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는 사람이 눈을 깜박이는데 걸리는 시간의 5분의 1만에 비행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미 캘리포니아공대 생명공학과 마이클 디킨슨 교수는 이런 놀라운 순간 동작에 매료돼 수년간 초파리의 비행 비밀을 연구해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득 새로운 의문을 갖게 됐다. 저해상도의 카메라폰보다도 훨씬 떨어지는 25×25화소의 눈을 지닌 초파리가 어떻게 이런 정교한 비행을 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초파리의 놀라운 후각능력에 있었다. 1㎞밖에서도 냄새를 따라 근원지를 정확히 찾아가는 초파리의 후각은 극도로 예민한 ‘바이오센서’ 인 것이다. 최근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넷판은 ‘미래 생활을 바꿀 10가지 발명’ 의 하나로 디킨슨 교수의 초파리 센서를 선정했다. 이정도로 정밀한 센서가 개발된다면 숲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을 때도 체취분자를 감지하는 센서를 부착한 로봇 초파리 수색부대가 동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과학자들은 생명체에 존재하는 다양한 바이오센서를 이용해 분자수준에서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나노바이오센서’ 를 개발하는데 뛰어들고 있다. 제약회사에서는 암세포를 인식하는 나노입자에 약을 실어 부작용 없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10년 뒤에는 전체 제약상품 가운데 절반이 나노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몇몇 과학자들은 DNA나 단백질 같은 생체분자를 이용한 나노구조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개중에는 생체분자를 모방해 분자기계를 만들겠다는 모험가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 또는 줄여서 ‘NBT’ 라 부른다. 최근 퓨전요리가 유행인 것처럼 바이오테크놀로지(BT)와 나노테크놀로지(NT)가 융합된 새로운 연구분야가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BT이나 NT 역시 현재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분야라 일반인은 물론 과학자조차도 최신 연구결과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제 NBT라니….
그러나 둘의 만남은 예상된 일이었다. 생명체의 기본단위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거의 전부가 나노 수준에서 정밀하게 조절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름이 10㎛ 정도인 세포 속에는 수십㎚ 크기의 수많은 바이오센서와 분자기계들이 작동하고 있다.
세포막에 박혀있는 수용체분자는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을 인식해 신호를 전달한다. DNA의 유전정보를 담은 전령RNA를 읽어들여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리보솜은 나노조립라인이고 DNA를 복제하는 중합효소는 복사기에 해당한다. 단백질분해효소는 건물해체현장의 불도저와 같고 세포막에 있는 이온채널은 출입카드로 열리는 문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바이오테크놀로지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개별 생체분자의 구조와 움직임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지난 10-20년 동안 나노기술이 발전하면서 개발된 각종 기기와 방법이 적극 도입되고 있다. 즉 원자 하나하나를 직접 들여다보는 원자현미경, 펨토(femto, 1천조분의 1)초 수준에서 분자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레이저기술, 한겹의 두께로 분자를 까는 나노코팅기술 등이 그것이다.
한편 생명체의 나노과학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나노테크놀로지를 혁신시킬 것이다. 대부분의 생체분자는 자기조립(self-assembly), 즉 원자나 분자가 스스로 결합해 정교한 기능을 수행하는 나노기계나 나노구조물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노소자는 현재 크기를 줄이는데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반도체칩 개발에 돌파구가 될 전망이다.
잠재력 무한한 NBT
이번 특집에서는 이런 미래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의 현주소를 소개한다. 생체분자를 모방하거나 그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만든 분자기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과연 이들이 영화에 나오는 나노기계처럼 발전할 수 있을까.
생명체만큼이나 감도와 정확성이 높은 바이오센서의 개발도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의 중요한 한 분야다. 미량의 시료만으로도 질병을 진단하고 병균이나 오염물질을 검출할 수 있는 바이오센서는 미래의 의학과 환경분야를 혁신시킬 것이다.
나노입자를 이용한 약물전달시스템 개발도 중요한 분야다. “오늘날 질병을 고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는 망치로 고장 난 시계를 수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독일 ‘슈피겔’ 지의 묘사처럼 기존의 약물치료는 효과에 비해 부작용이 너무 크다. 분자차원, 즉 나노수준에서 약물을 조종하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 그 해결책으로 바이오센서로 병소를 찾은 뒤 약물을 터뜨리는 나노입자를 설계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한편 생체분자의 자기조립화 메커니즘을 응용해 새로운 나노소재를 만드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DNA, 단백질로 만든 나노튜브와 나노벽돌, 나노격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현재의 연구결과들이 하나둘 실용화되기 시작하면 삶의 패러다임이 바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매년 급증하고 있는 당뇨병환자들은 혈당수치를 실시간으로 체크해 적정량의 인슐린을 분사하는 나노기계를 몸속에 내장함으로써 인슐린주사의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것만으로는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새로 등장한 분야가 그렇듯이 이 분야 역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지 전문가조차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책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 개념, 적용, 전망’ 의 서문의 한 구절처럼.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의 미래는 밝다. 다만 현재의 상상력으로는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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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자로 나노기계 만든다
2. 단 한 개의 바이러스도 검출한다
3. 첨단 나노기술로 웰빙의약품 만든다
4. DNA로 나노벽돌 찍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