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금고에 돈이 없다. 대신 기생충이 잔뜩 들어 있거나, 형형색색의 버섯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국가자원으로 관리하고 보급할 필요가 있는 특수 소재들. 거금을 주고도 못 살 소재들이니 돈보다 귀한 셈이다.
지난 1995년 한국과학재단은 국가지정연구소재은행이라는 과학계의 은행을 만들어 이 소재들을 관리하고 있다.
현재 2개의 거점은행과 30개의 소재은행이 국내에 운영되고 있다. 이들 ‘과학은행’ 중 흥미로운 네 곳을 소개한다.
야생버섯 균주은행_야생버섯 균주은행_2009년 버섯 전쟁’ 막아라
은행장:이태수(인천대 생물학과 교수)
보유품목:국내 야생버섯 430종
은행고객:분자생물학자, 약리학자, 원예학자 등
홈페이지:www.wildmush.or.kr
“2009년 ‘버섯 전쟁’이 시작된다.”
인천대 생물학과 이태수 교수는 무시무시한 ‘예언’을 했다. 2009년이 되면 지금보다 몇 배나 비싼 값을 줘야 팽이버섯을 겨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이 2009년부터 한국산 버섯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동맹이 발효되면 한국도 품종보호 의무를 져야 한다. 즉 다른 나라가 신품종으로 등록한 식물에 대해서는 로열티를 지불하고 사와야 한다.
팽이버섯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본이 신품종으로 등록한 식용버섯이기 때문이다. 팽이버섯은 자연 상태에서 진한 갈색이다. 대가 단단해 요리해서 먹으려면 대를 떼어내고 갓만 먹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1985년 일본 쓰쿠바대 키타모토 교수는 이를 지금 우리가 먹는 하얀 팽이버섯으로 개량했다.
이 교수는 “유전자 검사만 하면 한국산 팽이버섯이 일본산이라는 사실은 바로 드러난다”며 “한국 고유 품종의 버섯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교수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내 토종 버섯을 수집하고 있다. 국내 야생버섯 1만5000여종 중 현재 은행에 보관된 수는 430종. 새로운 종을 찾는 방법은 산을 헤매는 수밖에 없어 발품을 파는 것이 최고다.
이 교수는 “앞으로는 한국산으로 등록되지 않은 품종은 다른 나라가 가져가도 할 말이 없게 된다”며 “‘종자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생생물 자원은행_기생충 먹고 세계에서 인정받다
은행장:엄기선(충북대 의대 교수) 보유품목:기생충 7만5000점
은행고객:기생충학자, 의학자 등 홈페이지:www.parasite-bank.or.kr
꿀꺽. 충북대 의대 엄기선 교수는 마치 알약을 삼키듯 기생충의 애벌레를 삼켰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기생충은 숙주가 오직 사람인지라 동물에 감염실험을 할 수 없었다. 어렵게 발견한 애벌레를 그대로 죽일 수도 없었다.
두 달 반 뒤 엄 교수는 자신의 대변에서 3m 이상 자란 기생충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이 기생충에 ‘아시아조충’(Taenia asiatica)이란 학명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게 벌써 14년 전인 1993년의 일이다. 그리고 2000년 세계 기생충학계는 엄 교수의 주장대로 민촌충, 갈고리촌충과 함께 아시아조충을 사람의 세 번째 조충으로 인정했다.
엄 교수가 기생생물자원은행을 열게 된 데는 아시아조충의 역할이 컸다. 이름처럼 아시아조충이 아시아에만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오랫동안 세계 각국을 다니며 기생충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은행장’을 맡을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다. 현재 은행에 보관된 기생충은 7만5000점 정도.
지난 2월에는 한 달간 아프리카 동쪽에 위치한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섬에 다녀왔다. 2005년부터 매년 두 차례씩 아프리카를 방문했으니 이번이 벌써 5번째다. 이번 방문에서 엄 교수는 무함빌리의대 기생충학자인 프렘지 교수와 기생생물 자원 교류 협정을 맺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엄 교수는 “기생충도 생물자원의 하나”라며 “국내외 기생충이 더 없어지기 전에 연구 자료로 확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간디스토마 등 식품을 매개로 하는 기생충에 의한 질병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 해외여행이 늘어나면서 여행객이 수입하는 기생충이 늘고 있어 의학적인 목적에서도 기생충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생물음향은행_이 돼지는 배고프고, 저 소는 발정났네
은행장:연성찬(경상대 수의학과 교수) 보유품목:가축, 조류 등 음향 파일 3200개
은행고객:음향학자, 수의학자, 교사 등 홈페이지:www.koreabab.org
어미와 떨어진 송아지가 애타게 어미를 찾을 때 어떤 소리를 낼까.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에게 젖을 먹이려고 할 때는 어떨까. 짝짓기를 할 때 코끼리는 어떤 소리로 울까.
