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구덩이엔 아홉 구 묻을 거니까 좀 더 깊이 파”, “이쪽 구덩이로 시체 한 구 더 옮겨와.”
사람들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지시에 따라 구덩이마다 시체를 넣기 시작했다. 시체가 한 구 놓인 구덩이가 있는가 하면 많게는 아홉 구가 들어간 구덩이도 있었다. 분주히 시체를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오전 내내 땀방울을 흘린 뒤에야 시체 24구를 모두 구덩이에 묻을 수 있었다.
범죄 현장이 아니다. 미국 테네시대의 시체농장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2013년 2월 법의인류학센터에서는 ‘집단 매장’ 실험을 시작했다. 시체 여러 구가 한꺼번에 묻혔을 때 어떤 특이한 부패 양상이 나타나는지 보기 위해서다. 또 시체가 부패하는 동안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연구해 현장에서 매장지를 찾거나 시체를 발굴하는 법의인류학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기도 하다. 미국 법무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 실험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재난대응팀에 법의인류학자가 속해있는 이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집단 학살이나 테러 같은 범죄는 물론 건물이 무너지거나 철도, 항공기, 선박 사고가 나는 경우가 그렇다. 쓰나미, 지진, 산사태 등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인명 피해는 더욱 커진다. 이런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다. 시체는 훼손되고 절단된 채 주변으로 흩어져 다른 물건이나 구조물과 뒤섞인다. 화재까지 동반된 상황에서는 시체의 원래 형태를 파악하기가 훨씬 힘들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체는 부패하고 경우에 따라 전염병이 돌기도 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 빨리 수습되지 않으면 해당 지역은 자칫 사회적 기능마저 마비될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정리만 서두르다 보면 피해자의 신원 확인에 필요한 중요 단서를 놓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실수를 줄이고자 대규모 인명 사고에 대비한 특별팀을 운영하는 나라가 여럿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산하에 집단사망자관리단이 활동 중이다. 미국 역시 권역 별로 10개의 재난대응팀(DMORT)을 갖추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특별팀 내에서 법의인류학자의 역할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시체를 탐색하고 수습하고, 또 뒤섞인 시체를 개체 별로 분류해 최종적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모든 단계에 법의인류학적 지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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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매장지에서는 시체마다 부패 속도가 다르다. 여러 구의 시체가 땅 속에 묻혀 큰 더미를 이루고 있는 경우라면 중심부의 시체가 주변부에 비해 천천히 부패한다. 시체들이 단단히 압착되면 부패 물질과 수분이 바깥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공기가 부족해지면서 결국 부패를 돕는 호기성 박테리아가 활동할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체의 체지방은 수분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녹다 만 버터처럼 물컹거리고 미끈미끈한 시랍(Adipocere)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시랍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단 시랍이 형성되면 시체의 부패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매장된 깊이와 흙의 재질 또한 부패 속도에 영향을 준다. 땅 속 깊이 매장돼 큰 압력을 받거나 진흙처럼 입자가 고운 흙에 묻힌 경우엔 부패 속도가 더뎌진다. 이런 환경에선 수분과 공기가 투과하기 힘들고 시체를 물리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도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 매장지에서 시체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또 주변 환경은 어떤지 등을 고려하지 않고 홀로 발견된 시체와 같은 방법으로 사건 발생 시간을 추정하려고 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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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다수 발견된 현장에서는 이곳에 원래 몇 구의 시체가 있었는지 파악해야 한다. 피해자의 규모를 알지 못하면 현장 탐색이나 피해자 신원 확인 작업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나 선박 사고처럼 탑승객 명단이 기록돼 있는 경우엔 피해자의 수를 이미 아는 상태에서 현장을 탐색하게 된다. 따라서 그 수만큼 시체를 수습했을 때 탐색을 중단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화재나 건물 붕괴 사고처럼 정확한 피해자의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도 있다.
