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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SF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연작만화 '슈퍼맨' 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던 1939년, 밥 케인에 의해 또 다른 SF만화 '배트맨' 이 탄생했다. 배트맨의 힘과 능력 또한 대단해 때로는 슈퍼맨을 능가할 정도였다. 스스로 발명한 갖가지 기상천외한 장치들을 만능벨트 안에 가고 다니면서 악당들을 쳐부수는 배트맨에게 독자들은 통쾌하다 못해 절로 탄성을 지르곤 했다.

'배트맨' 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슈퍼맨만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보통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가면일 뿐 주인공 부르스 웨인은 사람인 반면, 슈퍼맨은 사람이 가면이고, 그 실체는 외계에서 온 슈퍼맨인 것이다.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배트맨보다는 슈퍼맨이 더 믿음직스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상영된 '배트맨 포에버'(Batman forever)를 보면서, 어쩌면 21세기에는 정말로 배트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배트맨의 늠름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맞서 싸우게 되는 악당들 때문이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는 산업 사회에서 인간의 몰가치화에 경고장을 보냈다.
 

우리가 SF를 보는 이유

영화 배트맨에서 짐 케리가 연기하는 악당 에드워드 니그마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경영하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고용된 과학자다. 그는 텔레비전 주파수를 뇌파와 연결시켜 시청자가 텔레비전 주인공이 되는 홀로그램 장치를 개발하자며 웨인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인간의 뇌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니그마의 제안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며 웨인이 거절하자, 니그마는 독기를 품고 뇌파기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복수심은 곧바로 무서운 집착증세로 돌변한다. 우선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직속 상사를 고층빌딩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한때 자신의 우상으로 여겼던 웨인을 복수의 표적으로 삼는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웨인을 향해 "천재를 몰라보다니 후회할 걸" 이라고 되뇌는 니그마의 음습한 복수심 속에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 또한 담겨있다.

니그마는 SF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느 악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탁월한 과학자이지만 외골수적인 기질로 인해 합리적인 주류세계에서 밀려나게 되고, 마침내는 복수심과 뒤범벅이 돼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 도구는 당연히 과학기술이다.

"이 기계만 완성되면 세계는 내 것이다" 라고 떠벌리는 악당들의 망상은 기술의 쟁취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기술제국주의적' 편집증 증세와 다르지 않다. 사실 이러한 SF 악당들의 등장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들과 이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사도는 영화와 소설의 단골 메뉴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벌어지는 서구 열강들의 테크놀러지 쟁탈전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기술제국주의' 라는 말이 소름끼치는 전율로 다가온다. 그러니 이제 좀 더 진지하게 SF가 다루는 기술제국주의의 실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SF를 왜 보는 것일까? 아이작 아시모프는 SF를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장르' 라고 했다. 과학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날로 증가되는 요즘을 생각해 보면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는 SF를 통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본다. 그리고 때로는 고도의 과학 문명이 제공해 줄 혜택들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또 그 속에서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탐구하기도 하며, 곧 닥칠지도 모르는 핵전쟁 같은 재난을 근심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SF가 보여주는 유토피아적인 환상에 들뜨거나, 디스토피아적인 경고에 불안해하기 보다는, SF의 복합적인 구조에 가리워진 미래사회의 갈등 원인을 파악하고 모순구조를 파헤치는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SF작가와 감독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가.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을 가진 자의 횡포를 근심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사회에서 자본이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면서, 자본가는 그렇지 못한 자를 고용 착취하고 그들을 소외시키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Modern Times)에서는 시계 같은 거대한 산업사회에서 톱니바퀴같은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인간들의 소외된 삶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다. 나사만 보면 펜치를 돌리는 기술공이 여자의 옷에 달린 단추를 보고도 기어이 펜치로 돌리고 마는 장면은 웃음을 넘어선 씁쓸함이 있다. 이렇게 산업사회에서 자본은 생산의 한 요소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들의 삶을 규정짓고 또 그들을 소외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SF 작가와 감독들은 비정상적인 지배도구로서 20세기의 '자본'이 누려왔던 역할을 21세기에는 '과학기술' 이 물려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때론 순진한 망상처럼 보인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준 편리한 생활 이면에는 바로 그 기술로 인해 생긴 기술외적인 것들의 파괴와, 기술을 가진 자들이 노리는 일상생활의 독점, 사회통제를 위한 코드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술지배의 논리가 낳게 될 극한상황을 SF영화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는 비인간적인 과학기술을 거부하는 지하세력이 나온다.
 

