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동작이 매우 느리고 쥐는 행동이 잽싸다. 이들이 바라보는 인간 사회, 예컨대 모든 게 분주하게 돌아가는 뉴욕 같은 대도시는 어떻게 다를까?
코끼리가 보기에 인간은 아침에 번개같이 일어나서 쏜살같이 출근해 바람같이 일하다가 총알같이 퇴근한다. 이번에는 쥐의 입장이 된다. 동작이 기민하고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쥐가 보기에 인간은 복창이 터질 만큼 느리다. 서류도 느릿느릿 넘기고 커피 잔도 마냥 쳐들고만 있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는 행동도 굼뜨기 짝이 없다.
쥐와 코끼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주관적이다. 자신의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상의 시간도 달라져 보인다.
그런 차이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인간끼리도 시간을 의식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은 각자 다양하다. 미래학자 토플러는 이런 말을 했다. 열다섯살짜리 아이가 마흔다섯살 먹은 아빠에게 자동차를 사달라고 조른다. 아빠는 아직 차를 운전할 연령이 되지 못했으니 3년만 더 기다리라고 한다. 아이는 크게 낙담하지만 아빠는 아이가 조급하다고 여긴다. 같은 3년이라도 아이에게는 살아온 삶의 1/5이나 되고 아빠에게는 1/15밖에 안되니 서로 시간 인식이 다른 게 당연하다.
같은 공동체에 사는 인간들도 세대에 따라 시간인식이 다르므로 다른 사회, 다른 문명권일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지구촌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전세계가 거의 동질적인 문명권을 이루고 있지만, 지구상에 여러 문명권이 별다른 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하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한 사회 내에서도 시간의 개념이 단일하지 않았다.
인위적 시간
‘초 관리’라는 말이 있듯 현대는 분과 초를 다투는 시대다. 주식 투자는 불과 몇분 뒤만 예측해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고, 경마는 몇초만 앞당겨 살아도 떼돈을 번다. 하지만 사회의 전 부문이 이렇게 동시성을 지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다. 지금은 약속을 정할 때 몇날, 몇시에 어디서 보자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1세기 전만 해도 약속은 날과 장소만 정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를테면 “보름날 당산나무 앞에서 보세”라든가 “다음번 장날에 국밥집으로 와”라고만 하면 됐다.
우리는 약속을 정할 때 반드시 날짜와 시간을 정한다. 날은 해가 뜨고 지는 명확한 기준이 있으므로 어느 시대, 어느 문명권에서든 간격이 동일하다. 그러나 자연적인 날에 비해 시간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단위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한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 때부터였고, 이 관습이 그리스와 로마에 전달돼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그것도 지배계층만 그랬을 뿐 그리스와 로마의 평민들은 하루를 서너부분으로 나눴다. 그 중 하나의 이름은 갈리칸투스, 즉 ‘수탉이 울 시간’이다. 이후의 역사에서 서양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다면 지금 세계는 여전히 지역에 따라 다른 시간 체계를 썼을지도 모르고, 우리 극동 문명권은 예전처럼 12간지를 따라 하루를 ‘12시간’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시간이 그렇다면 분과 초는 말할 것도 없다. 1시간은 반드시 60분일 필요가 없고, 1분은 반드시 60초일 필요가 없다. 역사에서 분의 개념이 처음으로 생긴 것은 어느 정도 정밀한 시계가 사용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의 일이다.
용어의 어원으로 추적해봐도 분과 초는 인위적인 개념임이 금세 드러난다. 분을 뜻하는 영어의 ‘minute’는 ‘작다’는 또다른 뜻이 있는 데서 알수 있듯이 라틴어의 ‘pars minuta prima’(아주 작은 것의 첫번째 분할)에서 나왔다. 첫번째가 있다면 두번째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초를 뜻하는 영어의 ‘second’ 역시 ‘둘째’라는 뜻으로 라틴어의 ‘partes minutae secundae’(아주 작은 것의 두번째 분할)가 원형이다. 그나마 분은 ‘작은 것’이라는 말을 취했으니 어느 정도 통하지만, 초는 ‘둘째’라는 말을 취한 것이니 시간과는 무관한 의미였다.
시간 분 초보다 더 인위적인 시간 구분은 주일이다. 지금 우리는 1주일을 7일로 나누는데 완전히 익숙하지만, 사실 주일이란 며칠에 해당하는 날을 편의에 따라 묶은 것에 불과하다.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는 10일 단위로 묶었는데, 지금처럼 7일은 로마시대부터다.
