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간 한국 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어요. 생존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여전히 기초과학 분야에는 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암흑물질의 정답은 액시온(Axion)이 아닐 수도 있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보장된 성공을 이루려 하는 게 아닙니다. 꾸준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혁신이란 이름의 유산을 이곳에서 만들어 갈 겁니다.”
환갑이 넘어 수염이 하얗게 물든 물리학자를 보며 ‘아이처럼 맑게 웃는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3월 7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지캠퍼스의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야니스 세메르치디스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장을 만났다.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은 액시온을 단독으로 연구하는 세계최초의 연구센터다. 액시온은 최근 10년 새 암흑물질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물질이다. ‘강한 상호작용의 CP문제’라는 입자물리학의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입자인데, 주변 물질과 쉽게 상호작용하지 않아 암흑물질의 후보가 되기에도 적합하다. 이 때문에 액시온은 입자물리학의 두 난제를 동시에 해결할 열쇠로 꼽힌다.
액시온이라는 단 하나의 채널을 찾는 라디오
‘존재하지 않는 물질도 볼 수 있는 눈’을 보러 우선 1층 실험실로 향했다. 실험실 문 앞 빨간 경보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 실험 중이란 뜻입니다. 혹시 심박조율기 이식하신 분 계신가요?”
정우현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 연구위원의 질문에 기자와 동행한 사진작가가 멈칫했다. 심박조율기는 없었지만, 위험한 장소라는 표시가 곳곳에 있어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1층 실험실이 위험한 이유는 이곳이 아주 강한 자기장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액시온을 찾는 대표적인 방법은 공진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공진기를 ‘고급 라디오’에 비유해 설명했다.
“액시온은 굉장히 강한 자기장 안에 들어 있을 때 광자 두 개로 쪼개집니다. 공진기는 이렇게 쪼개진 광자에 다양한 주파수의 전자기파를 가합니다. 만약 광자의 진동수와 우리가 가해 준 전자기파가 맞아떨어진다면 공진현상을 보이면서 신호가 나타나죠.”
광자의 진동수를 미리 알고 있다면, 라디오 채널을 맞추듯 바로 주파수를 맞추면 된다. 하지만 광자의 진동수는 액시온의 질량에 따라 결정되며, 우리는 액시온의 질량을 모른다. 따라서 광자의 진동수와 맞아떨어질 때까지 주파수를 바꿔가며 찾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이를 “수많은 라디오 전파 중에서 액시온이란 단 하나의 채널을 찾는 과정과 같다”고 했다.
신호의 잡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온도를 절대온도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인 10~50mK(영하 273.14~273.1℃)까지 낮춰야 한다. 그러고 보니 실험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들리던 윙윙거리는 소리가 생각났다. 마치 거대한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신윤창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 연구위원은 이 소리의 정체를 “낮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진기 내부에서 헬륨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세메르치디스 단장은 이 중 메인 실험인 CAPP-12TP실험을 두고 “우리 연구단의 기함(旗艦) 역할을 하는 연구”라고 했다. 아래로 지하 6m까지 파고 콘크리트 20t(톤)을 부은 뒤 그 위에 설치한 실험장비의 위용이 과연 기함이란 별칭에 걸맞았다.
정 연구위원이 이끄는 연구팀은 초전도 공진기를 개발해 전 세계 액시온 공진기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액시온을 찾는 데 초전도 공진기를 활용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다. 연구팀은 2020년 초전도 공진기를 개발한 뒤 지난해 액시온 탐색 실험을 진행했는데, 기존에 사용하던 구리공진기보다 5~7배 높은 신호 증폭률을 보였다.
정 연구위원은 “최근 개발한 초전도 공진기는 구리공진기의 30배 이상 높은 신호 증폭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곧 고자기장 환경 속에서 실증실험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론적으로 초전도 공진기의 증폭률은 구리공진기의 100배 이상까지 나올 수 있다”며 “초전도체 내부를 고온 초전도체로 코팅해야 하는데, 이 코팅 기술이 좋아진다면 이보다 높은 증폭률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이곳 실험실에는 공진기의 온도를 낮출 냉동기가 7대, 자기장을 발생할 자석이 6대 있습니다. 이런 규모를 갖춘 실험실은 전 세계에 없습니다. 미국 예일대의 헤이스택(HAYSTAC)도, 미국 워싱턴대의 ADMX도 공진기 한 대가 전부죠. 공진기의 수가 많다는 건 주파수를 분배해 액시온을 찾거나, 한 주파수를 여러 대의 공진기를 통해 검증하는 등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향후 5년간은 저희가 전 세계 액시온 연구를 선도해 나갈 겁니다.”
