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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상공간에 신인류·신문화 위한 새 지구 건설

올 1년 내내 지구촌을 뜨겁게 할 최대의 이벤트, 인터넷 엑스포. 누구나 앉은 자리에서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전세계 풍물을 무료로 만낄할 수 있다.

삼풍백화점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던 작년 6월말, 하와이 와이키키해변에는 세계 각국의 네티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매년 한번씩 인터넷의 당면 문제를 놓고 최고의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인터넷 소사이어티 연차 총회(과학동아 95년 8월호 참조)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행사 기간 동안 2천여명의 참석자들은 검은 가방을 둘러메고 바삐 돌아다니는 30대 중반의 유태계 미국인과 자주 맞닥뜨려야 했다. 칼 말라무드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인터넷에서 세계 최초의 가상 박람회를 열자" 는 '엉뚱한' 주장을 펴고 다녔다. 그러나 당시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넉달 뒤 서울에서 만난 그는 기라성같은 인터넷 대부들에 둘러싸여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말라무드가 내민 명함에는 '인터넷 엑스포 사무국장'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터넷 금융거래의 개척자 다니엘 린치는 "말라무드가 96년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될 것" 이라고 추켜세웠다.

말라무드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엘고어 부통령이 쓴 격려문을 공개했다. "인터넷 엑스포는 금세기 인류의 마지막 도전" 이라고 정의한 클린턴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를 맞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 '국가 정보인프라'(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NII)의 첫 걸음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엑스포가 지향하는 목표는 '또하나의 지구 사이버 플래닛(Cyber Planet)의 창조'. 다시 말해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 새로운 지구, 신인류, 신문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말라무드는 "올해 처음 열리는 인터넷 엑스포는 앞으로 10년쯤 후에나 가능한 초고속 정보통신사회의 한 단면을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이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인터넷 엑스포 관람객들이 지나갈 센트럴 파크 정문


디지털 실크로드 타고 전세계가 하나로

내 책상 위의 PC가 인터넷에 연결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만국의 풍물이 전시돼 있는 가상 박람회를 구경할 수 있다. 뉴욕 맨해튼 뒷골목의 재즈 카페에서 인도의 고생창연한 사원까지, 태국의 야시장부터 카자흐스탄의 말고기 요리에 이르는 진귀한 볼거리가 무진장으로 펼쳐진다. 각국의 음악애호가들이 직접 작곡한 음악을 듣고 지구 반대편의 소년과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부터 1993년 대전 엑스포까지 국제박람회는 '산업자본주의의 꽃' 이었다. 이제 96년을 고비로 국제박람회는 정보통신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인터넷 엑스포는 근 1백50년에 걸친 국제박람회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역대 엑스포의 발자취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장식돼 있다. 전기 전화 TV 컴퓨터 등 당대 최고의 신기술이 엑스포에서 첫선을 보였고, 전세계 인류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인터넷 엑스포는 이러한 전통 위에서 지구정보화의 복된 짐을 떠맡게 된 것이다.

인터넷 엑스포는 5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전세계 네티즌들에게 완전히 개방돼 있다. 정해진 장소에 시간 맞춰 가야 하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극복했다. 아무 때나 'http://park.org/fair'라는 주소만 입력하면 엑스포가 열리는 센트럴파크 정문 앞에 곧바로 도착한다. 입장료도 없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돈 한푼 안내고 내 좌판을 센트럴 파크 한쪽에 펼쳐놓을 수 있다. 그동안 대기업과 호사가들이 주도해왔던 국제박람회가 전세계 인터넷 대중들에게 활짝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가상 산업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인터넷 엑스포의 최대 관건은 '디지털 실크로드', 즉 인터넷 철도의 건설이다. 세인들이 최초의 엑스포를 1851년 런던박람회로 기억하는 이유는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는 기념 건축물 때문이다. 1936년에 불타 없어졌지만 수정궁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기술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념물로서 1889년 파리박람회 때 세워진 에펠탑과 함께 엑스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인터넷 엑스포의 상징물은 초당 45MB의 멀티미디어를 실어나르는 초고속 인터넷 철도. 일반 전화선에 비해 2천배가 넘는 전송능력이다. 5천만명의 방문객들이 연중 아무 때나 어느 곳에서든 엑스포에 접속할 수 있게 하려면 이 정도의 기간시설이 있어야 한다. 이 철도를 통해 비디오 오디오를 포함한 대용량의 데이터가 전세계로 뿌려지게 된다. 웬만한 크기의 비디오파일쯤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국내 정보 엑스포'96망 /기존국내인터넷망


인터넷 종주국 미국 추격하는 아시아

인터넷 철도는 인터넷의 주도권이라는 정치적 관점에서도 은밀한 의미를 띠고 있다. 지금까지 인터넷의 맹주는 미국이었다. 인터넷의 모태였던 아파넷(ARPANET)이 미국정부의 주도에 의해 건설됐으며 월등한 정보통신기술과 막강한 자본은 인터넷 종주국으로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인터넷 엑스포에서도 미국이 갖는 위치는 요지부동이다. 그러나 이에 맞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일본세력이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의 장거리 전화회사 MCI가 아시아시장 진출을 겨냥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속망을 구축하려하자 일본 KDD는 태평양 중간지점에서 MCI라인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은 이와 함께 우리나라와 연결되는 고속망을 대한해협까지 깔아놓을 테니 이를 받아줄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 마치 19세기말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 열강들이 앞다투어 철도부터 깔려고 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다.

