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 기사에는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구성돼있습니다. ‘래빗홀 컴퍼니’는 허구의 단체이며 기사 본문내용중 픽션인 부분은 기울여 적었습니다.
래빗홀 컴퍼니의 양자전송 순간이동 서비스를 신청해주신 고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123년 개정된 산업안전법에 의거하여 양자전송 순간이동 사업자는 이용자를 전송하기 전에 양자전송의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본 안내서를 꼼꼼히 읽고 아래 양자전송 순간이동 동의란에 서명해주십시오. 여러분을 목적지까지 빠르게 전송해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수 안내 사항
1. 래빗홀 컴퍼니는 자사의 우월한 기술력을 통해 전세계와 빛의 속도로 소통할 수 있는 통신기술과 단 1초만에 전송받은 정보를 분석하고, 인체를 재구성할 기술을 모두 갖췄습니다. 이에 따라 순간이동 소요시간은 ‘0초(양자전송 시간)+n초(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양자얽힘 측정결과 정보 전달시간)+1초(정보 분석 및 인체 재구성 시간)’입니다.
2. 순간이동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명재산상의 손해에 대해 당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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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니 편안하게 앉아 즐겨주길 바란다. 나는 이제부터 자연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설명할 것이고, 여러분은 자연이 얼마나 흥미롭고 신나는 대상인지 느끼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저게 말이 되는지 고민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까지 그 답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입니다.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을 정립하고 양자 컴퓨터의 등장을 예견하는 등 양자역학의 한 획을 그었죠. 노벨 물리학상도 받았고요. 그런 그가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양자전송이 낯선 당신을 위한 안내서’를 읽기에 앞서 되새겨봅시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받아들이세요.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양자역학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유용한 녀석입니다.
양자전송으로 여러분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습니다(할 수는 있어요). 그 과정을 설명하자면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야기는 더 나눌 수 없는 물리량의 최소단위, 양자에서 시작합니다. 빛(전자기파)을 예로 들어볼까요. 빛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면 결국 ‘광자’란 기본입자가 됩니다. 광자는 양자의 일종이죠.
우리가 연속적이라고 생각하는 빛에너지는 결국 광자가 한 개 두 개 모여 만들어진 겁니다. 이렇게 물리량이 연속적이지 않고 단위량으로 쪼개진다는 게 양자의 핵심 개념입니다. 양자역학은 그런 양자로 이뤄진 아주 작은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이상한 양자 나라의 동전 던지기
이제부터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아주 작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상식과 조금 다르거든요. 양자전송에 대해 알아보려면 양자의 특성 네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불확정성, 중첩성, 비가역성, 그리고 얽힘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동전을 던진다고 생각해봅시다. 동전을 던지는 행동을 하기 전에는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앞면이 나올 확률은 50%, 뒷면이 나올 확률이 50%라고 예측할 수는 있죠. 이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입니다. 관측 이전에는 양자가 어떤 상태를 보일지 알 수 없어요. (동전을 던지는 예시에서 ‘관측’은 던진 동전이 바닥에 닿아 앞면 혹은 뒷면이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동전을 던지면 동전이 모서리로 서서 뱅글뱅글 돌아가다가 이내 바닥에 닿아 멈추곤 합니다. 이렇게 뱅글뱅글 돌아가는 상태는 양자가 중첩된 상황과 비슷합니다. 동전이 확실히 멈추기 전까진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알 수 없죠. 말하자면 앞면이면서도 뒷면인 상황입니다. 양자도 마찬가지로 관측 이전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띱니다.
그런데 관측을 하고 난 다음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동전 던지기를 해서 한번 동전의 앞면 또는 뒷면이 나오면 그 결과는 바뀌지 않죠.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상태던 입자를 한번 관측하면, 양자가 중첩돼있던 그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관측했을 뿐인데 입자의 상태를 결정지어버렸다니, 의아하죠? 받아들이세요.
이제 동전 던지기 예시로도 설명하기 애매해지는 부분입니다. 동전 A와 B를 던진다고 합시다. 이 동전 두 개는 사실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 연결돼있습니다. ‘얽힌 상태’라고 부르죠. 동전 A가 뒷면일 때 동전 B는 반드시 앞면이 나오도록 정해져 있는 겁니다. 동전 A가 앞면이라면 동전 B는 반드시 뒷면입니다. 동전 A와 B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두 동전이 얽혀있기만 하면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동전 A를 지구에서 던지고, 동전 B를 화성에서 던지더라도요. 네, 거리와 공간에 상관없이요. 어디서 많이 본 조건 아닌가요. 바로
앨리스와 밥 사이에 열린 순간이동 포털
네, 순간이동입니다. 서로 얽혀있는 두 양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얽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양자전송이 등장합니다. 한국에 사는 앨리스가 스위스에 사는 밥에게 양자전송을 한다고 합시다. 우선 앨리스와 밥은 양자얽힘 상태에 있는 두 입자 A와 B를 나눠 가져야 합니다. 두 입자의 얽힘 상태는 동전으로 생각했을 때 A가 앞면일 때 B가 앞면, A가 뒷면일 때 B가 뒷면인 상태라고 합시다. A와 B의 얽힘 상태만 아는 겁니다. 어떤 면이 나올지는 모릅니다.
