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면 차가운 덩어리가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달콤하다. 가볍다. 부드럽다. “맛있다!” 이처럼 ‘맛’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에는 미각세포가 느끼는 진짜 ‘맛’ 외에, 혀가 느끼는 여러 가지 물리적 촉감까지 포함돼 있다. 아이스크림의 가볍고 부드러운 맛의 비결은 거품. 빵, 맥주, 커피 같은 음식에도 다양하게 쓰이며 ‘먹는 맛’이라는 제2의 맛을 창조하는 식품 속 거품의 활약상을 만나보자.
맥주와 이산화탄소를 섞는 단백질
요즘 같이 더울 땐 시원한 생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낮 시간이라 아쉬운 대로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다. 워~워~ 캔을 따는 순간 거품이 치익 올라와 넘친다. 에이, 어디 거품 없는 맥주 없나? 생각해 보니… 없다.
맥주의 거품은 맥주를 맛있어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공기와의 접촉을 막아 맥주를 신선하게 유지한다. 또 거품이 있으면 맥주에 녹아 있는 탄산가스가 빠져나가지 않아 마셨을 때 톡 쏘는 맛이 살아 있다.
그런데 왜 맥주거품은 금방 꺼지지 않을까. 물에는 아무리 공기를 불어 넣어도 거품이 생기지 않고, 콜라는 컵에 따르는 순간 거품이 순식간에 꺼져 버리는데 말이다. 맥주에는 기포를 잡아두는 특별한 물질이라도 녹아 있는 걸까.
거품은 액체나 고체에 기체가 섞여 있는 상태다. 기체는 원래 액체나 고체와 잘 섞이지 않기 때문에 거품은 늘 불안정하고 쉽게 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품을 안정하게 유지시킬 방법이 있다. 기체와 액체, 또는 기체와 고체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줄 제3의 물질을 함께 섞는 방법이다.
서울산업대 식품공학과 장판식 교수는 “맥주에 거품이 생기려면 맥주와 기체를 섞어 주는 계면활성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액체에는 표면적을 최소화하려는 표면장력이 작용해 거품이 잘 생기지 않는데, 계면활성제가 이 힘을 줄여 액체와 기체가 섞이도록 돕는다는 설명이다.
맥주는 맥아를 끓여 만든 맥즙에 효모를 넣고 발효시킨 음료다. 하이트 중앙연구소 김태영 선임연구원은 “맥주에서 계면활성제 역할을 하는 물질은 맥주 원료인 맥아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이라며 “맥즙에 녹아 나온 맥아의 단백질이 발효과정에서 생긴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맥아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물과 친한 친수성 아미노산도 있고 물을 싫어하는 소수성 아미노산도 있다. 단백질에서 친수성 아미노산이 많은 쪽은 맥주(거품막)를 향하고 소수성 아미노산이 많은 쪽은 이산화탄소(기체 방울)를 향해 맥주와 이산화탄소가 섞인 상태, 즉 거품을 유지한다.
거품의 특성을 알면 원하는 양의 거품이 든 맥주를 골라 마실 수 있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보리로 맥주를 만들면 계면활성제의 힘이 강해서 거품이 많고, 흑맥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흑맥아는 당 함량이 높아 액체 자체가 끈적끈적하기 때문에 거품을 잡아 두는 능력이 더 좋다. 하지만 거품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맥주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첨가하는 ‘호프’라는 물질도 단백질이라서 거품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지만 특유의 쓴맛 때문에 많이 넣기는 힘들다.
맥주를 어떻게 따르고 마시냐에 따라서도 거품은 달라질 수 있다. 맥주를 높은 곳에서 세게 따르면 컵 속 맥주가 크게 요동치면서 맥주와 공기가 접촉하는 면적이 넓어져 거품 양이 많아진다. 반면 맥주잔을 기울여 부드럽게 따르면 상대적으로 거품은 덜 생긴다. 또 맥주를 차갑게 해서 마시면 거품이 잘 생기지 않는다. 낮은 온도에서는 표면장력이 크기 때문이다. 대신 일단 생성된 거품은 쉽게 꺼지지 않으므로 차가운 맥주의 거품은 오래간다.
