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호감을 얻기 위한 구애동작으로 어떤 곤충은 날개로 현란한 춤을 춘다. 그 날갯짓은 대략 1분마다 반복된다. 바닷가 갯벌에 서식하는 조개류는 입수공의 여닫이 간격이 약 12시간이다. 이 때문에 밀물이나 썰물의 시기에 맞춰 바닷물 속 먹이사냥을 쉽게 한다. 초파리와 같은 곤충은 하루 중 이른 새벽에만 번데기에서 성체로 된다. 만약 그 시기를 놓치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어른이 된다. 동물은 약 28일 주기의 달 리듬에 맞춰 산란기를 조절한다. 그리고 동면이나 짝짓기, 철새이동의 경우 1년 주기의 생체리듬을 나타낸다.
1분, 12시간, 24시간, 28일, 1년. 생물은 이처럼 다양한 주기의 생물학적 리듬 또는 생체시계를 갖고 있다. 주변 환경변화에 대응해 몸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하등한 세균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에게 다양한 생체시계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중인 생체시계가 ‘일주기리듬’(circadian rhythm)이다. 일주기리듬은 하루를 주기로 우리 몸의 대사활동이 변하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 수면-각성주기나 호르몬의 분비량, 체온의 변화가 일주기리듬이다.
최근 과학자들은 일주기리듬을 지배하는 생체시계가 각 생물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들은 생체리듬과 직접 관련된 분자생체시계, 즉 시계유전자를 발견했고, 그 결과 분자수준에서 일주기리듬의 작용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물이 외부 환경에 대해 단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처음으로 시계유전자의 존재가 밝혀진 시기는 1970년대 초. 초파리의 변태가 일주기성을 갖는다는 사실에 미 캘리포니아공대 대학원생 론 코놉카는 획기적인 가정을 세웠다. 일주기리듬을 다스리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2천마리의 초파리에 약물을 먹여 돌연변이를 유도했다. 그리고 일주기리듬에 문제가 생긴 3마리의 초파리 돌연변이를 분리해냈다. 그는 이 돌연변이를 ‘피리어드’라고 명명했다.
피리어드는 1984년 염기서열이 해독됐다. 그리고 1994년 미 록펠러대 마이클 영 박사는 피리어드와 함께 초파리의 일주기리듬을 만들어내는 ‘타임리스’라는 새로운 유전자를 밝혀냈다. 이후 본격적으로 생체시계의 작동방법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한편 포유동물에서도 시계유전자가 발견됐다. 1988년 일주기리듬에 문제가 있는 햄스터가 발견됐다. 그리고 1994년 미 노스웨스턴대의 조셉 다카하시 박사는 생쥐에게 인위적으로 일주기리듬에 문제가 발생하도록 해서 돌연변이를 찾아냈다. 이 돌연변이를 ‘클락’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 유전자는 1997년 해독됐다.
생쥐는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 유전적으로 인간과 유사하다. 이런 까닭에 클락 유전자의 발견 이후 포유류 생체시계연구의 주요 실험동물로 대접받고 있다. 현재까지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포유동물에서 ‘시계유전자’가 여럿 발견됐다.
시계유전자의 작동원리는 물시계와 비슷하다. 세포의 핵에서 시계유전자가 작동을 시작하면 이들이 만들어낸 시계단백질이 핵 바깥에 점점 많아진다. 그러다가 물시계에 물이 가득찬 상태처럼 핵 바깥의 시계단백질 수가 최고 수준에 도달하면 이들 시계단백질은 핵 속으로 들어가 시계유전자의 활동을 방해한다. 그 결과 핵 바깥의 시계단백질 수가 줄어든다. 마치 물시계에 물이 비워지듯. 이후 시계유전자가 다시 작동을 시작한다. 이 과정이 24시간 주기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어디가 여러 시계유전자들의 작용을 통제하는 곳일까?
우리 눈의 망막신경절 세포층에는 광수용 단백질이 있다. 그래서 눈은 햇빛 속의 특수 파장대를 흡수한다. 흡수된 빛 신호는 망막에서 이어지는 시신경전달경로를 거쳐 뇌의 깊숙한 부분인 시상하부 끝에 자리잡은 ‘시교차상핵’이라는 부위로 전달된다. 시교차상핵은 약 1만여개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좌우 한쌍의 마치 눈물방울 모양의 조그마한 신경핵이다. 이곳이 바로 생체시계의 조절중추다.
