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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랑은 뇌가 한다

내 사랑은 로맨스일까 에로스일까

 

‘아니, 이 여자가 갑자기 왜이래?’ 밥을 먹다가 갑자기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흔드는 샐리(멕라이언)를 보고 해리(빌리 크리스탈)는 황당해한다.


손님들로 가득한 식당이 대화로 왁자지껄하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종업원들은 분주히 음식을 나른다. 가운데쯤 놓여 있는 식탁에 젊은 남녀 한쌍이 앉아 있다. 여자의 모습이 무척 깜찍하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도중 여자가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감고, 율동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를 연이어 낸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식당의 손님들은 눈이 휘둥그래져 이들을 바라본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에서 샐리(멕 라이언 역)가 오르가슴에 이른 여인을 흉내내는 장면이다. 오르가슴은 인간에만 있는 현상이지만 그 원시적 형태, 즉 성교의 쾌락은 모든 동물이 갖고 있다. 그렇다면 섹스는 왜 즐거운 것일까.

섹스와 간질의 공통점
 

성행위에 열중할 때는 대뇌변연계에 페닐에틸아민이 많아져 행복감에 도취된다. 스릴을 느낄 때면 페닐에틸아민이 더 나온다는 연구도 있다. 부모의 반대가 오히려 사랑을 돈독하게 하는 이유다.


이에 대해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생리학자이자 과학 저널리스트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책 한권을 썼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유전자가 증식하기 위해서는 암수가 서로 결합해야 한다. 따라서 유전자는 암수가 교미하면 쾌감이 생기도록 동물의 뇌를 만든 것이다. 즉 섹스의 쾌락은 우리의 유전자 복제 노력에 대한 유전자의 보상이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인 이유는 이것이 유전자 복제를 하지 않고 떠나려 하는데 대한 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상이든 벌이든 이들은 모두 뇌의 작용으로 이뤄진다. 결국 사랑 또는 성행위는 성기로 하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복잡한 뇌의 작용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우리 몸의 가장 큰 성기는 뇌”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신경과 의사인 필자는 멕 라이언이 연기하는 오르가슴 흉내를 보면서 간질 환자가 발작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간질 환자는 흔히 몸을 뻣뻣하게 또는 율동적으로 움직이며 끙끙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멕 라이언의 팬들에게는 이런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겠지만 사실 성행위와 간질 발작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대뇌 신경세포의 과도한 활성화인 것이다.

오르가슴을 느낄 때 대뇌가 활성화되는 모습을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성행위 도중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이나 양전자방출 단층촬영(PET) 같은 장비를 사용해 뇌의 변화를 조사해야 하지만 이처럼 용감한 학자는 아직 없었다. 하지만 성적 쾌락이 주로 대뇌 안쪽 부분인 변연계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신경세포의 전기적 활성화임은 분명하다.

1966년 미국의 생리학자 데이비드 맥클린은 원숭이에서 중격 핵, 시상, 외측 시상하부, 대상속 등 여러 변연계 구조물들을 자극한 결과 성적인 흥분이 유발되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 인간도 성행위 도중 뇌의 이런 부위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크다. 드물기는 하지만 뇌의 이런 부위에서 비정상적인 뇌파가 발생하는 간질 환자의 경우, 발작이 일어나는 동안 성적인 흥분 상태를 경험하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변연계 회로의 폭발적인 활성화라면, 실제로 오르가즘을 경험하는 뇌의 상태 역시 간질 환자의 뇌와 비슷할 것이다. 결국 오르가슴이란 마치 프랑스 작곡가 조세프 모리스 라벨의 음악 ‘볼레로’ 처럼, 성기에 가해지는 음률적 말초신경 자극에 의해 점차 증폭되는 변연계의 과도한 활성화다.

