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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과 에너지 잡는 견인차 '분자육종'

역병 이기는 고추, 스트레스 강한 고구마

지난 4월 7일 국내 육종학계에 경사가 생겼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다국적 종자회사 ‘누넴’이 한국 중소기업 ‘고추와 육종’이 개발한 기술을 5만 유로(약 9000만 원)라는 큰 돈을 주고 산 것이다. 한국 기업이 육종기술을 농업강국인 네덜란드에 수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 육종 전문가들도 인정한 이 기술은 바로 고추의 ‘분자표지’다. 치명적인 역병에 잘 견디는 새로운 고추 품종을 빠르고 정확하게 개발할 수 있는 첨단기법이다. 육종학자들은 이 같은 기술을 ‘분자육종’이라고 부른다. ‘분자표지’나 ‘분자육종’에서 ‘분자’는 유전자(DNA)를 뜻한다. 분자육종은 전통 육종기술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최근 육종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국산 고추 분자표지 첫 수출

역병은 탄저병과 흰가루병, 세균성반점병과 함께 고추의 대표적인 질병으로 물곰팡이에 의해 감염된다. 역병에 걸린 고추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어릴 때 반점이 생기며 말라 죽고 만다. 농가에서는 보통 역병을 막기 위해 작물을 띄엄띄엄 심거나 살균제를 뿌린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넓은 땅에서 적은 양을 생산하니 비효율적이고, 살균제는 자라는 데 도움을 주는 곤충까지 죽이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멕시코산 고추(CM334)는 선천적으로 역병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고추와 육종 연구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해 역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는 유전자(역병 저항성 유전자)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냈다. 바로 이 유전자를 교배나 유전공학 기법으로 일반 고추(Capsicum annuum)에 삽입하면 역병에 잘 견디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이 ‘분자육종’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새로운 품종이 실제로 역병에 잘 견디는지, 다시 말해 정말 역병 저항성 유전자가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고추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약 1달 반이나 지나야 하니 너무 오래 걸린다.

역병 저항성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을 알면 문제는 해결된다. 새로운 품종의 유전자를 분석해 같은 염기서열이 있는지 비교해보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추의 염기서열은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역병 저항성 유전자 역시 염기서열을 모른다는 얘기다.



고추와 육종 연구원들은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여러 종류의 염기서열을 가진 유전자 조각을 무작위로 만든 다음, 역병 저항성 유전자를 비롯한 그 주변 염기서열과 비교했다. 그 결과 역병 저항성 유전자 바로 옆에 있는 유전자와 동일한 염기서열을 찾아냈다. 이들 유전자는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항상 붙어 다닌다. 역병 저항성 유전자가 새로운 품종에 삽입되면 바로 옆에 있는 이 유전자도 함께 들어간다는 뜻이다.

바로 이 유전자가 ‘분자표지’다. 분자표지가 있으면 고추를 실제로 재배하지 않고 어릴 때 한 번의 유전자 검사만으로 새로운 형질(역병 저항성)을 얻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고추와 육종 윤재복 대표는“분자표지를 이용해 최근 전통 육종방식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역병 저항성 품종을 개발했다”며 “10월경 이 품종에 대해 국립종자원에 품종보호권을 출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품종보호권이 출원된 품종은 2년간 3개 지역에서 재배되면서 특성과 품질을 심사받는다. 심사를 통과하면 고추와 육종은 이 품종을 로열티를 받고 판매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업은 이제 탄저병으로 눈을 돌렸다. 탄저병 역시 곰팡이가 일으키는 병으로 감염되면 수확할 때쯤 고추가 다 썩어 버린다. 윤 대표는 “탄저병에 걸리지 않는 남아메리카산 고추(Capsicum baccatum)를 이용해 탄저병 저항성 분자표지를 찾아내고 신품종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전공학과 분자표지 기술의 결합

분자표지나 유전공학이 나오기 전 육종학자들은 고추에 물곰팡이를 접종해 역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남는 종만 가려내 다른 품종과 교배하는 방식으로 역병 저항성 신품종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적인 육종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품질은 우수하지만 병에 잘 걸리는 A와 품질은 떨어지지만 병에 대한 저항성 유전자를 가진 B 두 품종이 있다고 하자. 품질은 A를 최대한 닮고 B에게선 병저항성 유전자만 물려받은 자손을 얻는 게 육종학자들의 목적이다.


 

 

하지만 자손(F1)은 A와 B에게 유전물질을 50%씩 받는다. 이들 자손에 병원균을 주입해 병에 저항하는 F1만 선발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A와 교배한다(역교배). 역교배로 태어난 자손(BC1)은 확률적으로 전체 유전자의 75%는 A, 25%는 B에게 받은 셈이다.