미리 가보는 미래

'배트맨 포에버' 에서 니그마는 바로 기술제국주의 편집증 환자의 전형적인 예다. 그의 익살스런 표정연기 뒤에 감추어진 욕망을 따라가 보면, 그것이 기술의 독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의 표상임을 알 수 있다. 기술제국주의를 꿈꾸는 니그마가 화려한 외출을 위한 변신으로 리들러를 택한 것 역시 일관된 편집증 증상에서 연원한다. 리들러는 협박성 수수께끼를 웨인의 회사와 집에 계속 보내는데, 이러한 행위도 살인적인 광기와 병적인 집착증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술편집증은 순진한 개인적 광기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악의 세력과 연계돼 스스로가 집단을 이끌거나 아니면 다른 집단과 결탁하게 된다. 니그마는 후자를 택하는데, 천하의 악당 투페이스(Two face)와 손을 잡고 그가 강탈한 금품을 밑천으로 뇌파기계를 대량 생산하게 된다. 편집증 과학자 니그마와 악당물주 투페이스와의 만남은 과학과 자본의 잘못된 만남을 우화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그것은 소름끼치는 기술제국주의의 현실을 희화할 뿐 아니라, 개인의 편집증이 어떻게 집단적 제국주의 욕망으로 흐르는지에 대한 단적인 예가 된다.

니그마와 투페이스는 특정대상에 대해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투페이스는 배트맨에게, 니그마는 브루스 웨인에게, 이것은 두 주체의 편집증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니그마의 공격대상은 자신을 저버린 브루스 웨인 한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최종목표는 웨인의 자본을 선점한 후, 뇌파기계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버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뇌파를 흡수해 자신이 거대한 정보 독재자가 되는데 있다.

대중들이 뇌파기계를 애용하면서 홀로그램에 빠져 있는 사이, 그는 그 뇌파를 집적할 수 있는 중앙테이블에 않아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거대한 기술적 파우스트를 꿈꾼다. 바로 기술편집증이 가고자 하는 제국주의의 최종지점인 것이다.

실제로 기술편집증 환자들의 제국주의적 욕망은 인간의 삶 구석구석을 자신의 논리에 따라 지배하려는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예는 '데몰리션 맨' 의 과학자 콕도가 주장하는 기계적인 행동공학론이나 '로보캅3' 의 일본다국적 기업인 카네미스사가 펼치는 맹목적인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이 만든 법칙과 환경에 따라 개인을 지배하고 획일화하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 자체라기 보다는 과학기술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기술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문화 과학 제 8호, 155-169쪽 참조)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점은 SF영화에서 이러한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는냐 하는 점이다. 니그마와 투페이스 같은 기술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우리에겐 단지 배트맨이 절실히 필요한 것일까. 기술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들과 정의의 사도라는 대결구도로 미래사회의 갈등구조를 대변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앞으로의 SF영화는 통속성에서 벗어나, 현재의 SF영화가 보여주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나 어설픈 휴머니즘이 아닌 미래사회의 제도적 틀 안에서 기술제국주의적 욕망을 봉쇄하고, 인간의 소외를 막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길 바란다. 비록 재미는 덜 하겠지만….

영화 '배트맨 포에버' 는 악당 니그마가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기술편집증 환자의 말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편집증의 근원이 어디 개인의 망상뿐이겠는가! 기술제국주의의 근원은 광기어린 개인의 망상이나 편집증에 있다기 보다는, 맹목적인 기술에 의존하는 거대사회의 구조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인 과학기술의 막강한 힘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써야할까. 과학의 발전으로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에겐 배트맨보다 올바른 가치관이 필요하다.
 

1996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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