그러나 반드시 성행위를 통해 변연계를 자극하는 방식으로만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뇌 피질을 자극해 변연계 활성화를 유도하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여자가 빨간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예쁜 핀을 꽂았다면 이런 자극은 남자의 시각중추로 들어가며, 결국 이와 연결된 편도체를 자극해 변연계를 활성화시킨다. 몸에 뿌린 향수는 후각중추를, 맛있는 음식은 미각중추를, 그리고 식당의 아늑한 음악은 청신경중추를 통해 변연계를 자극한다. 연인들이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대뇌 피질 중 특히 전두엽이 발달한 동물로 진화한 인간 남녀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두엽 회로를 경유한 변연계 자극일 것이다. 전두엽은 주의집중력이나 판단력과 같은 인간의 지능에 관여하는 영역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확인하며 자신과 동질성을 느낀다면, 게다가 상대방의 어려움을 서로 희생적으로 돕고자 하는 의지마저 생긴다면 이는 전두엽을 통한 가장 높은 차원의 변연계 자극이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하면서 남녀가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많이 관찰된다. 전공의들 중에도 당직하는 도중 어려운 환자를 돌보며 함께 고생하다가 가까워져 결혼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유하자면 성행위가 성기의 말초신경세포로부터 변연계를 향해 오르는 ‘상승식’ 애정확인 작업이라면, 전두엽을 사용한 만남은 신피질부터 시작해 변연계로 내려오는 ‘하강식’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등생물답게 우리는 누구나 데이트를 하강식 방법으로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식사나 함께 합시다”하지, 처음부터 “섹스나 함께 합시다”하지는 않는다.

실연과 강박증의 유사점
 

드라마 ‘불새’ 에서 고아 출신 고학생 세훈은 천방지축 오렌지 아가씨 지은을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 영국 런던대 안드레아스 바르텔스 연구팀은 “사랑에 빠지면 타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뇌신경조직이 억제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세훈과 지은이 이혼한 걸 보면 콩깍지도 수명이 있는 듯하다.


오르가슴 상태의 뇌가 fMRI나 PET를 사용해 연구된 적은 없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감정을 연구한 학자들은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는 미 앨버트 아인슈타인대 신경과학자들과 협력해서 최근에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이들에게 애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fMRI를 찍었다. 그리고 애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찍은 사진과 대조함으로써 애인을 바라볼 때 특별히 활성화되는 뇌의 부분이 어딘지를 알아봤다.

뇌의 여러 부분이 활성화됐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관련이 깊은 미상핵, 그리고 뇌간의 일부였다. 이 두 부분의 활성화는 지원자가 평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즉 피셔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주로 활성화되는 것은 도파민이 함유된 신경세포들이다. 미상핵의 도파민은 관심, 주의집중, 상승된 무드 그리고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구 등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동도 이와 비슷하다.

반대로 연인과 헤어진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연구한 학자들은 아직 없는데, 이런 실험은 지원자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의 증세가 강박신경증 환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일은 제쳐두고 그 사람에게만 강박적으로 신경이 쓰이고, 그 사람을 떠나기 힘들어 괴로워한다. 강박신경증은 뇌의 세로토닌 결핍과 관계 있으므로 앞으로 세로토닌 계열의 약물이 실연의 고통을 줄이는데 사용될지도 모른다.

한편 영국 런던대의 세미르 제키 교수와 박사과정 안드레아스 바르텔스 연구팀은 로맨틱한 사랑과 에로틱한 사랑을 구분하고자 시도했다. 연구팀은 포스터나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사랑에 푹 빠졌다고 믿는 자원자 17명을 모집했다. 이들에게 애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느끼는 감정의 정도를 수치화해 적게 했다. 그리고 로맨틱한 느낌(정신적인 사랑의 느낌)과 에로틱한 느낌(성적인 느낌)을 각각 구분해서 적으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fMRI로 뇌의 활성화되는 부위를 알아봤다. 그 결과 혈류량이 증가한 부위는 역시 미상핵이었다. 그 외에도 도피질, 대상회 앞쪽, 그리고 소뇌도 혈류량이 증가했다. 편도체의 뒤쪽은 오히려 혈류량이 감소했다.

