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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유전자의 비밀은 후성유전학

식물은 빛과 토양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생장할 수 있다. 빛이 충분한 경우에는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잎을 넓게 발달시킨다. 반대로 빛이 부족하면 잎의 크기를 줄이고 보다 나은 빛 환경을 찾을 수 있게 줄기를 길게 만든다. 질소가 풍부한 토양을 만나면 곁뿌리를 늘려 질소를 마음껏 흡수하지만, 질소가 부족한 곳에서는 곁뿌리의 발달을 스스로 억제한다. 이렇게 외부 환경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자신의 생장과 생존에 활용하는 식물의 특성을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가소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식물의 성장이다. 동물은 배아 단계에서 성체에 필요한 모든 세포의 분화를 마친다. 반면 식물 배아는 당장 필요가 없는 세포는 아예 안 만들고 초기에는 생장에 집중한다. 동물에서는 초기에 만들어지지만 식물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대
표적인 세포는 생식세포다. 어린 식물은 암술, 수술 같은 생식기관이 없다. 식물이 한번에 여러 세포를 만들 능력이 없는 단순한 존재라서 이런 것은 아니다. 식물은 초기에는 성장에 집중하고(필자는 수업시간에 이를 ‘몸짱프로젝트’라고 소개한다), 꽃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 오면 그제야 생식세포와 생식기관을 준비한다. 어찌 보면 동물보다 더 효율적인 셈이다.

이 변화는 보통 세포의 일부가 생식세포로 바뀌면서 이뤄진다. 식물은 어떻게 이런 가소성을 가질까. 환경이나 발달 단계에 따라 같은 유전정
보를 다르게 사용하는 ‘사용법’이 결정한다. 꽃이 필 때를 알려주는 DNA 밖의 정보, 즉 후성유전학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보리와 유채의 기억법

식물은 뇌와 신경세포도 없다. 당연히 동물과 같은 방법으로는 기억이나 학습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식물이 기억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식물
도 분명 뭔가를 기억하고 학습한다.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식물의 기억은 꽃을 피우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보리, 유채, 양배추 같은 2년생 식물은 싹이 돋은 첫해에는 꾸준히 성장을 한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오면 그제서야 꽃을 피워 열매와 씨앗을 만든다. 만약 2년생 식물을 생장에 적합한 따뜻한 온실에서 계속 기르면 더 빨리 꽃이 피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겨울을 보낸 적이 없는 2년생 식물은 절대 꽃을 피우지 못한다. 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겨울이 필요하고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자신이 꽃을 피울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2년생 식물은 첫해에는 영양생장을 하며 몸짱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런 몸짱프로젝트는 첫 겨울이 올 때까지 계속된다. 만약 겨울이 오지 않으면 계속 이 상태로 몸을 키운다. 겨울이 한번 지난 뒤에야 몸짱프로젝트를 중지하고 생식생장으로 체제를 전환한다(자기 몸 불리기에 바쁘던 식물이 겨울의 찬바람을 맞고 고생을 하며 삶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식물학자들은 이런 식물의 겨울나기를 ‘춘화처리’라고 부르며 후성유전으로 설명한다. 한 예로 애기장대(Arabidopsis )에는 개화를 억제하는 FLC 유전자가 존재한다. 꽃이 피지 않는 첫해에는 FLC가 강하게 발현되지만 겨울이 오면 추위에 따라 FLC의 발현이 점차 줄어든다. 겨울이 끝날 때는 더 이상 개화를 억제하지 못할 만큼 신호가 약해진다. 이때 FLC의 발현을 억제하는 것은 FLC 유전자를 감싸고 있는 히스톤의 메틸화다. 온도가 떨어지면 메틸화가 증가해 염색체 형태가 이질염색질로 바뀐다. 이질염색질에서는 DNA가 히스톤에 강하게 묶여 있어 FLC의 발현이 줄어든다(2파트 참조). 한번 약해진 신호는 두 번째 봄이 찾아와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고 FLC 발현은 낮게 유지된다. 반대로 개화를 촉진하는 유전자는 낮이 길어지면 조금씩 발현이 늘어나 결국엔 꽃이 핀다.

