 통해 만들어지는 지름 10㎚의 펩티드 나노섬유는 서로 얽혀 3차원 구조물을 형성한다. 이 구조물은 마치 수세미처럼 5-2백㎚ 크기의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 결과 자기 무게의 2백배 이상의 물을 머금어 젤같은 상태가 된다. 연구자들은 이 구조물을 지지체로 이용해 해마신경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했다고 ‘티슈 엔지니어링’ 2004년 3월호에 발표했다.
지금까지는 배양액 위에 얇은 투과성 막을 깐 뒤 얇게 썬 해마를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그 사이에 0.5㎜두께의 펩티드 젤을 둔 것. 그러자 기존 방법으로는 잘 자라지 않던 신경세포가 젤로 침투하면서 왕성하게 세포분열했다. 연구자들은 “세포는 나노섬유를 세포밖 조직으로 인식해 실제 뇌에서처럼 분열을 일으킨다”며 “게다가 펩티드 골격은 시간이 지나면 생분해될 뿐더러 오염이 없는 환경에서 제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펩티드 젤은 줄기세포치료를 비롯한 미래의 세포기반 치료에 널리 쓰일 전망이다.
단일 결정에 패턴을 만드는데도 자연의 상향식 방법이 도입되고 있다. 마이크로 렌즈를 비롯해 단일 결정 소자는 전자와 광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데 그 제조방법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에는 인류의 첨단 과학기술을 비웃는 놀라운 단일 결정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다생물인 거미불가사리의 골격에 있는 마이크로 렌즈 구조물. 지름이 40-50㎛인 이 바이오 렌즈의 단면을 보면 빛을 모으는 구조가 대단히 정밀하게 설계돼 있다. 그런데 이 렌즈는 부품을 조립해 만들어진게 아니라 수백개의 렌즈가 방해석 소재의 단일 결정이다. 즉 자기조립된 생체분자가 결정이 자라는 모양을 안내하는 것이다.
미국 벨연구소의 조안나 아이젠버그 박사팀은 이를 모방해 10㎛ 수준의 패턴이 있는 단일 결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2003년 2월 21일자 ‘사이언스’ 에 보고했다. 즉 유리판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마이크로기둥을 붙인 뒤 그 주위에 방해석 결정이 자라게 한 것. 그 뒤 기둥을 녹여내자 10㎛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단일 결정이 얻어졌다. 만일 먼저 결정을 만들고 구멍을 뚫는 하향식 방법을 썼다면 이런 형태를 만들기가 대단히 어렵다.
연구자들은 “마이크로나 나노패턴의 결정을 만드는데는 상향식 방법이 중요하다”며 “생명체가 나노수준에서 결정화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좀더 완벽한 나노구조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DNA나 단백질보다는 뒤에 나타났겠지만 역시 무척이나 오래된 생체분자의 하나가 포피린이다. 포피린은 헤모글로빈에서 산소가 결합하는 부분인 햄이나 광합성을 일으키는 엽록소분자의 기본 골격이다. 그런데 최근 포피린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공광합성시스템을 만들어 효율이 높은 태양전지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분자이기 때문.
국내에서는 연세대 화학과 김동호 교수팀의 연구가 활발하다. 김 교수는 “포피린은 링같이 생긴 분자로 빛에너지를 받아 생성된 전자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며 “여기에 C60, 즉 풀러렌 등 역시 전자를 잘 잡아두는 분자들을 적절히 배열시켜 전극에 연결하면 에너지 효율이 높은 태양전지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김교수팀은 포피린을 좌우상하로 반복배열할 경우 좀더 효율적으로 빛을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또 포피린을 일렬로 배열시켜 효율이 높은 나노전선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김교수팀의 연구결과는 화학분야의 전문 해설 논문지인 ‘ACS’ 2004년 10월호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생체분자의 자기조립을 이용해 나노소재를 만드는 연구 분야는 이제 막 시작단계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머지 않아 오늘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와 소자,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국 MIT 생물학과의 수잔 린드크스트 교수는 이를 멋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약 1만년 전, 인류는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가축화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분자를 길들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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