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후성유전학이 가장 처음으로 도전할 질병치료 분야다. 1983년에 미국 존스홉킨스대 앤드류 페인버그 교수는 인간 암세포에서 특정 유전자의 메틸화 정도가 정상세포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암과 후성유전학의 관련성이 처음으로 입증된 것이다. 최근에는 국제암유전체연구단이 50여 가지 암과 DNA 메틸화의 연관성을 밝혀내기도 했다.
지금은 ‘후성유전적 정보가 어떻게 세포를 암세포로 바꾸는가’로 궁금증이 옮겨갔다. 메틸화 외에도 히스톤 변형 등이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퍼즐을 완성하려면 좀더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쓰레기 DNA가 만든 유용한 RNA
현재까지 퍼즐을 완성한 가장 강력한 후보는 비암호화 RNA다. 비암호화 RNA는 단백질을 만들지 않는 RNA다. 인간게놈프로젝트 결과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는 전체 DNA의 1%에 불과한 2만 개 정도였다. 나머지 99%의 DNA는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는 ‘쓰레기 DNA’다. 하지만 2012년 9월 단백질을 못 만드는 쓰레기 DNA라고 할지라도 80% 가량은 전사가 된다는 연구결과가 30여 개 학술지에 연달아 발표되면서 과학자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쓰레기 DNA가 정말 필요 없는 것이라면 굳이 전사를 할 필요가 없다. 현재는 간섭 RNA(siRNA) 등이 발견되면서 RNA가 DNA와 단백질의 중간자 역할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여러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후성유전학자들은 염기 서열 길이에 따라 비암호화 RNA를 두 가지로 나눈다. 우선 염기 서열 길이가 200개 이하인 RNA를 ‘짧은 비암호화 RNA’라고 부른다. 짧은 비암호화 RNA는 여러 종에 걸쳐 서열이 잘 보존돼 있다. 이것은 짧은 비암호화 RNA의 후성유전적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다. 짧은 비암호화 RNA는 주로 단백질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전령 RNA(mRNA)의 꼬리 부분에 결합해 RNA의 안정성을 떨어뜨린다. 이런 mRNA는 세포질에서 곧 분해되고 자연스레 단백질을 만들 수 없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목표로 하는 mRNA에 정확히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표에 완전히 상보적인 유전자 서열이 종에 구분없이 잘 보존돼야 한다.
최근에는 짧은 비암호화 RNA의 한 종류인 마이크로 RNA(miRNA)가 암세포에서 지나치게 많이 발현되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확인됐다. 과학자들은 miRNA가 정상 세포의 활동을 방해해 암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길고 짧은 RNA가 암을 넘본다
염기 서열의 길이가 200개 이상인 비암호화 RNA는 ‘긴 비암호화 RNA(long non-coding RNA, lncRNA)’라고 부른다. 암에서 조금 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lncRNA는 짧은 비암호화 RNA와 달리 보존된 서열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lncRNA를 여러 방면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X염색체에 있는 lncRNA인 X염색체 불활성화조절자(XIST)는 염색체 구조를 결정하는 조절자를 억제해 X염색체를 비활성화시킨다. 염색체는 비슷한 기능을 하는 두 개의 염색체가 짝을 이룬다. 여성의 X염색체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둘 중에 한쪽이 비활성화돼야 세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XIST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 비활성화다. 그런데 XIST가 적게 발현되면 X염색체 두 개가 모두 활성화돼 이상이 생긴다.
‘HOTAIR’라는 lncRNA도 주목할 만하다. 이 RNA는 자신이 위치한 염색체가 아닌 다른 염색체의 유전자를 억제한다. 12번 염색체의 HOXC 유전자에서 전사돼 2번 염색체에 위치한 HOXD 유전자를 억제한다. 혹스(HOX) 유전자는 발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HOTAIR은 유방암을 막는 복합체의 활동을 저해해 암을 유발한다.
비암호화 RNA가 암 연구에서 주목 받는 이유는 이것이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과 같은 후성유전적 요인들을 조절하는 제어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후성유전적 요인이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라면 비암호화 RNA는 오케스트라를 총괄하는 지휘자다. 가령 CEBPA라는 유전자에서 전사되는 lncRNA는 DNA를 메틸화시키는 DNA 메틸전달효소를 제어한다. 뿐만 아니라 RNA를 조절하는 것은 개인별 맞춤 치료에도 응용할 수 있다. 이런 비암호화 RNA를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메틸화나 히스톤 변형 등을 직접적으로 조절하지 않고도 암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쓰레기 RNA의 반란에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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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세포의 DNA 사용 설명서
PART3. 쓰레기 RNA가 암 정복한다
PART4. 그들이 ‘변신’하는 이유
PART5.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