다시 병원균을 주입해 살아남는 BC1만 골라 A와 교배한다. 이 같은 역교배 과정을 적어도 5, 6번은 반복해야 A를 99% 이상 닮고 B의 병 저항성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얻을 수 있다. 전통육종이 많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가 나올 때마다 병원균을 접종하는 일도 여간 번거롭지 않다. 지금은 일일이 교배하지 않고 유전자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도 한다. 유전공학과 분자표지 기술이 결합된 분자육종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다.

분자육종은 지구촌 식량부족 문제의 해결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질병에 잘 견디는 품종을 개발해 작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막이나 간척지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재배되는 신품종 작물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에탄올 원료와 다이어트용 쌀 개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의 연구원들은 기온이 낮은 지역이나 건조한 사막, 염분이 높은 간척지에서도 재배 가능한 고구마를 개발하고 있다. 물론 보통 고구마는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지 못한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식물은 자라는 동안 끊임없이 산소를 소모한다. 산소는 식물의 몸속에서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대사과정을 거치면서 활성산소로 바뀌기도 한다. 활성산소는 조직을 손상시키고 정상적인 대사과정을 방해해 노화와 다양한 병을 일으킨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활성산소가 많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이나동물, 식물 모두 마찬가지다.

그나마 동물은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 환경을 찾아 이동할 수 있지만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그러지도 못한다. 식물이 활성산소를 없애는 다양한 항산화물질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진화한 이유다.

고구마가 만드는 대표적인 항산화물질은 비타민C와 베타카로틴, 안토시아닌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환경바이오연구센터 곽상수 박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많은 항산화물질을 생산하는 신품종 고구마를 개발하고 있다”며 “이 고구마를 중국 내몽골의 사막지역 같이 재배조건이 불리해 생산성이 낮은 땅에 심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분자육종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에너지 고갈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밀이나 옥수수, 감자 같은 작물이 녹말을 더 많이 함유하도록 분자육종 기술로 개량하면 된다는 뜻이다. 녹말이 차세대 에너지 원인 바이오에탄올의 원료이기 때문이다.

최근 식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면서 분자육종의 필요성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과거 육종은 사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제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기호와 입맛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맞추는 게 농업의 핵심적인 경쟁력이 됐다. 예를 들어 비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탄수화물 함량은 낮추고 아미노산 함량을 늘린 다이어트용 신품종쌀을 개발할 수 있다.

하지만 농가 현장에선 분자육종이 아직 먼 얘기다. 농촌진흥청 김연규 박사는 “분자육종의 장점과 필요성을 농민들에게도 충분히 알리고 분자표지를 농가에서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전통 육종학자는 실제 작물을 재배하며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분자육종학자는 상대적으로 농민들과의 의사소통이 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육종학회 오대근 회장(한국농업대 교수)은 “기술만 연구하는 육종가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농민처럼 농업 현장을 알아야 하고 사회학자처럼 소비자의 변화를 간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자육종은 유전자변형인가

분자육종 작물이 유전자를 추가로 넣었다는 점에서 유전자변형(GM) 작물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분자육종이냐 GM이냐는 삽입되는 유전자에 따라 결정된다. 한국육종학회 오대근 회장은 “다른 동식물이나 미생물의 유전자를 넣어서 만들어진 개체만 GM이라고 보는 게 현재 국제 육종학계에 규정된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특정 형질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작물에 추가로 삽입된 유전자가 그 작물이 원래 갖고 있던 유전자면 GM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그냥 분자육종 작물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새로운 작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산화스트레스에 잘 견디는 유전자를 삽입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산화스트레스 저항성 유전자는 작물에도 들어 있지만 일부 세균도 갖고 있다. 해당 작물에 있는 산화스트레스 저항성 유전자를 추가로 넣으면 분자육종, 세균의 산화스트레스 저항성 유전자를 작물에 넣으면 GM이라고 보는 것이다.

분자표지를 이용하면 결국 GM이 아니냐고 오해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분자표지는 그 작물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일부분이다. 오 회장은 “특정 형질을 갖춘 개체를 좀 더 쉽고 빠르게 선발하려는 게 분자표지를 이용하는 핵심 목적”이라며 “분자표지는 분자육종의 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편에선 분자육종이 결국은 GM 작물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거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작물 자체가 가진 유전자만으로는 품질을 개량하는 데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분자육종의 발달에 따라 GM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회적 합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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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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