시교차상핵은 우리 몸의 생체시계를 깨우는 환경요인에 반응한다. 가장 대표적인 환경요인은 햇빛. 빛은 생체시계를 재설정한다. 그래서 시간대가 다른 나라를 가면 생체시계가 새롭게 맞춰질 수 있다. 이외에도 계절에 따른 온도변화도 생체시계를 깨운다.
시교차상핵을 구성하는 신경세포는 햇빛에 반응해 고유의 리듬을 시작한다. 이때 각 신경세포의 고유리듬이 약 24시간 주기이다. 이들의 고유시계가 하나의 리듬으로 통합됨으로써 우리 몸의 일주기리듬이 생겨난다.
일단 시교차상핵 신경세포들의 일주기리듬이 시작되면 외부환경요인이 없어져도 자발적으로 반복, 재생된다. 때문에 빛을 더이상 볼 수 없는 지하동굴에 들어가 있어도 우리 몸의 일주기리듬이 유지된다.
뇌속의 시계중추인 시교차상핵은 어떻게 우리 몸의 전체적인 일주기리듬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것일까?
최근 스위스 제네바대 쉬블러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뇌와 동일한 시계유전자가 존재하고 주기적으로 그 발현이 조절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세포나 조직을 몸에서 따로 떼어, 즉 뇌 시계와 분리해 배양하면서 시계유전자들의 리듬을 관찰해보면 약 24시간 주기로 리듬이 며칠 동안 반복되다가 곧 소멸된다. 이들 배양세포나 조직에서의 시계리듬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려면 신호전달물질, 성장인자, 영양분 등의 공급이 계속돼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 시계유전자들의 최고 발현 시기는 간, 허파, 근육 등 각 조직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그 리듬은 대부분 뇌 시계중추에서보다 4-6시간 정도 늦게 진행된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까닭은 우리 몸속의 여러 시계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시계중추가 있는 뇌 부위가 손상된 경우 우리 몸 다른 부위의 시계리듬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뇌 시계가 몸 각 부분의 시계리듬을 통제하는 상위의 ‘주인시계’이고, 몸 각 부분의 시계들은 주인시계에 종속된 ‘노예시계’라 할 수 있다.
뇌속 주인시계는 빛의 자극을 받아 시계리듬을 생성, 유지시킨다. 그리고 이 신호를 몸 각 부위의 노예시계에 전달해 그들의 시간을 재조정하고 조직 고유의 리듬을 유도시킨다. 그 결과 우리 몸은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필요한 신호의 전달방식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신경세포 사이의 직접 접촉을 통해서거나 호르몬 같은 물질을 혈액에 방출하는 방법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때로 노예시계는 주인시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리듬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실험용 생쥐를 먹이와 물을 주며 키우면 주인시계와 노예시계는 잘 조율된 시계리듬을 나타낸다. 하지만 먹이를 제한적인 시간에만, 예를 들어 12시간마다 하루에 2번씩 제공하며 키우면 뇌속 주인시계와는 별도로 자율적인 생체시계 리듬이 간 조직에서 생겨난다. 심지어 뇌 시계중추를 완전히 손상시킨 동물에게 특정 시간에만 먹이를 공급하기를 반복하면 고장난 뇌시계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간에서 자율적인 시계리듬을 회복시킬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가보다.
시간치료법
인간의 활동 시간대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져가는 추세다. 미국의 최근 통계자료에 따르면 심야에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약 20%에 이른다. 이들처럼 수면 휴식기인 심야에 인공조명에 오래 노출돼 있으면 생체시계에 악영향을 줘 수면질환, 우울증, 면역기능의 저하로 인한 발암율의 증가, 내분비대사의 불균형, 그리고 집중력 저하로 인한 작업능률의 감소와 산업재해의 증가가 초래된다. 최근에는 생체시계과 생체활동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미 유타대 연구팀은 정상인의 평균보다 훨씬 일찍 잠자리에 들고 일찍 일어나는 수면 패턴을 갖는 조기수면주기 증후군의 가계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수면질환의 원인이 생체시계유전자인 Per2의 돌연변이 때문으로 밝혀졌다.