경상대 수의학과 연성찬 교수는 동물과 ‘대화’하는 ‘닥터 두리틀’을 꿈꾼다. 단순한 기침 소리인지 아니면 기분이 좋거나 화가 났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인지 연 교수는 동물의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가능한 동물의 소리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 행동도 관찰해야 한다. 연 교수는 1993년부터 캠코더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물의 소리를 녹음하고 행동을 찍기 시작했다.
24시간 ‘잠복근무’는 기본. 충남 서산 현대목장에서 한우의 소리를 녹음할 때는 며칠 밤을 꼬박 샜다. 한겨울에 경남 창녕군 우포늪 옆에 있는 사지포늪에서 철새 소리를 녹음할 때는 너무 추워서 온 몸이 꽁꽁 얼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음향 파일이 어느덧 3200개가 넘었다.
개, 소, 돼지, 닭, 염소 등 가축이 2300여개로 제일 많다. 연 교수는 “세계에서 가축 소리를 녹음한 파일을 가장 많이 보유한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연 교수는 생물음향은행을 미국 코넬대 생물음향센터와 비슷한 수준으로 키울 계획이다. 생물음향센터는 8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 최고의 생물음향은행 중 하나로 특히 고래의 음향 연구로 유명하다. 연 교수는 오늘도 캠코더와 마이크를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목재연륜 소재은행_세상에서 제일 정확한 나이테 감정사
은행장:박원규(충북대 산림과학부 교수) 보유품목:나이테 8000여점
은행고객:고기후학자, 역사학자, 문화재 보존 연구가, 임학자 등 홈페이지:wood.top.to
“부석사 무량수전 대들보에 사용된 목재는 1375년 것입니다.”
똑 부러진 대답이 돌아왔다. 고건축 전문가가 이보다 더 정확할까. 충북대 산림과학부 박원규 교수는 나무의 나이테 즉 연륜(年輪)만으로 옛 목재 건축이나 가구의 연대를 측정한다. 좁고 넓은 나이테 무늬를 보면 언제 벌채됐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나이테연대측정법’ 또는 ‘연륜연대법’이라고 한다.
열대지방을 제외하면 나이테는 1년에 하나씩 생긴다. 나이테의 너비는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가뭄이 심한 해는 나이테가 촘촘하고 홍수가 난 해는 성기다. 탄소동위원소 측정법이 최대 100년의 오차가 있는 반면 연륜연대법은 나이테만 선명하다면 오차가 없다.
문제는 연륜연대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나이테 패턴을 비교할 수 있는 표준연대기를 제작할 나이테 소재를 확보하는 일이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나무를 많이 얻을수록 유리하다. 박 교수는 신문을 보다가도 나이테 소재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운’이 좋으면 통째 얻기도 하고, 중요한 유물이나 훼손이 금지된 경우에는 목재 심(core)을 샘플로 가져오거나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다.
한 번은 충남 충주 호암동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관이 출토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적이 있다. 박 교수가 이 관들을 연륜연대법으로 분석한 결과 할아버지 관재는 1628년, 할머니 관재는 1606년으로 측정됐다.
2005년에는 충북 영동의 영국사(寧國寺)를 재건할 때 대웅전과 탑이 15도쯤 틀어져 있는 이유를 밝혀냈다. 박 교수는 숯과 나무 기단의 나이테를 조사해 벌채 연도를 알아냈고, 그 결과 1674년 영국사가 탑과 평행하게 지어졌지만 불에 탔고 1703년 재건하면서 방향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현재 박 교수는 10년 넘게 수집한 소나무의 나이테 조각을 이어 붙여 800년 전까지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표준연대기를 만들었다. 연륜연대법이 생소한 국내에서는 괄목할만한 성과다. 그래도 박 교수는 성에 차지 않는다. 미국, 영국, 독일에서는 1만2000년 전까지, 일본과 중국에서는 3500년 전까지 표준연대기기가 나와 있다.
박 교수는 “앞으로 삼국시대 이전까지 측정할 수 있는 표준연대기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목재연륜소재은행에는 8000여점의 나이테 소재가 모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