서구 역법을 도입하지 않았다면 필경 지금 우리는 5일장의 관습에 따라 5일을 1주일로 하는 제도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서아프리카에서는 1주일을 전통적인 4일장의 개념에서 나온 4일짜리와 외부에서 수입한 7일짜리를 혼용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으로 집권한 혁명정부는 1주일을 10일 단위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지금이야 달력은 거저 줘도 갖지 않을 만큼 흔한 것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루, 이틀, 며칠쯤은 누구라도 셈을 할 수 있었으나 달이 가고 해가 가는 것은 로빈슨 크루소의 경험에서 보듯이 어지간히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웠다. 물론 고대 농부들도 계절의 순환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넷(4계절)이나 둘(우기/건기)로 나누는 정도로는, 갈수록 복잡·정교해지는 사회 시스템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회의 관리자, 즉 위정자들에게는 특히 달력이 중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달력은 역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고대 국가의 성립과 직결된다. 달력이 없어도 고대인의 일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국가 행사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왕의 생일을 신하들이 모른다면 어떻게 왕이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 전쟁 날짜에 맞춰 각지의 군사를 동시에 모으려고 하는데, 날짜에 대한 공통적인 계산 체계가 없다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느 시점부터 고대 국가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가를 판별할 때 역사학자들은 흔히 지배계급(왕계), 군대, 세제 등의 존재를 기준으로 삼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달력의 유무다. 고대에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문학과 수학 등 상당한 과학지식이 필요했다. 역사라는 학문을 단순히 ‘인문학의 분야’로만 묶어둘 수 없는 이유, 과학에 뿌리를 둔 역사학자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달력의 참 의미
또한 지금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실상 달력은 문명의 독자성 또는 주체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달력을 고집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이슬람권에서는 여전히 태음력에 바탕한 이슬람력을 쓰며, 북한에서도 대내적으로는 주체력을 쓰고 있다. 이들이 서구문명의 침투에 대한 가장 강인한 저항 세력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일단 달력에서부터 입증되는 셈이다.
우리가 쓰는 서양 달력의 원형은 로마시대에 생겨났다. 하지만 초기의 로마는 동부 지중해의 선진 문명권에서 문명을 전수받는 처지였으므로 이집트의 태양력과 그리스의 태음력을 되는대로 받아들여 혼란스러운 점이 많았다. 알다시피 태양력은 천체의 운행과 대체로 맞고 계절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반면 태음력은 시각적인 기준(달의 위상 변화)이 있어 날짜를 파악하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두체계는 질적으로 달라서 함께 혼용할 수는 없으므로 제대로 된 달력을 위해서는 어차피 하나로 단일화해야만 했다.
작은 부족 국가라면 행정의 회기가 짧아도 상관없으므로 태음력이 더 낫지만, 제법 규모가 큰 고대 국가라면 연 단위로 모든 게 돌아가야 행정이 가능하다. 로마도 국가로서의 위상이 어느 정도 선 뒤에야 비로소 달력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집트의 태양력은 큰 문제가 있었다. 1년 12개월, 1개월 30일로 정하고 남은 5일은 매년 연말에 갖다붙이는 방식이었는데, 수십년 동안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지구의 정확한 자전 주기는 정확한 3백65일이 아니라 ‘약 3백65일’이기에 한 왕조가 수백년 이상 존속할 경우에는 오차가 상당히 커진다. 이미 이집트 시대에 이런 문제를 느끼고 윤년의 개념을 도입했으나 이걸 완전히 제도화시킨 것은 로마의 카이사르다. 그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은 1년 12개월, 1개월은 30일 또는 31일, 단 2월은 28일, 그리고 4년마다 하루씩 29일로 정해서 오늘날과 같은 달력의 원형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는 달력을 개정한 것만이 아니라 ‘개악’하기도 했다. 어원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눈치를 챌 수 있겠지만, 9월부터 12월까지의 이름은 어딘가 이상하다.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의 어근인 septem, octo, novem, decem은 원래 라틴어에서 7, 8, 9, 1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 그런데 왜 이것들이 뒤로 밀려나 9-12월의 명칭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카이사르와 그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각각 7, 8월의 이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이름인 Julius에서 July가 나왔고,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을 수립하고 얻은 명칭인 Augustus가 8월의 이름이 됐다.
어쨌거나 카이사르는 그때까지의 오차로 인해 누적된 90일을 개정 첫해인 기원전 46년에 모두 끼워넣어 그 해는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한 해의 날수가 무려 4백45일이나 됐다. 이제부터는 날짜에 오차가 없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는 그 해를 ‘혼돈의 마지막 해’라고 불렀는데, 과연 그랬을까?