식물 기억의 또 다른 예는 면역이다. 사람의 면역세포는 한번 침입한 병원균을 B세포에 기억해두기 때문에 2차 침입 시에는 맞춤 항체를 만들 수 있다. 면역세포가 없는 식물도 병원균에 따라 체내의 화학적 분비물을 바꾸는 등 나름의 기억 면역체계를 갖고 있다. 식물의 기억 면역이 동물보다 뛰어난 점은 기억이 대를 이어서 유전된다는 것이다.

식물이 면역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면역을 담당하는 PR단백질 유전자 부위를 전사에 유리한 진정염색질 형태로 바꿔야 한다. 부모 세대가 어떤 병원균에 심하게 시달리면 PR유전자가 발현하기 좋은 구조로 바뀌고, 이 부모에서 태어난 자식 식물도 PR단백질 유전자 부분이 풀린 채 태어난다. 아직까지는 어떤 방식으로 면역정보가 후대로 전달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히스톤 아세틸화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식물세포는 전지전능하다

현재 식물 후성유전학 분야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줄기세포다. 식물의 줄기세포 연구는 동물보다 먼저 시작됐고 현재는 실험실과 농장에서 줄기세포를 직접 사용하고 있다. 식물 줄기세포의 가장 큰 특징은 전형성능(totipotency)이다. 전형성능은 보통 세포 하나로 온전한 개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세포에서도 전형성능을 유도할 수 있다면 피부세포 하나로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줄기세포인 배아줄기세포나 유도만능줄기세포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 인간 줄기세포는 유도된 특정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다분화능(pluripotency)만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인간 세포에서 전형성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것은 현재까지 수정란이 유일하다.

미국의 식물학자 폴셰 스쿠그와 카를로스 밀러는 1957년 식물의 생장호르몬인 옥신과 시토키닌을 배합해 세포의 전형성능을 최초로 유도했다. 식물에서 전형성능이 발견된 이후 식물학자들은 메커니즘을 연구하기보다는 이것을 활용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난초는 정상적인 생식을 통해서는 일 년에 씨앗 하나 얻기 힘들다. 그러나 식물의 전형성능을 이용해 대량으로 난초를 배양하면 잎 하나로 몇 달 사이에 수백 개의 새끼 난을 만들 수 있다. 전형성능은 식물 유전자 변형과 조직배양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전형성능 활용 연구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새롭게 전형성능을 유도했다고 밝혀진 식물도 늘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그 원리를 이해해야 할 때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은 세포를 처음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세포가 특정 세포로 변하거나(분화) 다시 돌아오는 과정
(탈분화)은 새로운 DNA를 넣거나 기존 DNA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다. 유전정보는 그대로 둔 채 이것을 사용하는 방식이 담긴 프로그램을 교체
해 이뤄진다. 이 프로그램이 후성유전학이다. 식물학자들은 식물의 유연한 후성유전적 특징이 전형성능에 보탬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물 연구는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박테리아가 20분에 한 번씩 새로운 세대를 만들 때 식물은 몇 달을 기다려야 한 세대의 표현형을 확인
할 수 있다. 식물 세포 자체의 특징 때문에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하기도 어렵다. 사람과 직접 연관된 분야가 아니다보니 관심도 적다. 그럼에도 우리는 식물의 놀라운 유연성을 계속 연구해야 한다. 멘델이 완두콩에서 현대 유전학의 토대를 다졌듯, 어쩌면 식물의 후성유전적 강점이 후성유전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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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쌍둥이는 왜 다를까
PART1. 후성유전학이 태어나다
PART2. 세포의 DNA 사용 설명서
PART3. 쓰레기 RNA가 암 정복한다
PART4. 그들이 ‘변신’하는 이유
PART5.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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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노유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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