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쌀 - 아미노산 함량 높인 고품질
‘밥 힘으로 사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작물은 단연 벼다. 전에는 알맹이 속이 튼실한 쌀을 재배해 밥을 배불리 먹는 것에 만족했지만 이제는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식생활도 개선되면서 고품질 쌀을 찾는 소비자가 늘었다.
지난 1월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읍방사선과학연구소에서는 일반 쌀보다 아미노산 함량이 높은 ‘골드아미 1호’를 개발했다. 쌀에는 탄수화물은 많이 들어 있지만 몸속에서 만들 수 없어 꼭 섭취해야 하는 필수아미노산이 부족하다.
이 쌀을 개발한 김동섭 박사팀은 국산 품종 동안벼의 쌀눈에 방사선의 일종인 감마선을 쪼여 아미노산을 합성하도록 유전자를 변형시켰다. 그 결과 트립토판, 라이신 같은 필수아미노산의 함량이 증가해 전체 아미노산 함량도 일반 동안벼에 비해 76%나 높아졌다.
방사선이나 화학물질을 처리해 특정 형질을 갖도록 하는 이른바 ‘돌연변이육종’ 방식이다. 국립식량과학원 벼맥류부 신문식 연구관은 “우리 연구팀은 요즘 흰잎마름병에 잘 견디는 새로운 벼 품종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벼 흰잎마름병균은 논물에 살다가 벼에 난 상처를 통해 침입하며, 물관을 타고 올라가 잎을 말려 죽인다.
보리 - 윤기 흐르는 '웰빌'식
농경지가 좁은 한국에서는 예부터 벼와 함께 이모작으로 보리농사를 지었다. 보리를 빨리 거둔다음 벼를 재배해야 하므로 육종학자들은 더 빨리 수확할 수 있는 보리 품종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왔다.
국립식량과학원 벼맥류부 최재성 연구관은 “육종 결과 겉보리와 쌀보리는 5일, 맥주보리는 10일씩 성숙기가 빨라졌다”며 “이와 함께 수확량 증가도 육종의 큰 성과”라고 말했다.
보리는 원래 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쌀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예전엔 쌀과 섞어 밥을 지으려면 미리 한 번 삶아야 했다. 육종학자들은 물을 잘 흡수하는 보리와 보통 보리를 교잡한 찰보리 품종을 19가지 개발했다. 찰보리를 넣은 보리밥은 보통 보리를 이용했을 때보다 더 차지고 끈기가 좋으며 맛이 부드럽다. 식어도 덜 굳고 밥을 하는 시간도 준다.
최근 국립식량과학원은 보리호위축병에 저항하는 새로운 품종도 개발하고 있다. 보리호위축병에 걸리면 수확량이 30~80% 감소하며 알맹이도 속이 차지 못하고 쭉정이가 된다.
채소
배추 - 연중 김치 담글 수 있어
요즘은 1년 내내 김치를 담글 수 있다. 사시사철 싱싱한 배추가 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겨울에 수십 포기씩 김장을 하는 집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육종기술 덕분이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한다. 18~21℃가 배추가 자라는 데 가장 적합한 온도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배추는 보통 가을에 심는다. 싹이 난 뒤 60~90일이 지나면 결구(結球)가 끝난다. 배추 잎이 적당히 늘어 여러 겹으로 겹쳐져 둥글게 속이 차는 상태를 결구라고 부른다.
과거엔 봄에 배추 씨를 뿌리면 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생육이 멈췄다. 이런 배추는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서울대 농대 박효근 명예교수는 “기온이 비교적 따뜻할 때 심어도 재배가 가능한 새로운 배추 품종이 육종기술로 여럿 개발됐다”고 설명했다.
봄배추와 여름배추(고랭지배추)가 바로 그것. 심지어 한겨울에 수확하는 월동배추까지 나왔다. 배춧잎을 하나하나 따내면 한가운데에 둥그스름하고 딱딱한 막대 모양이 나온다. 이를 ‘중륵’이라고 부른다.
중륵이 크고 잎이 적을수록 배추의 품질은 떨어진다. 한국농업대 식량작물학과 오대근 교수는 “배추는 중륵이 작고 가늘며 잎 수가 많은 쪽으로 개량돼 왔다”며 “요즘은 중륵에 가까운 안쪽 잎에 노란색을 띠는 품종도 나왔다”고 말했다. 노란 배춧잎에는 항산화기능이 있다고 알려진 색소 크산토필이 들어 있다.
도라지 - 육종 걸음마 단계
자연 상태에는 백도라지와 청도라지가 마구 섞여 자란다. 백도라지와 청도라지는 꽃 색깔만 다르다. 두 도라지의 유전적 차이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이 도라지를 비롯한 약용작물의 특징이다.