한해가 정확히 3백65.25일, 즉 3백65일과 6시간이라면 그랬으리라. 하지만 실은 그보다 조금 작은 3백65일과 5시간 48분 46초이기에 문제가 된다. 이것 역시 수십년만에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적어도 카이사르가 죽을 때까지는, 아니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도 율리우스력은 매끄럽게 기능했다. 그러나 비록 조금이지만 이 오차는 해가 거듭되면서 커졌고 마침내 중세에 이르러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회의다.
부활절이 낳은 달력
종교 권력이 세속 권력을 능가했던 중세에는 종교회의, 즉 공의회가 단순히 교리상의 절차만 개정하는 게 아니라 세속 군주들의 영토와 권한 같은 정치적 문제, 법과 행정에 관련된 문제도 다뤘다. 그러니 당연히 달력도 논의 사항이 된다. 더구나 달력은 종교적으로 큰 중요성이 있었다. 한가지 예가 부활절의 날짜다.
부활절의 공식 정의는 춘분 다음에 오는 보름 뒤의 첫번째 일요일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지만, 춘분은 태양력의 개념이고 보름은 태음력의 개념이며 일요일은 인위적인 개념이기에 애초부터 정확한 해결책이 나올 수 없는 문제다. 성탄절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의 날짜가 고정돼 있지 않다면 신을 뵐 면목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부활절을 다르게 쇠고 있었다. 이런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달력을 통일하고자 한 결과가 바로 16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그레고리력이다.
그때까지 누적된 날짜의 오차는 14일이나 됐으므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우선 그 오차를 적절히 배분해 수용하고, 차후 다시 오차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4년마다 윤년을 넣되 1백년마다 한번씩 윤년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고도 발생하는 약간의 오차는 4백년마다 한번씩 윤년을 넣어 바로잡기로 했다. 예컨대 1700년, 1800년, 1900년, 2100년은 윤년이 없지만 1600년, 2000년은 윤년이 있다.
물론 자연적 주기가 인간이 관리하기 편한 수치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으므로 그 오차는 다시 누적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의 진동을 이용한 초정밀시계가 있으므로 예전처럼 야단법석을 떨 일은 없다. 오차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그때그때마다 바로잡아주면 되니까.
프랑스 혁명정부가 채택한 혁명력은 이집트 고대력처럼 한달을 무조건 30일씩으로 하고 남는 5일은 연말에 붙였으며(윤년일 경우에는 6일), 달의 명칭도 모조리 바꿨다. 그래서 이 달력을 사용한 1792-1806년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정확한 날짜까지 따지려면 무척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다. 1895년 조선의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그 해의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고치면서 우리나라에 양력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다. 태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꾼 것까지는 좋은데, 그로 인해 우리 역사에는 1895년 11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됐다. 따라서 만약 1895년 12월 3일에 개 한마리라도 죽었다면 그건 거짓말이 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달력이 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1월 1일’ 새해의 기준은 언제 생겨났을까?
한해가 주기적으로돌아온다는 것은 자연적인 시간이므로 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해의 시작을 언제로 잡을 것인지는 인위적인 시간이므로 시대마다, 또 문명권마다 제각기 다르다. 새해를 기념한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인데, 태양력과 태음력이 뒤섞인 방식으로 새해 첫날을 정했다. 즉 바빌로니아에서는 춘분에 가장 가까운 그믐날, 아시리아에서는 추분에 가장 가까운 그믐날이 ‘1월 1일’이었다.
이후에도 새해의 시작은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에서는 추분, 그리스에서는 동짓날 하는 식으로 다양했다. 현대의 달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로마력에서는 초기에 3월 1일을 기점으로 정했다가 율리우스력에서 비로소 지금과 같은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정했다.
물론 켈트족처럼 독특한 사회에서는 새해의 시작도 독특했다. 켈트족은 하루의 시작도 아침이 아니라 해질녘이라고 정했기 때문에 한 해도 식물들이 죽어가는 11월에 시작되는 것으로 잡았다. 죽음이 존재의 시작인 셈이다.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로 접어들어 유럽 세계가 분화되면서 다시 각 지역에 따라 새해 첫날은 다양해졌다. 예컨대 바이킹의 정복 이전까지 영국의 새해 첫날은 12월 25일이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3월 25일이 가장 많았다.이렇게 서로 달랐던‘설날’이 1월 1일로 통일되기 시작하는 것은 16세기에 그레고리우스력을 채택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동시에 관습이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한 나라씩 차례로 바뀌다가 1918년에 러시아가 마지막으로 1월 1일을 새해의 출발점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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