노움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액시온의 옷자락 잡을까
노움은 유럽 전설에 등장하는 난쟁이의 일종으로 땅속 광물이나 보석을 지킨다. 땅속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고 전해진다. 아리아드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공주로, 영웅 테세우스에게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는 미궁을 헤쳐나갈 실마리를 제공한다. 노움과 아리아드네, 신화 속 존재를 만나러 지하 1층 실험실로 향했다. 공진기가 있던 실험실과는 달리 고요함이 가득했다. 물론 정말 난쟁이와 공주를 만나러 간 건 아니다. 지하실험실의 고요 속에 숨 쉬고 있던 건 노움(GNOME)과 아리아드네(ARIADNE)란 이름의 연구 장비였다.
연구자들은 액시온이 매우 작은 입자 여럿이 마치 구름처럼 뭉쳐 다닐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때 액시온 구름을 ‘구역벽(domain wall)’이라고 부른다. 신 연구위원은 “우주엔 이런 구역벽이 널리 분포해 있다”며 “노움 프로젝트는 만약 지구가 우주 공간을 이동하다 구역벽을 스쳐 지나간다면 어떨지 상상한 결과 탄생했다”고 했다. 액시온은 주변 물질과 쉽게 상호작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호작용하지 않는 건 아니다. 노움 프로젝트에서는 액시온이 주변 물질과 주고받는 약한 상호작용을 이용해 액시온 구역벽이 스쳐 지나가는 걸 탐지한다.
“팽이를 여러 개 나란히 돌려놓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다 팽이의 회전이 갑자기 흐트러지는 현상을 기록하는 거죠. 이런 실험을 한 곳에서만 진행하면 지나가는 액시온 구역벽과 상호작용해서 회전이 흐트러지는 건지, 또는 그냥 바람이 불거나 땅이 진동해서 그런 건지 모를 겁니다. 이를 위해 전 세계 6개국 13개 도시에 팽이를 설치합니다. 만약 액시온 구역벽이 정말로 지구를 스쳐 지나간 거라면, 스쳐 지나간 순서대로 각 도시의 팽이가 흐트러지겠죠. 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종의 전 지구적 파도타기인 셈이다. 여기서 팽이 역할을 하는 건 레이저를 이용해 한 방향으로 회전하도록 정렬시킨 비활성기체 원자다. 전 세계 13개 도시의 노움 신호는 GPS 박스가 각각 처리해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센터로 보낸다. 이 데이터를 비교해가며 액시온 구역벽이 지나갔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2017년부터 실험이 시작돼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한편 액시온을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중간자로 보기도 한다. 이때 액시온이 매개하는 상호작용은 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으로 정의되는 네 가지 기본 힘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힘이다. 이 가정이 맞다면,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입자는 액시온이 매개한 제5의 힘에 의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한다.
이 현상을 관측하려는 게 바로 아리아드네다. 아리아드네는 현재 미국 스탠포드대, 인디아나대 등과 한국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 표준과학연구원(KRISS) 등의 참여로 이뤄지고 있는 국제공동연구프로젝트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각 기관이 아리아드네의 각 부품을 나눠 개발하고 있다. 신 연구위원은 “현재 프로토타입 제작까지 2~3년 남은 것으로 보고 있다”며 “만약 성공한다면 액시온이란 입자가 존재하는지 확정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실험”이라고 했다.
정 연구위원은 “초전도 공진기, 노움, 아리아드네는 액시온을 찾는다는 목적은 같지만 그 방법이 다르다”며 “아리아드네나 노움 실험을 통해 액시온의 존재와 그 질량을 찾고, 공진기 실험으로 검증해 보는 방식을 통해서 보다 믿음직한 실험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굉장히 긴 골목길이 있어요. 이 끝에 집,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이 추구하는 진리가 있죠. 물리학자들은 너무 어두워서 길이 보이지 않으니 이 골목길을 따라 전구를 하나씩 달아가며 길을 찾는 일을 합니다. 전구를 단 뒤에 그 길을 지났다고 해서 그 전구가 아무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액시온이 암흑물질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 연구가 아무 의미 없어지는 건 아니죠. 액시온이 없다는 걸 증명한 그 데이터 또한 우리 인류에게 중요한 자산이 될 겁니다.”
신 연구위원은 이어 “그럼에도 저는 누군가 액시온을 찾는다면 바로 이곳에서일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곳이야말로 액시온 연구의 최전선이니까요”라고 말했다. 순간 정말로,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 언젠가 액시온을 찾았다는 연구자의 함성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생기면 꼭 불러 달라고 당부하며 실험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