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지난 10월 5일, 세계에서 가장 얇은 탄소물질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핀’ 연구에 초석을 마련한 2명의 과학자를 올해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번 수상은 다른 해에 비해 꽤 파격적이라는 평이다. 연구나 개발이 충분히 이뤄져 이미 일상생활에 응용되고 있는 분야를 선정한 예년과 달리, 현재는 별다른 응용사례가 없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새로운 분야에 상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영광의 수상자는 흑연에서 그래핀 한 층을 벗겨 내는 데 성공해 그 특성을 처음으로 보고한 영국 맨체스터대의 안드레 가임 교수와 연구원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다. 이들은 3차원 탄소 덩어리인 흑연을 셀로판 테이프에 붙인 뒤 다른 셀로판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내기를 반복해 단원자의 탄소막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분리해 낸 그래핀을 실리콘 박막 위에 붙인 뒤 그 성질을 측정해 그 내용을 2004년 10월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당시 그래핀을 얻기 위해 연구 중이던 다른 연구팀보다 훨씬 간단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분리에 성공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핀은 C60 ‘풀러렌’, 탄소나노튜브와 함께 탄소 나노 물질 분야의 3형제로 불린다. 그래핀은 3형제 중 가장 늦게 연구를 시작한 막내지만, 2차원 평면의 단순한 구조여서 입체 형태의 다른 두 물질보다 응용 가능성이 높다.
첨단 재료로 활약이 기대되는 그래핀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으로 결합해 벌집 형태로 넓게 연결된 화합물이다. 이 때 탄소 원자 하나하나는 이웃한 탄소와 전자 한 쌍 반을 공유하는 ‘켤레이중결합(공액결합)’을 이룬다. 벤젠 분자와 똑같은 결합이다.
이 때 한 쌍의 전자는 탄소와 탄소 사이를 견고하게 연결시켜 주고, 남는 전자들은 양자역학적 성질에 의해 그물코를 이루는 육각형의 구조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켤레이중결합을 이루는 전자 중 일부가 그물코 안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래핀 내부는 전하의 이동성이 뛰어나고 전기전도성이 대단히 높다. 예를 들어 상온에서 전기를 얼마나 빨리 나를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전자이동도’의 경우 1만 5000cm2V-1s-1로, 실리콘(1400cm2V-1s-1)의 100배가 넘는다. 더구나 그래핀이 나르는 전기의 양은 구리의 100배에 달한다.
그래핀은 구조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이다. 그물눈에 해당하는 빈 공간이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물을 구부리거나 당기면 모양은 변하지만 그물의 연결 상태는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강도는 강철보다 100배 강하고, 면적의 20%를 늘려도 끄떡 없을 정도로 신축성도 좋다. 더구나 이렇게 구부리거나 늘려도 전기 전도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핀은 열 전도도도 구리의 10배가 넘고, 빛의 98%를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하다. 또 다른 물질과 결합할 수 있어 얼마든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에 0.1%의 그래핀을 넣으면 열에 대한 저항성이 30% 늘어난다. 1%를 섞으면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다.
그래핀 산업화의 길을 열다
이런 그래핀의 장점 때문에, 초기에 물리학 분야에 한정되었던 그래핀 연구가 최근에는 합성법과 관련된 재료, 화학 분야에서도 활발하다. 또 다양한 전자 제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현재 그래핀을 얻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다.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가 했듯 셀로판 테이프를 이용해분리하는 방법은 여전히 많이 쓰인다. 다음으로 필자가 있는 성균관대의 홍병희, 안종현 교수팀이 2009년 개발한 화학증착법(CVD)이 있다. 실리콘 기판에 니켈을 증기 형태로 뿜어 입힌 뒤 1000℃의 고온에서 메탄과 수소를 섞은 기체를 반응시키는 방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니켈층에 탄소가 녹아 표면에 단원자의 탄소막을 얻을 수 있다. 이 방식은 셀로판 테이프를 쓰는 방식에 비해 그래핀을 넓은 면적으로 만들 수 있어 디스플레이나 반도체 등 산업에 이용하는 데 크게 유리하다.
그 밖에도 실리콘 카바이드 절연체를 이용한 에피택셜 방법과, 환원제를 이용해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이 있다. 특히 필자는 2010년 9월, 이제까지 이용되지 않던 새로운 환원제(요오드산과 초산)를 이용해 상온에서 그래핀을 대량생산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에 사용되던 화학합성법의 경우 질소를 포함하는 하이드라진 환원제를 넣어야만 합성이 가능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생기기 쉬웠다. 필자의 연구팀은 하이드라진 대신 요오드산과 초산을 넣으면 불순물을 크게 줄이면서 생산 효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이 내용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했다. 이 방법은 120℃의 고온에서 합성할 수밖에 없었던 기존 방법에 비해 상온에 가까운 40℃에서도 그래핀 합성이 가능해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현재 합성 온도를 10℃까지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무궁무진한 그래핀의 활용 가능성
공학자들은 그래핀을 활용해 셀로판지처럼 얇은 두께의 컴퓨터 모니터나 시계처럼 팔에 찰 수 있는 휴대전화, 구부러지는 터치스크린, 태양전지판, 종이처럼 접어 지갑에 넣고 다니는 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유기화학 반응을 이용해 그래핀 반도체를 만들 경우, 현재 연구하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인 유기반도체,즉 분자메모리소자나 유기전계트랜지스터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필자 역시 이런 전망 때문에 그래핀 대량 생산 연구에 뛰어들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이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파격적으로 ‘젊은 분야’인 그래핀에 돌아간 것은 이런 과학계와 공학계의 기대와 염원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래핀의 특성을 분석한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 외에, ‘2차원 결정 구조인 그래핀에서 전하는 질량이 없다’는 연구 결과를 2005년 ‘네이처’에 게재한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수상을 놓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김 교수는 그래핀을 반도체에 이용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밝혔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은 아직 그래핀의 활용가능성을 전부 알지 못한다. 그 만큼 밝혀지지 않은 특성이 많다는 뜻이다. 이번 수상이 그래핀의 비밀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노벨상 수상자들의 국적을 묻다
투명테이프가 선물한 노벨상
탄소 중매쟁이 노벨상 거머쥐다
‘시험관 아기’로 신의 섭리 넘어서다
세균과 수염을 함께 기르면 안 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