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혈흔 분석 의뢰를 받은 Y 교수

민정과 X는 어떤 관계였을까. 비밀을 풀기 위해 주민등록상 일 년 전 X가 살던 곳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집 주인에게 K 교수가 예측한 X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이 아가씨, 지금 어디 있어요? 말도 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다고.” 집 주인은 X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X가 살던 방도 팔리지 않아, 그냥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잠깐 창고 좀 보겠습니다.”
온갖 세간살이가 다 보관돼 있는 창고의 한 켠에서 혈흔을 발견했다. 놀라서 다가가 보니 혈흔과 함께 작은 살점이 붙어 있었다. 진원은 혈흔과 살점을 조심스레 채취했다. DNA 메틸화(61쪽 참고)의 전문가 Y 교수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한 남자의 인 생을 바꾼 폴로셔츠
2000년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잔인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집에 있던 한 여성과 7살 배기 어린 딸이 무참히 살해 당한 것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다름 아닌 피해자의 남편, 마크 에드워드 룬디였다. 한때 뉴질랜드를 시끄럽게 한 ‘룬디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큰 주목을 받았던 건 룬디의 살인을 증명한 증거물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차량 트렁크에서는 룬디의 폴로셔츠가 발견됐다. 셔츠에는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살점이 붙어있었고, 이는 살인을 증명하는 핵심 증거가 됐다. 2002년에 이뤄진 현미경 분석에 더해, 2015년에 살점의 전령RNA(mRNA)를 정밀 분석한 결과, 이 살점이 뇌 조직으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셔츠에 뇌 조직의 일부가 묻어있다는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둔기로 아내의 머리를 내리쳤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며 유죄를 주장했다.

이처럼 증거물이 어떤 조직이나 체액에서 유래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범죄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과거에는 주로 특정 조직에 존재하는 단백질을 검출해 분석했지만, 그 단백질이 다른 조직에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 조직 특이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최근에는 mRNA 혹은 DNA 메틸화를 이용해 조직과 체액을 식별하는 방법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특히 DNA 메틸화를 이용한 연구는 RNA를 이용하는 것에 비해 안정성이 높고, DNA 시료만 남아있는 오래된 미제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직의 DNA, 메틸화 지도를 만들다
DNA 메틸화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DNA 메틸화의 패턴이 조직마다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고, 2008년 미국과 유럽의 과학자들이 만든 ‘인간후성유전체와질병연합(AHEAD, Alliance for Human Epigenome and Disease)’은 DNA 메틸화 지도(인체 전체 조직의 메틸화 패턴을 조사해 기록한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질병을 연구하기 위한 대조군으로 사용할 정상 DNA 염기서열을 제공한 것처럼, 후성유전학 연구를 위해서 질병군과 비교할 수 있는 정상 조직의 DNA 메틸화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국립보건원(NIH)의 투자로 ‘로드맵 후성유전학 프로그램(Roadmap Epigenomics program)’이 시작됐고, 2011년 250종의 인간 세포에 대한 1000개의 참조 후성유전학 지도 작성을 위한 ‘국제인간후성유전체컨소시엄(IHEC, International Human Epigenome Consortium)’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도 2012년부터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 유전체센터가 이 과제에 참여해 한국인 주요 만성질환 조직 50종에 대한 후성유전체 정보를 연구하고 있다.
조직 식별은 왜 중요한가
법의학의 관점에서 조직에 특이적인 DNA 메틸화 패턴을 통해 범죄의 현장을 재구성하려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하나는 사람의 DNA가 제각각인데, 같은 조직, 가령 폐에서 나타나는 패턴이 동일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직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각각 다른 패턴이 나타나느냐다.
2009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6명의 사망자로부터 얻은 11가지 조직(방광, 대장, 식도, 간, 폐, 이자, 위, 뇌, 심장, 신장, 비장) 시료로 DNA 메틸화 지도를 완성했다(doi:10.1093/hmg/ddp445).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조직을 관찰할 때 보이는 DNA 메틸화 패턴의 차이가 같은 사람의 서로 다른 조직 사이에서 보이는 DNA 메틸화보다 더 작았다. 다시 말해, A라는 사람의 뇌와 폐에서 보이는 DNA 메틸화 차이보다, A의 폐와 B의 폐 사이의 DNA 메틸화 차이가 더 작았다는 의미다. 이는 조직마다 고유한 DNA 메틸화 패턴이 있고, 이를 이용해 조직을 식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적은 양으로도 조직을 식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살인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룬디 살인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정확하고 민감한 조직 특이적 DNA 메틸화 마커를 발굴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조직 특이성이 높고 다른 조직에 대해 교차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마커를 발굴해 미량의 시료에서도 어떤 조직인지를 알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조직 DNA 메틸화 패턴으로 체액 식별까지 가능해
아쉽게도 현재 법의학 영역에서 내부 장기나 조직을 식별하는 연구에 DNA 메틸화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예는 없다. 그렇지만 조직 특이적 DNA 메틸화를 이용해 범죄 현장에서 주로 발견되는 혈액, 타액, 정액, 질액, 생리혈 등의 체액을 식별하는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발견되는 이런 체액을 통해서도 사건 현장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혈액이 발견될 경우 폭력적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정액이나 질액이 발견되면 증거물을 남긴 사람 사이에 성적인 접촉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증거물이 타액이나 생리혈로 판명될 경우 반대로 무죄 시나리오의 증거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과거에는 체액이 묻어있는 증거물을 잘라내 혈청학적 분석 방법을 통해 혈액인지 정액인지를 한 번에 한 가지씩 확인해야 했다. 시료가 매우 적은 양이거나 질액, 생리혈 등 혈청학적 분석 방법이 없는 체액인 경우, 시료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성폭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 여성의 질 내용물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나타나고 용의자 남성의 DNA 정보가 확인된다면 두 사람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직접적인 성관계가 없는 성추행 사건의 경우에는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남성이 여성의 성기에 손가락을 넣어 추행한 경우, 성추행 행위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혈청학적 분석방법
항체가 항원에 결합해 침전하는 원리를 이용한 분석법이다. 예를 들어 정액에만 있는 단백질(항원)에 대응하는 항체를 넣어 침전 여부를 확인해 정액인지 아닌지를 분별한다.
이환영_hylee@yuhs.ac
현재 연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부터 체액 식별과 연령 추정을 위한 DNA 메틸화 연구를 하고 있다. 2014년부터 정부 지원으로 DNA 메틸화를 이용해 용의자의 외모와 습성을 추정하는 연구와 범죄현장 재구성을 위한 DNA 메틸화 변이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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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그날’의 사건을 해독한다 新 DNA 과학수사
Prologue. 당신, 도대체 누구야?
Part 1. DNA는 의외로 수다스럽다
Part 2. 미생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Part 3. DNA로 몽타주를 그릴 수 있을까
Bridge. DNA 메틸화로 기자의 신상을 털다?!
Part 4. 시체 없이도 살인을 증명할 수 있다
Epilogue.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