이같은 열강들의 구도에 맞서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유럽과 직접 연결되는 고속망을 깔고 동남아시아 각국이 접속할 수 있는 허브를 구축하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인식부족과 재정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일본이 내민 손을 잡고 7월경쯤 고속망을 개통하는 정도에서 그칠 전망이다.

여하튼 이렇게 건설되는 인터넷철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일본 네덜란드 대만 등 7개국의 센트럴 파크를 주요 플랫폼으로 경유한다. 센트럴 파크는 인터넷 엑스포의 주제전시관이 들어있는 고성능 컴퓨터다. 보통 센트럴 파크 한 곳이 보유하게 될 데이터용량은 2백50GB 이상(우리나라 센트럴파크의 주소는 한국전산원이 개설한 http://seoul.park.org). 전세계 7개국에 세워질 8개의 센트럴 파크는 참관객들이 쉽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도록 서로의 내용을 주기적으로 상호 복제하게 돼 있다. 즉 한국의 센트럴 파크에 들어가도 전세계 센트럴 파크에 게재된 내용들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2월 초순 현재 인터넷 엑스포에 참가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나라는 31개국이며 올 중반까지 약 60개국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 행사에는 IBM 선마이크로시스템스 MCI 등 정보통신업계의 수많은 대기업들이 공식후원자로 나섰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일본 대기업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 후지쓰 마쓰시타 NTT NEC 등 21개 업체가 적극 후원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선 한국통신 데이콤 삼보컴퓨터 정도만이 후원업체로 등록돼 있을 뿐이다.

오는 10월은 '한국의 달'

2월8일 개막기념행사인 '사이버스페이스 24시' 를 앞두고 각국은 속속 인터넷에 전시관을 개설했다. 또한 대부분의 참가국들은 상반기에 주제관과 공동전시관 공공관 등을 마무리짓고 기념행사를 펼칠 계획이다. 이미 2월15일에는 컴퓨터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인터넷 타운홀에서 열려 컴퓨터 발달사와 미래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었다.

이밖에 현재 추진되고 있는 주요행사를 보면 올 10월에는 미국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생중계해 각당 후보들의 열띤 공방을 전세계로 소개하는 행사가 열린다. '디베이트 워치 96' 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이 행사는 인터넷이 새로운 풀뿌리 정치문화를 확산시키는데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7월23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리는 '브레인 오페라' 도 주목할만한 이벤트. 예술가 과학자 음악가 심리학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추진하는 이 행사는 수많은 의식의 조각들이 결합돼 창조적 사고와 인성을 만들어낸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오페라의 형식을 빌어 정보기술과 인간성, 의사소통에 관한 실험을 하는 것이다.

'브레인 오페라' 에는 음악은 물론 음향 문자 이미지 게임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가 동원된다. 특히 그동안 첼리스트 요요마나 팝가수 프린스 등에 의해 실험됐던 새로운 음악유형 '하이퍼 인스트루먼트' 가 온라인으로 시연되기도 한다.

11월에 열리는 '인터오페라' 는 이보다는 훨씬 대중적인 이벤트. 미국 MIT대학 미디어연구소에서 전송한 배경음악이 인터넷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일본 웨스틴호텔 가든룸에서 열리는 오페라무대로 전달되면 이 음악에 맞춰 일본 오페라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환상적인 이벤트다.

우리나라는 6월1일 한국정보엑스포 개막식을 갖고 한국의 공식참가를 전세계에 알리게 된다. 이어 한국의 달인 10월에는 한글창제, 민속풍물 등을 소개하는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다.

인터넷 엑스포에 만들어놓은 전시관을 들어가보면 아직 완벽한 꾸밈새를 갖추진 못했지만 엑스포의 전체 구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코너들이 즐비하다. 우선 '글로벌 스쿨하우스'라는 코너에 가보면 '국제학교전시회'(International School Cyber Fair)라는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텍사스 알렌시의 커티스중학교에서 처음 아이디어를 낸 이 프로젝트는 전세계에 걸쳐 참가학교를 모아 환경 동물보호 등 지역사회의 현안을 공동연구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웹에 올려놓는 것이다.

'음식과 시장' 코너에는 타이의 오타코 야시장, 일본의 츄키지 어시장 등 각나라의 대표적 풍물들이 소개되고 '미미의 사이버식당' 에는 전세계 모든 음식과 양념에 관한 자료가 집결돼 있다. 예를 들어 음식중에 치즈를 선택해보면 수많은 종류의 치즈 이름과 제조법 등 잘 정돈된 자료가 펼쳐진다.

이들 각 페이지를 훌어보면 대체로 미국과 일본의 전시관들이 디자인이나 내용면에서 충실한 편이라는 느낌이다. 인터넷 엑스포를 공식 후원하고 있는 일본 소니사의 경우 애니메이션기법을 사용해 문이 열리고 전시관이 등장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놓아 이채를 띠고 있다.

인터넷 엑스포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행사가 '네티즌만의 축제' 로 끝나선 안된다는 점이다. 물론 인터넷 사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인류 대다수는 인터넷 가상공간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도시와 농촌, 지식층과 일반대중 등 다양한 갈등구조가 가상공간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인터넷 엑스포가 '또하나의 지구' 를 만드는 대역사의 첫걸음이라 한다면 신기술과 볼거리도 중요하지만 차별과 갈등 없는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수립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답을 준비하는 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난 2월 8일 개막기념행사로 열린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하루'행사
 

199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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