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만 년 전 인류의 생활방식이 수렵에서 농경으로 바뀌던 초기. 신석기인들은 집 주위에서 작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키우던 작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먹지 않고 남겨뒀다. 다음해 식량을 얻기 위해 종자로 심으려는 의도였다. 바로 이것이 육종(育種)의 시작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육종가는 이들 신석기인이다. 그들이 잡초와 같았던 작물의 조상을 지금처럼 농가에서 재배가 가능한 형태로 바꿔 놓았다. 현재 우리가 먹는 작물의 기본 틀이 바로 신석기인들의 작품인 셈이다.
녹두 신품종으로 연 1억 달러 이득
1974~1981년 필자는 대만에 있는 아시아채소연구개발센터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했다. 아시아의 10여 개국이 함께 만든 이곳은 채소 육종기술을 연구하는 세계 유일의 연구기관이다. 여기서 필자는 약 6년 반 동안 녹두 육종에 매달렸다.
기존 녹두 품종은 한 번에 익질 않아 여러 번에 걸쳐 수확해야 해서 농가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녹두를 한꺼번에 80%까지 수확할 수 있게 개량했다. 새로 개량한 품종은 땅을 기지 않고 서서 자라는 특성과 녹두 특유의 병인 백분병과 갈반병에 강한 특성도 함께 갖췄다.
‘중화녹두 1호’라고 이름 붙은 이 품종은 중국 전체 녹두 재배면적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됐다. 토착병이 워낙 강한 인도를 제외한 모든 아시아 국가에 수출됐고, 한국에도 ‘선화녹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1990년대 아시아채소연구개발센터의 한 경제학자는이 녹두 품종이 연간 1억 달러(약 1300억 원) 이상의 추가 이익을 창출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 녹두가 재배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볼 때면 6년 간 흘린 땀이 싹 씻기는 것 같다. 우리 육종기술의 우수성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말이다.

작물 육종은 한 나라 농업의 국제경쟁력을 결정한다. 또 농가의 수익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다. 현재 미국, 일본 등 세계적인 농업강국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육종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도 우수한 품종을 육성하고 보급하는 육종기술에 더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육종이란 현재 재배되는 품종보다 더 우수한 품종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농학 기술이다. 그러나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만 하면 소용이 없다. 새 품종을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선 종자를 생산해야 한다. 종자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각종 가공처리 과정도 거친다. 품종을 개량하는 기술 자체를 좁은 의미의 육종이라고 한다면, 종자를 생산·가공해 농민들에게 공급하는 과정 전체는 넓은 의미의 육종이다.
이 같은 육종기술 덕분에 생산성이 높은 다수확 품종과 기계화 재배에 적합한 품종, 1년 내내 생산이 가능한 품종, 더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는 품종, 병충해에 강한 품종, 맛과 모양이 좋은 품종, 영양성분이 추가된 품종, 운반이나 저장에 적합한 품종 등 다양한 신품종이 탄생했다.
한일강제합병 당시 한국의 벼 생산량은 300평(약 990㎡)당 120kg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은 면적에서 무려 4배가 넘는 약 500kg이 생산된다. 토지생산성이 이렇게 획기적으로 증가한 것은 새로운 품종 육성과 재배방법 개선 덕분이다. 지난 200여 년간 인류는 육종으로 개발한 품종을 재배해 거의 모든 작물의 토지생산성을 최소한 5, 6배 증가시켰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육종이 인류의 복지향상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감사해야 한다.
작물 육종의 성과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병충해에 강한 품종이다. 2005년 국내 채소 종자회사들은 역병에 강한 새로운 고추 품종을 다년간의 노력 끝에 개발했다. 이를 실제로 역병에 약한 품종과 함께 재배한 결과 새 품종 고추는 멀쩡하고 약한 품종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우리 육종가들은 이 결과를 ‘일석팔조(一石八鳥)’라 했다. 내병성 품종을 만들어 무려 8가지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생산량이 늘었고, 농약과 인건비가 줄었으며, 환경친화적이고 안전한 방법으로 작물을 재배하게 됐다. 또 작물의 부가가치가 높아졌고, 농가소득이 늘었으며, 종자가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육종기술의 키워드는 ‘교잡’
신석기시대부터 경험적으로 이어져온 육종이 과학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계기는 1900년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되면서부터다. 멘델 유전법칙을 활용한 방법이 ‘교잡(交雜)육종’이다. 서로 다른 품종을 교배하면 각기 다른 형질을 갖는 다양한 자손이 태어난다. 이들 가운데 우수한 것을 골라 다시 교배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확량은 많지만 병에 약한 품종 A와 수확량은 적으나 병에 강한 품종 B를 교배하면 수량은 많고 병에 강한 품종을 골라낼 수 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수백만 가지의 새로운 품종이 재배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95% 이상이 교잡육종 방식으로 육성됐다.