거품이 풍성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마실 때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금물이다. 맥주 속 단백질은 각각이 사슬처럼 결합해 기체를 잡아 두는 힘이 더 크다. 하지만 립스틱의 지방 성분이 거품에 들어가면 지방 성분이 결합 사이에 침투해 단백질 사슬을 끊어 버린다. 즉 거품막이 약해져 금세 거품이 사라진다.
커 피 오 일 이 만 든 거 품 , 크 레 마
“난 ‘별다방’거 아니면 안 먹어”라는 친구. 커피 맛이 다 비슷하지 꼭 저렇게 까다롭게 군다. 커피를 주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에스프레소에는 크레마가 살아 있어야 향긋하다는 둥, 에스프레소에 생크림을 넣으면 맛이 부드럽다는 둥. 난 그냥 늘 마시던 순한 카푸치노로 마시련다.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높이가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잔에 커피 원액이 담겨 나온다. 이 쓴 것을 어떻게 마실까. 하지만 황금색 크림인 크레마가 잔잔하게 떠 있는 에스프레소야말로 커피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커피의 진수다. 에스프레소의 맛은 크레마가 좌우한다. 크레마는 그 자체가 부드럽고 달콤하다. 또 커피 향을 내는 성분인 커피 오일이 많아 마실 때 풍부한 향이 느껴진다.
커피전문점 리에스프레소 대표인 이승훈 바리스타는 “크레마는 원두의 지용성 성분인 커피 오일과 에스프레소 추출 과정에서 섞여 들어간 공기가 섞여 만들어진 거품”이라고 설명했다. 원두의 지용성 성분이 계면활성제 역할을 한 셈이다. 같은 원두라도 물을 부어 종이필터에 걸러서 먹는 드립커피는 이런 지용성 성분이 종이에 모두 흡수돼 버리고 수용성 성분만 걸러져 크레마가 생기지 않는다.
크레마는 커피에 쓰인 원두의 숙성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에스프레소는 곱게 간 원두 6~7g에 온도가 90℃ 정도 되는 물을 넣고 7~9기압(bar)의 압력을 가해 짜낸 용액이다. 원두는 보통 볶은 뒤 10~30일 정도 숙성된 커피콩을 쓴다.
볶은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원두 속에는 공기와 수분이 많이 남아 있어 크레마에도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크레마는 거품은 많지만 기포가 크고 금세 꺼져 버린다. 기체와 지용성 성분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거품에 기체만 너무 많아서다. 하지만 원두가 적절한 숙성기간을 거치면 원두 속에 있던 공기가 날아가 커피의 지방성분이 많은 끈끈한 크레마를 맛볼 수 있다. 이런 크레마는 부피는 작아도 기포가 작고 오래 유지되는 좋은 크레마다.
이 대표는 “원두가 신선하다고 해서 맛있는 크레마가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며 “김치를 일부러 숙성시켜 먹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덧붙였다.
커피 원액을 추출한 에스프레소가 부담스럽다면 생크림이나 우유가 들어간 카페라테나 카푸치노는 어떨까. 우유는 커피의 쓴맛을 중화시키고 고소한 맛을 더하기 때문에 커피와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부드러운 맛까지 더하고 싶다면? 정답은 역시 거품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카푸치노는 에스프레소 원액에 우유거품을 첨가한 커피다. 우유거품은 우유 속에 뜨거운 증기를 뿜어서 만든다. 우유에 공기가 들어가면 계면활성제 역할을 하는 우유 속 단백질 때문에 거품이 형성되는데, 이때 공기가 뜨겁기 때문에 거품을 형성한 모양대로 단백질이 굳어 버린다. 이미 굳어 버린 거품은 더 이상 증기를 불어 넣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생긴 거품은 그냥 우유를 저을 때 생기는 거품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사실 더 안정적인 우유거품이 있다. 바로 크림이다. 크림은 에스프레소의 크레마처럼 지방 성분이 계면활성제로 작용해 만들어진 거품이다. 생크림이나 휘핑크림은 우유의 지방 성분이 계면활성제 역할을 한다.