전자와 후자를 각각 닫힌 집단, 열린 집단 케이스라한다. 열린 집단 케이스에서는 현장 탐색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서야 피해자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때 어떤 부위가 가장 많이 출토됐는지를 기준으로 최소개체수를 계산해 전체 규모를 추정하는 방법이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왼쪽 허벅지 뼈가 4점, 오른쪽 허벅지 뼈가 7점 출토됐다면, 이곳에 최소 7구의 시체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식이다. 최소개체수 외에도 피해자의 규모를 좀더 정확히 추정하기 위해 링컨지수나 근사개체수 등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링컨지수(LI) : LI = LR/P(L = 왼쪽 뼈 개수, R = 오른쪽 뼈 개수, P = 동일인의 뼈라고 판단되는 좌우 뼈의 쌍). 예를 들어, 현장에서 왼쪽 뼈가 4점, 오른쪽 뼈가 7점 출토됐고 왼쪽 뼈 4점과 오른쪽 뼈 4점이 각각 쌍을 이룬다고 (같은 사람의 뼈라고) 판단되는 경우, LI = 4x7/4 = 7이다. 최소 7구의 시체가 있었다는 뜻이다.
근사개체수(MLNI) : MLNI = (L+1)(R+1)/(P+1) – 1(L = 왼쪽 뼈 개수, R = 오른쪽 뼈 개수, P = 동일인의 뼈라고 판단되는 좌우 뼈의 쌍). MLNI는 LI를 통계적으로 수정한 방법이다.
뒤섞인 뼈 제자리 찾기
백골화된 시체가 여러구 뒤섞인 채 발견됐다면 신원확인 작업에 앞서 한 구씩 개체 구분을 해야 한다. 한 개체에 속하는 뼈가 많을수록 그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신원 확인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개체 구분을 위해서는 현장에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래 뼈가 놓여 있던 위치를 통해 다른 뼈와의 관계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체가 땅 속에 묻힌 뒤에 백골화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뼈들이 해부학적인 연관성을 잃지 않고 제 위치에서 고스란히 발견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장에서 뼈를 수습할 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각 뼈의 연관성을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만약 현장을 급히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뼈의 출토 상태를 도면과 사진, 혹은 3차원 스캐너로 상세히 기록해야 한다. ‘상세히’ 기록한다는 것은 이 기록만으로도 뼈들을 원래 현장에 있던 상태로 배열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도면엔 뼈의 종류는 물론 뼈의 방향, 즉 뼈의 위쪽, 아래쪽, 앞면, 뒷면 등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 도면을 그릴 때 법의인류학자가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다. 필자는 뒤섞인 채 발굴된 32구의 뼈를 실험실로 옮겨 개체를 구분한 적이 있다. 상세히 기록된 도면과 사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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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애초에 무작위로 섞인 채 발견됐다면 현장보다는 실험실에서의 역할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법의인류학자들은 뒤섞인 뼈를 구분하기 위한 다양한 훈련을 받는다. 예를 들어, 좌우측 뼈를 여러 개 놔두고 형태학적인 특징만을 이용해 각각의 쌍을 찾아내는 연습을 한다. 허벅지 뼈와 정강이 뼈처럼 서로 연결되는 뼈라면 관절 부분을 맞대보면서 같은 사람의 뼈인지 판단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뼈의 크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덩치가 큰 사람일수록 뼈의 크기도 더 크기 때문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미국 국방성전쟁포로및실종자확인국(DPAA) 실험실엔 580구의 뼈대를 계측해서 모은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연구자들은 두 뼈의 크기 차이를 계산해 이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함으로써 이 두 뼈가 서로 다른 사람일 확률을 구한다. DNA 분석도 개체 구분에 유용하게 쓰이지만, 다른 방법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꼭 필요한, 최소한의 뼈에 대해서만 실시하는 게 원칙이다.
현대 사회는 수많은 사건 사고에 노출돼 있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은 항상 안타깝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의 슬픔은 무엇보다 크다. 특히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재해가 발생하면 사회의 기능마저 마비되기 때문에, 이 상황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의 중심에는 법의인류학자가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법의인류학자를 만드는 건 데이터다. 우리 나라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시체농장도 좋고, 뼈대 컬렉션도 좋다. 대한민국의 법의인류학자로서 우리나라가 우리나라만의 데이터를 쌓아 나갈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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