국립목포대 생약자원전공 김관수 교수는 “약용작물의 육종은 대부분 잡다한 개체가 섞여 있는 상태에서 명확한 유전적, 형태적 특징을 갖춘 것을 골라 따로 심고 그 자손 가운데 다시 우수한 것을 골라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분리육종’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는 초기 단계의 육종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작물에 비해 약용작물은 육종이 늦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식량작물 위주로 육종을 하다 보니 약용작물에까지 손이 미치지 못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천연물 신약이니 건강식품이니 하면서 약용작물에 관심이 높아지자 육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약용작물 육종은 쉽지 않다. 김 교수는 “약용작물에 들어 있는 유효성분은 함량이나 기능이 환경에 따라 변화가 심해 다른 작물에 비해 육종의 효과가 적게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농가에서는 재배환경이나 가공방법만 바꾸기도 한다.
마늘 - 교잡 안 되는 골칫거리
마늘은 교잡이 안 된다. 자라면서 8개의 염색체가 서로 달라붙어 생식기관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꽃이 피어도 주아가 영양분을 다 뺏어간다. 마늘의 줄기인 마늘종을 보면 끝부분에 매듭처럼 생긴 덩어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주아다. 대부분의 마늘은 주아를 씨앗처럼 땅에 떨어뜨려 번식한다.
교잡이 안 되니 육종도 어렵다. 요즘 식탁에 오르는 마늘은 재래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입육종’으로 얻은 품종이다. 즉 유사한 환경에서 나는 외국 품종을 들여와 국내에서 적응시켜 재배한 마늘이란 뜻이다. 재래종이나 도입육종 품종은 주아가 떨어지길 기다리거나 익은 다음 한 알씩 심어야 번식이 된다.
마늘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에는 희한하게도 꽃 피는 마늘이 난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예작물부 윤무경 연구관은 이런 마늘을 수집해와 서로 교배시켜 ‘다산’‘천운’‘화산’의 3품종을 개발했다. 이들은 보통 마늘과 달리 꽃을 피워 종자로 번식한다.
그러나 윤 연구관은 “꽃을 피우려면 손으로 일일이 주아를 제거해야 하고, 씨앗 100개 중 20개 정도만 발아해 증식률이 낮다”고 말했다.
채소
파프리카 - 고추 점점 닮아가기
피망이 익어 색깔을 띤 것이 바로 파프리카다. 피망은 우리말로 단고추, 파프리카는 착색단고추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고추와 같은 종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파프리카는 거의 다 네덜란드 품종이다. 수입됐으니 비싸다. 파프리카 하나의 종자가 500~1000원이나 된다. 더구나 이런 외국산 파프리카는 국내 기후나 질병에 취약해 생산량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이에 농림수산식품부는 2007년부터 국산 파프리카를 육성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문제는 파프리카 재배 경험이 많지 않다는 점. 파프리카가 국내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건 불과 10년쯤 전부터다. 육종학자들은 국내에서 오랫동안 재배해온 고추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대 농대 식물생산과학부 강병철 교수는 “고추와 파프리카를 교배해 매운 맛이 없으면서 모양이나 색깔은 파프리카처럼 생기고 각종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갖춘 개체를 선발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최근 육종학자들이 주목하는 바이러스는 토마토반점위조바이러스(TSWV). 국내엔 원래 없었는데 4, 5년 전부터 토마토와 고추, 파프리카, 감자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반점이 생기면서 말라 죽는다. 강 교수는 “파프리카가 TSWV에 잘 견디는 유전자를 가졌는지를 간단한 검사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콩나물 - 숙취 완벽 해결사
아버지가 과음했거나 동생이 옴팡 감기에 걸리면 옛날 어머니들은 아침 식탁에 콩나물국을 올렸다. 실제로 콩에 들어 있는 단백질인 이소플라본은 숙취나 감기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나물용으로 재배하는 콩 품종은 주로 소원콩, 황금콩, 태광콩이다. 이들 품종은 콩나물용으로 키워도 알맹이가 썩지 않고 영양분이 빠져나가지 않으며 뿌리도 길고 굵게 자라 콩나물 재배에 알맞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콩 품종에 비해 병에 잘 걸린다.
콩의 여러 가지 병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콩모자이크바이러스(SMV)병.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어린 콩이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콩이 아예 맺히질 않는다. 콩이 맺히더라도 바이러스가 다음 세대에 전달돼 또 병이 생긴다.