한편 우리는 장거리여행시 일시적인 수면효과를 얻기 위해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호르몬제재를 복용한다. 멜라토닌은 우리 뇌의 송과선에서 정상적으로 밤 시간대에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호르몬을 생산하는 특정 효소단백질의 활동 또한 생체시계의 조절을 받아 밤에만 활성을 가지며 이 호르몬의 작용을 매개하는 수용체가 시계중추에서 발견되고 있다.
우리 몸의 정상 세포는 분열주기가 24시간이고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더이상의 분열을 중지하다가 세포사멸이라는 기작에 의해 그 수명을 다한다. 이때 분열 시기나 속도 조절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면 암세포로 전이가 일어난다. 이런 까닭에 세포분열과정이 생체시계와 상호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그런데 최근 생체시계유전자 Per2를 손상시킨 생쥐의 경우 침샘이나 임파종의 발암빈도가 정상 대조군에 비해 매우 높다는 보고가 나왔다. 일본 고베대의 히토시 오카무라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실험동물이 간 조직의 손상을 받았을 때 재생을 위해 세포분열을 왕성하게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의 진행시기를 알리는데 생체시계가 작용한다고 한다. 생체시계의 가속장치인 ‘클락’과 ‘비말1’이 세포분열과정에 관여하는 ‘위1’이라는 특정 효소의 합성을 주기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생체시계와 세포분열시계를 동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체시계유전자들은 세포분열의 진행을 조절하는 일종의 종양억제유전자로 작용할 수 있다.
생체시계의 이해가 진일보함에 따라 최근에 의학계에서 ‘시간치료법’(chronotherapy)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생체시계 주기에 따라 각종 인체질환의 진행정도나 발병 빈도, 약물치료의 효과 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에 근거해 특정 시간대에 투약을 하는 치료방법이다.
실제로 여러 질환 예를 들면, 심혈관계 질환, 천식, 관절염, 각종 암 등은 특정 시간대에 그 치료효과가 증가한다고 한다. 치료 약물의 흡수, 대사과정 및 분비되는 정도가 생체시계의 리듬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체시계의 작동방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들 신호전달경로나 전달물질의 발견이 선행된다면 새로운 차원의 신약이 개발될 수 있다. 생체시계를 자유자재로 조절함으로써 이의 오작동에 의한 여러 부작용을 해결한 날이 열릴 전망이다.
시간치료법 사례
천식 폐 기능은 이른 아침에 가장 떨어진다. 천식환자의 경우 특히 이 시간에 폐 기능이 심하게 저하된다. 1989년 미식품의약청(FDA)은 이른 아침에 복용하는 기관지 확장제를 승인했다.
관절염 골관절염 진통은 아침에 덜하고 저녁에 심하다. 반면 류마티즘 관절염의 경우에는 보통 아침에 진통이 가장 심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다. 항염증제와 같은 관절염 치료약은 진통이 가장 심할 때 혈액 내 약성분이 가장 높도록 투약한다.
암 동물실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시간치료법은 항암제의 효과를 높이고 독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종양세포사멸 주기에 맞추면 일반 세포에는 영향을 적게 하면서 약물의 효과는 높일 수 있다는 것.
심장발작 최근 심장질환자가 심장마비 예방을 위해 일정량의 아스피린 복용을 권장하고 있다. 시간치료법의 관점에서 볼 때 아스피린은 저녁보다 아침에 좀더 효과적이다. 심장발작의 빈도가 아침에 높기 때문.
신체변화의 일주기리듬
AM 1:00 면역세포인 T림프구 수치 최대분만 가장 빈번
AM 2:00 성장호르몬 수치 최대
AM 4:00 천식 발작 위험 최대
AM 6:00 혈중 인슐린 수치 최소혈압과 심장박동 증가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 증가멜리토닌 수치 감소
AM 7:00 꽃가루 알레르기 증상 최대
AM 8:00 심장발작, 뇌졸중 위험 최대류마티즘성 관절염 증상 최대 T림프구 수치 최소
12:00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 최대
PM 3:00 악력, 폐활량, 반사신경 수준 최대
PM 4:00 체온, 맥박수, 혈압 최대
PM 6:00 소변량 최대
PM 9:00 고통 민감도 최대
PM 11:00 알레르기 반응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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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본질을 파헤친다
01. [시간의 기원] 시간의 시작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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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시간의 역사] 옛날에는 시간약속을 어떻게 했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04. [시간의 측정] 왜 시계는 정확해져야 하나?
05. [시간과 생체] 우리몸은 어떻게 시간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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