그다음 앨리스는 양자 정보를 보내고자 하는 새로운 입자 C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입자 A가 입자 C와 얽히도록 한 다음 A와 C의 양자얽힘 상태를 관측합니다. 동전 A와 C를 던져 앞면이 나오는지 뒷면이 나오는지 보는 겁니다. 동전 A와 C가 얽혀있으니 C의 관측결과와 A의 관측결과 사이에 상관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그 상관관계가 앞면-뒷면, 뒷면-앞면인지 혹은 앞면-앞면, 뒷면-뒷면인지는 봐야 알게 되죠.
앨리스와 밥의 목표는 B가 C와 같은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B는 A와 얽혀있었습니다. 측정했더니 A와 C가 앞면-앞면이 나왔다고 합시다. C의 정보와 A의 정보 값이 같았네요. 이제 A와 B의 얽힘 관계를 따져보면(앞-앞 또는 뒤-뒤), 당연히 B도 같은 정보 값을 가지고 있겠다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앨리스는 밥에게 전화를 겁니다. B를 그대로 둬야 C의 상태와 B의 상태가 같아진다고요. A와 C가 뒷면-앞면이 나온 경우도 살펴볼까요. 이 경우 C의 정보와 A의 정보 값이 반대니 B의 상태도 반대로 바꿔야 합니다. 앨리스는 또 밥에게 전화를 걸어 B를 뒤집으라고 이야기하겠죠.
김용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정보연구단 책임연구원은 “양자전송으로 전달하는 것은 입자 자체가 아니라, 입자가 가지고 있는 양자상태 또는 양자정보”라고 강조했습니다. 양자전송은 C의 상태를 B에 전달하는 방법이니까요.
A와 C의 얽힘 상태를 관측함과 동시에 B의 형태가 결정되므로 B의 양자상태가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이 이론적으로 ‘0초’인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변화를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시간적 한계가 생깁니다. 김 책임연구원은 “물론 모든 물체는 원자핵, 중성자, 전자 등과 같은 기본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기본 입자는 우주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며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기본입자의 양자상태를 전송할 수 있다면 원리적으로 물체를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짚었습니다. 이어 “하지만 현재 실험실에서 구현하는 양자전송은 하나의 입자가 가진 2차원 양자상태를 전송하는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대규모 양자전송을 구현하더라도 물체를 찰나에 전달하는 순간이동과는 다릅니다. 왜냐면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A와 C 입자의) 양자얽힘 측정결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통신은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이죠. 양자전송으로 양자상태를 전달받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를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저희 래빗홀 컴퍼니가 해냈다면 어떨까요. 저희 래빗홀 컴퍼니는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기본입자의 양자상태를 전송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김 책임연구원의 말처럼 빛의 속도의 한계는 있지만요. 그리고 양자얽힘 측정결과 정보를 토대로 물체를 재구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1초까지 획기적으로 단축했습니다. 순간이동 포털을 현실로 불러온 겁니다.
주의: 양자역학적 순간이동자가 감수해야 할 것
래빗홀 컴퍼니의 기술이 완벽한 건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의 장원준 기술연구원은 “양자역학의 대전제가 있다”며 “양자의 길이를 재려고 하면 길이 말고 다른 정보는 모르게 돼버린다”고 했습니다. 장 기술연구원은 이어 “마치 컵에 액체가 들어있는 상태와 같다”고 했습니다.
컵에 액체가 들어있는 양을 양자상태라고 하죠. 우리는 양자전송을 통해 이 컵에 액체가 얼마나 들어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컵이 머그컵인지, 와인잔인지. 액체가 물인지, 커피인지에 대한 정보를 보낼 순 없죠. 무슨 말이냐면, 저희 래빗홀 컴퍼니의 기술력으로도 원자 하나의 정보를 모조리 온전히 보내는 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분명 놓치는 정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여러분, 그래도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김태현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입자의 양자상태를 하나하나 전송하는 식의 양자전송은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며 저희 래빗홀 컴퍼니에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원칙적으로 양자상태로 표현한 정보는 전송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하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정신 상태를 양자상태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음... 그건 저희 래빗홀 컴퍼니도 모르겠네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객 여러분께 넘기겠습니다. 믿고 순간이동을 해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