교잡육종은 여러 단계로 진행된다. 먼저 육종의 소재가 되는 유전자원을 수집한다. 이때 원칙은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여기서 두 품종을 골라 교배한다. 부계의 꽃가루를 모계의 암술머리에 묻혀주는 작업이다. 만약 교배 모본(母本)으로 선정한 양친이 100개의 유전자가 서로 다르다면 둘 사이에 태어나는 후손은 무려 2100가지나 된다. 단 한 번의 교배로 이렇게 다양한 후손이 생길 수 있다는 게 교잡육종의 장점이다.
다음 단계는 선발이다. 다양한 후손 가운데 가장 좋은 개체를 골라야 한다. 이것이 전체 육종과정 중에서 가장 오래 걸리며 육종가의 역량이 가장 많이 발휘되는 단계다. 우장춘 박사는 우수한 개체를 선발할 때 “잎의 앞면을 관찰하면서 뒷면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선발이 끝나면 지역 적응성 시험과 품종 등록, 종자 증식, 실제 재배 단계가 차례로 이어진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일부에서는 “교잡육 종은 과거의 방법이라 미래엔 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육종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생각이다.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다고 해서 바로 재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역마다 기후나 토양 같은 자연조건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바로 교잡육종이다. 그 지역에서 자라는 원래 품종과 새로운 품종을 교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나온 자손 중에 원래 품종이 해당 지역의 자연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갖고 있는 특성과 새로운 품종의 특성이 섞여 있는 개체를 선별해 재배하면 된다. 현재 약 1억 2500만ha(헥타르, 1ha=1만m2)에서 재배되고 있는 GM(유전자변형) 품종도 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
10년 이상 산고 끝에 새 품종 얻어
새로운 품종이 태어나는 과정은 어머니의 산고(産苦)와 같다. 어머니가 한 생명을 낳기까진 10개월의 잉태 기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한 품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보통 10년 이상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후지 사과 탄생에는 무려 29년이 걸렸고, 금싸라기 참외 육성에는 17년이라는 세월과 막대한 경비가 들었다.
오랜 산고의 과정이 필요한 육종학 연구는 빠른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과학계의 분위기에 밀려 위기를 맞고 있다. 땡볕 아래서 씨를 심고 작물을 가꾸며 손으로 일일이 꽃가루를 옮겨야 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보니 젊은 과학자들이 점점 육종학자의 길을 기피하게 됐기 때문이다. 연구논문 한 편 쓰는 데도 첨단 분자생물학이나 유전공학 같은 분야에 비해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린다. 논문 수는 현대 과학계에서 과학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대부분의 언론은 새로운 품종에 부과되는 로열티를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뤘다. 로열티가 불쌍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부당한 처사라고까지 극언할 정도였다. 새로운 품종이 하늘에서 거저 뚝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열티는 육종가의 기술과 노력에 대한 합당한 대가다.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처럼 로열티도 마땅히 지불해야 할 금액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돼야 할 것이다.
육종기술 자체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변신을 꾀하고 있다. 손으로 꽃가루를 옮기거나 화학물질을 처리하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첨단 생명공학 기법을 도입하려는 것이다. ‘분자표지’ 개발이 바로 좋은 예다. 교배로 얻은 자손이 어떤 형질을 갖고 있는지를 과거 육종학자들은 일일이 땅에 심어 성체가 될 때까지 키우고 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오래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분자표지가 있으면 작물이 다 자라지 않아도 특정 형질이 있는지를 어릴 때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을 훨씬 절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는 육종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육종은 우리의 식량 안보와 풍족한 삶을 보장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농학 기술이다. 육종 발전 없이는 그 나라의 농업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이해 한반도에도 육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효근 교수는 서울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식물육종학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중화녹두 1호’를 개발하며 40여 년 동안 농작물 육종가의 길을 걸어왔으며, 2004년 아시아태평양종자협회(APSA)에서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올 5월 다국적 식물생명공학기업들의 공동체인 크롭라이프코리아 대표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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