도피질이란 전두엽의 아래쪽에 파묻힌 부분으로 변연계와 많이 연결돼 있다. 미각을 담당하는 부위이기도 하다. 대상회란 변연계 회로의 앞쪽 가장자리로서 전두엽의 아랫부분에 속한다. 지원자들이 매긴 점수에 따르면 애인을 바라볼 때 로맨틱한 느낌이 에로틱한 느낌보다 훨씬 강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뇌의 이런 부위가 순수한 정신적인 사랑을 만들어 내는 곳일까.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실험에서 활성화된 뇌의 부위가 에로틱한 감정으로 활성화되는 곳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르텔스와 제키의 실험에 앞서 프랑스 CERMEP 연구소의 세르제 스톨레루 교수 연구팀은 이미 에로틱한 느낌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팀은 건장한 청년 7명에게 포르노 영화를 보여주며 PET를 사용해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조사했다.

이때 활성화된 부분은 측두엽의 아래쪽, 도피질, 전두엽의 아래쪽, 앞쪽 대상회였다. 측두엽의 아래쪽은 후두엽의 시각 피질과 연관된 부위다. 이는 지원자들이 영화를 봤기 때문에 활성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피질, 전두엽 아래쪽, 앞쪽 대상회의 활성화는 바르텔스 교수팀의 연구결과와 비슷하다. 즉 에로틱한 느낌과 로맨틱한 느낌을 일으키는 뇌의 부위는 별로 뚜렷한 차이가 없다고 나타난 것이다.

로맨티스트 vs 에로티스트
 

헐리우드 배우에서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왼쪽). 그녀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동물의 감정적 흥분에는 변연계 중심부에 있는 중격핵이나 편도체의 활성화가 중요하다.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형성 역시 이런 구조물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에로틱한(동물적인) 감정을 느낄 때조차 동물에 비해 변연계 주변부가 훨씬 넓게 활성화됐다. 특히 변연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전두엽 하부, 도피질, 기저핵 등이 폭넓게 활성화됐다.

그렇다면 이성에 대한 인간의 순간적인, 육체적인 욕망은 동물의 사랑보다 더 고상한 행위일까? 우리는 흔히 욕망에 사로잡힌 자를 ‘짐승 같은 인간’이라고 욕하지만 누구라도 짐승보다는 나은 것인가?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같은 결과를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로맨틱하게 애인을 바라볼 때와 포르노를 구경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가 거의 동일하다면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구분이란 무의미한가?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미 하버드대의 한스 브라이터 교수 연구팀은 코카인 중독자에게 코카인을 투여하면서 fMRI를 사용해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도피질, 전두엽, 기저핵이 활성화된 반면 편도체의 활동은 줄어들었다. 즉 활성화된 부위는 여전히 로맨틱한 사랑을 연구한 바르텔스 연구팀의 결과와 흡사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랑 행위는 마약과도 같은 것인가?

환희에 찬 순간 인간 뇌의 작용은 어쩌면 모두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몇몇 실험결과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기는 이르다. 애인을 바라볼 때, 포르노를 구경할 때, 마약을 할 때 인간은 기대와 흥분, 그리고 더 지속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다만 이제껏 fMRI를 통해 알아낸 뇌의 활성화는 이런 공통된 인간의 심성을 만들어내는 뇌의 작용만을 보여준 것 같다. 이 세가지 행위의 근저에 놓인 엄연한 차이를 구별해내기에는 아직 인간의 기술이 미비하다고 생각된다. 뇌의 작은 부분이 활성화된 것이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학자들이 만들어낸 실험모델이 불완전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사랑과 아폴론적 사랑의 차이에 관해서는 인문학자뿐 아니라 뇌과학자들도 당분간 결론을 유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볼레로

러시아의 여배우이자 무용가인 이다 루빈스타인의 의뢰로 1928년 라벨이 작곡한 관현악곡. 원래 볼레로는 연애의 흥분을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한쌍의 남녀가 추는 스페인 민속춤의 3박자 무곡이다. 라벨은 이 무곡에서 착상해 단 하나의 테마를 반복하면서도 특수한 악기 편성으로 전혀 지루하지 않은 명곡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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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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