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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대한민국 영재들이 사는 법



기자가 카이스트 재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대전에 간 것은 지난 4월 12일, 임시 휴강을 하고 교수와 학생들이 대화의 시간을 가진 두 번째 날이었다. 대전은 서울보다 봄이 빨리 찾아와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청초한 목련과 벚꽃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 여기 재학생 4명이 연달아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겪고 있는 재학생들은 의외로 담담하면서도 진지했다. 우울한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남몰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꼭 지켜주겠다는 생각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언론에 쏟아졌던 뉴스에 대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언론이 너무 자극적인 면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적에 대한 부담과 영어 강의에 대한 어려움이 하나의 원인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계 대학 10위권, 너무 서둘렀나?
2006년 7월 카이스트에 부임한 서남표 총장은 이듬해부터 평점 3.0 아래로 0.01점당 6만 원씩 등록금이 올라가는 제도(차등 등록금제)와 영어로 대부분의 강의를 진행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경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글로벌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학비를 거의 면제받았던 과거와 달리, 성적이 좋지 않으면 8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 일부를 내야 했다. 8학기 이내에 학부 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도 비슷한 금액을 등록금으로 냈다. 서 총장은 “세계 대학 순위에서 카이스트가 10위 안에 들려면 이런 경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있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는 서 총장이 부임한 후 198위(2006년)에서 69위(2009년)까지 올랐다. 당시 공학 분야에서는 21위였다.

그러나 이런 제도 때문에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상’을 줬던 과거와 달리, 현재 카이스트는 성적이 부족한 학생에게 ‘벌’을 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학생들이 자살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지자 카이스트는 지난 4월 12일 차등 등록금제를 폐지하기로 했다.

또 카이스트는 한국사, 국어, 일본어 같은 과목을 제외한 학부 강의의 90%를 영어로 진행해 왔다. 한 언론에서는 1월 8일에 죽은 조 모 씨가 전문계고 출신으로, 로봇 특기자로 입학했지만 영어 수업에 적응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보도했다. 4월 10일 수리과학과 한상근 교수는 “영어로 강의하면서 교수와 학생 사이의 대화가 단절됐다”며 “앞으로 우리말로 강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영어로 강의를 진행할지는 교수 개개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교수는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만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서 총장은 기자가 방문한 이 날, “학생들이 영어 수업과 우리말 수업중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차등 등록금제에 대해 기계공학과 한재준(08학번) 씨는 “학생들마다 의견이 다르다”며 “경쟁 분위기를 만들어 학생들이 더 많이 공부하도록 하려는 취지는 좋지만 방식이 잘못됐다는 의견도 많다”고 말했다. 영어 강의에 대해 재학생들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모든 교수님이 같은데, 영어 말하기 능력에 따라 수업의 양과 질이 다르다”며 안타까워했다. 한 학생은 “평소 연구실에서는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이 수업만 가면 (영어로만 말해야 하니까) 위축되시는 모습에 속상하다”고 말했다. 한재준 씨는 “미국에서 살다온 교수님 수업에서는 재미있는 농담이 나와도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차등 등록금제와 100% 영어강의가 지나친 부담을 준다는 것에 공감했다.


[4월 12일에 만난 카이스트 재학생들. 왼쪽부터 박건우, 서지인, 김성윤, 한재준 씨다. 학우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영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한계에 대해 희망적인 대안도 전했다.]



영재들의 첫 실패
고교시절까지 영재소리를 들을 만큼 우수했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 ‘첫 실패’를 맛보면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항상 1등, 수 또는 A만 받던 학생들에게 ‘너는 다른 애들보다 성적이 떨어지니 등록금을 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날 만났던 재학생들은 대부분 “입학식 때 차등 등록금제 이야기를 처음 듣고 나한텐 별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성적이 나오니 아니었다”면서 “우수한 학생끼리 경쟁하는 터라 좋은 성적을 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기 꿈을 찾고 창의력을 길러야 하는 시기에 학업에만 매달리다보니 오히려 공부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산업및시스템공학과 서지인(08학번) 씨는 “고등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단순한 목표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 구체적인 꿈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대학 과정 중에 자기 꿈을 찾아야 하는데 성적에 얽매여 목표 없이 공부하다 보면 박탈감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카이스트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생이면 누구나 가질 만한 고민이자 숙제다. 하지만 카
이스트 학생들은 여건상 고민을 상담할 만한 어른을 만나기가 어렵다. 서 씨는 “전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어른은 교수님들뿐이다. 인생의 길을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을 수업 시간에만 만나 전문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조차 고민을 털어놓기가 쉽지 않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학업에치이고 있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기에는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없다.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한 사건을 전적으로 학교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학생들이 꿈을 찾거나 고민을 서로 나누기엔 이 사회가, 영재를 향한 기대가 너무 숨 막힌다.

똑똑한 천재보다 창의적인 영재
불행한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화학과 김성윤(10학번) 씨는 “누구나 인생에는 실패가 있기 마련이므로 스스로 강해질 필요가 있다”면서 “실패로 인한 충격을 받았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재준 씨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끝없이 불행하다”면서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므로,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지인 씨는 “1학년 때 성적표를 받고 충격이 컸는데, 인도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계급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고 훨씬 성숙해져서 돌아왔다”며 배낭여행을 추천하기도 했다. 또 “세상이 우리를 우수한 인재라고 기대하는 만큼, 여기서 서로 이기려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세상을 위해 나 자신을 값지게 활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포기나 자살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당차게 말했다. 생명과학과에 재학 중인 박건우 씨(07학번)는 “친구들과 기타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며 같은 취미를 즐기며 우정을 다지는 방법을 제시했다.

교수들도 학생들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덕주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옛 성현들이 바람, 물 같은 자연을 예로 들어 교훈을 가르쳤듯이, 공학을 활용해 친근하게 다가서려고 한다”며 “인생은 비행기가 나는 원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건재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에게 “학업이 100m 경주가 아닌 마라톤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땐 친구나 선배, 교수를 찾아가 상담하라”고 조언했다.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가 변화해야 할 방향도 얘기했다. 서지인 씨는 “실험을 한 뒤 데이터를 ‘알맞게’ 조작하느라 바쁜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는 데이터가 옳든 그르든 분석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학교가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을 해주길 기대했다.

기자가 다음날 만난 졸업생 이승화(96학번) 씨는 “성적이 나쁘더라도 공부를 못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몇 명 안 되는 ‘천재 가운데 천재’와 자신을 비교해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보다 게임에 매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지금은 최고의 게임 프로그래머가 됐다”면서 학업뿐 아니라 개인의 특기와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지식 암기 위주에서 벗어나 개인의 특성을 살리는 창의적인 교육은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다.

네 열등감을 깨우치려 가르친 것이 아닌데 외로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는 너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 내가 죄인이다.” 지난 4월 8일 경영대 이재규 교수가 학생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카이스트는 문제를 해결하고 학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학교 측 5명, 교수회 5명, 학생회 3명으로 혁신비상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4월 19일부터 일주일에 3번씩 회의하고 있다. 카이스트 교수와 학생들이 대
한민국에 ‘영재들이 살아갈 현명한 길’을 제시해 주길 기대한다.




[카이스트는 지난 4월 11~12일을 자살한 학생들에 대한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모든 강의를 쉰 채 학과별로 교수와 학생 간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사진은 교정 잔디밭에 모여 있는 교수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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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누가 영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Part 1. 대한민국 영재들이 사는 법
Part 2. 똑똑해서 슬픈 베르테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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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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