지난해 국립식량과학원 두류유지작물과 문중경 박사팀은 이 병에 강한 새로운 품종 ‘신화콩’을 개발했다. 우리나라 재래종 콩에서 콩모자이크바이러스에 강한 유전자(Rsv1)를 찾아내 소원콩에 삽입한 품종이다. 신화콩은 이 병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뿐 아니라 이소플라본 함량도 다른 콩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이 - 멘델로 헷갈리는 육종
오이는 보통 6월경 심어 여름에 수확한다. 기온이 12℃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냉해(冷害)를 입기 때문이다. 오이가 냉해를 입으면 잎이 희끄무레하게 변하며 시든다. 오이 육종의 화두는 냉해에 저항성을 갖는 품종 개발이다.
동국대 생명과학과 정상민 교수팀은 오이의 냉해 저항성 유전자를 찾던 중 이 형질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르지 않고 모계(母系)로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아내 7월 1~3일 대전에서 열린 한국육종학회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르면 양친을 교배했을 때 양친의 형질이 섞인 다양한 자손이 나온다. 그러나 연구팀이 냉해에 잘 견디는 오이(저항성)와 취약한 오이(감수성)를 교배한 결과 모계의 형질만 갖는 자손이 나왔다. 예를 들어 아빠가 저항성이라도 엄마가 감수성이면 자손은 전부 감수성이 된다.
그런데 최근 오이의 냉해 저항성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른다는 정반대의 연구결과도 국제 육종학계에 보고됐다. 정 교수는 “오이의 냉해 저항성 유전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며 “성장하는 동안 각각 다른 시기에 냉해 저항성을 조절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과일
사과 - 해걸이 해결한 신품종
사과나무는 ‘해걸이’를 한다. 어느 한 해에 꽃이 많이 피면 이듬해엔 적게 핀다. 나무 스스로 생산량을 조절한다는 뜻이다. 호르몬 분비량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안정적인 수입을 원하는 농민 입장에선 참 난감한 일이다.
최근 해걸이 현상이 덜 일어나는 새로운 품종 ‘홍로’가 개발돼 시장에 나왔다. 미국산 사과 2종을 교배해 우리 풍토에 알맞은 개체를 선발한 성과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기술지원과 신용억 박사는 “다른 사과보다 빨리 익고 단단해 유통에 유리한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딸기 - 일본서 왔지만 점점 토착화
딸기는 일본에서 건너와 1960년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본 품종을 국내 환경에 알맞게 개량하면서 점점 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육종을 해왔다.
딸기는 재배가 까다롭다. 같은 품종이라도 종자마다 온도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딸기 겉에 박혀 있는 수많은 씨마다 온도 민감도가 서로 다르다고 보면 된다.
18℃ 이하의 온도에서 얼마 동안 재배하느냐에 따라 딸기는 초촉성(심는 시기 8월 말)과 촉성(9월 말~10월 초), 반촉성(10월 말~11월 초)으로 구분된다. 재배가 까다로우니 당연히 육종도 어렵다.
국내에 유통되는 딸기는 아직 일본산이 더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설향, 매향, 수경처럼 우리 기술로 육종한 딸기의 시장점유율이 점점 늘고 있다. 특히 수경은 지금까지 나온 딸기 중 가장 단단해 수출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배 - 추석에 맛있어진 까닭
추석 차례상에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 바로 배다. 그런데 품종에 따라 추석 전에 채 익지 않는 경우도 있다. 농가에선 재배할 때 호르몬(지베렐린)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면 다 익은 것처럼 몸집은 커지지만 당도가 부족해 맛이 별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종한 품종 중 하나가 ‘원황’이다. 빨리 익고 육질이 좋은 일본 품종 2가지를 교배한 다음, 우리 풍토에 잘 적응한 개체를 선발한 결과다. 이 같은 육종 덕분에 추석에도 크고 단 배를 맛볼 수 있게 됐다.
국내에서 재배하는 배는 대부분 동양배. 서양배나 중국배에 비해 육종이 쉽지 않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김정희 박사는 “동양배는 교배한 뒤 적어도 5년이 지나야 과실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수량과 품질에 악영향을 미치는 검은별무늬병에 취약하다”며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육종기술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복숭아 - 소비자 입맛 까다로워
복숭아에 대한 소비자의 기호는 변화가 잦다. 무른 걸 좋아하기도 하고 단단한 걸 선호하기도 한다. 복숭아는 비가 많이 오면 다른 과일에 비해 당도가 훨씬 쉽게 떨어진다. 복숭아 육종가들은 이런 특성을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
최근 시장에 나온 신품종 복숭아 ‘유명’은 일본산 백도 두 품종을 교배해 얻었다. 양친 모두 무른 품종인데, 자손인 유명은 사과처럼 단단한 복숭아가 나왔다. 돌연변이다. 또 다른 품종 ‘진미’는 장마나 집중호우 같은 악조건에서도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하도록 육종됐다. 유명보다 무르고 크기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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