크림이 우유거품보다 더 오래가는 이유는 우유에 지방 성분이 더해지면 우유 속 단백질이 혼자 있을 때보다 거품 벽을 더 강화하기 때문이다. 거품을 지지하는 뼈대가 더 튼튼해진다는 뜻이다.
요즘엔 번거롭게 우유거품을 내지 않아도 거품이 가득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분말에 물만 부어도 거품이 가득 발생하는 인스턴트 커피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커피 혼합액에 이산화탄소나 질소 기체를 주입한 뒤, 순간적으로 높은 온도로 건조시키면 수분은 날아가지만 기체는 붙어 있다. 여기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으면 분말 원료가 녹으면서 기체가 방출된다. 이것이 인스턴트 카푸치노의 원리다.
왜 카스테라가 베이글보다 더 부드러울까
마침 카페엔 여러 종류의 빵을 팔고 있다. 크림치즈를 바른 쫄깃한 베이글을 먹을까,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둘 다 한 입씩 베어 무는데 갑자기 생긴 의문! 케이크는 왜 베이글보다 더 부드러울까.
베이글, 카스테라, 패스트리, 쿠키…. 전부 밀가루 반죽을 구워 만들었는데, 맛은 제 각각 다른 이유가 뭘까. 계란이나 설탕 같이 추가로 넣는 재료가 다를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식감, 즉 씹을 때 느껴지는 쫄깃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바삭바삭한 맛이 빵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빵의 씹는 맛을 좌우하는 요소가 바로 거품이다.
딱딱한 빵에 웬 거품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빵은 그 자체가 거품이다. 만드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간다. 담백하고 쫄깃한 베이글을 만드는 방법. 1단계, 밀가루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물과 반죽한다. 2단계, 빵 효모(이스트)를 넣어 반죽을 발효시킨다. 3단계, 부푼 밀가루 반죽을 오븐에 넣어 굽는다. 차암~ 쉽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2단계 과정이다. 밀가루 반죽에 넣는 이스트는 밀가루의 녹말 성분을 발효시켜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여기까지는 맥주 거품이 생기는 원리와 동일하다. 그런데 빵은 굽는 과정에서 알코올은 대부분 날아가고 이산화탄소만 남아 밀가루의 글루텐 단백질에 달라붙는다. 글루텐 단백질이 계면활성제로 작용해 이산화탄소를 잡아둔 결과 반죽과 이산화탄소가 균일하게 섞인 거품이 탄생한다.
하지만 케이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카스테라는 약간 다른 거품이다. 카스테라는 이스트 대신 계란 흰자를 이용한다. 계란 흰자를 노른자와 분리해 거품을 낸 뒤 밀가루를 넣고 거품이 꺼지지 않게 살살 섞는다. 그대로 구워 내면 부드러운 카스테라 완성! 흰자 속 단백질이 계면활성제로 작용해 거품을 형성한다. 단 흰자에 노른자가 섞여 들어가면 노른자의 지방 성분 때문에 거품이 잘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베이글과 카스테라는 모두 밀가루를 사용해 만든 거품(고체 거품)이지만 계면활성제 역할을 하는 물질이 다르기 때문에 식감이 다르다. 계란 흰자로 만든 거품은 부피가 크고 거품 벽이 약한 반면, 클루텐 단백질로 만든 거품은 부피가 작고 거품 벽이 단단하다. 카스테라가 베이글보다 부드럽고 같은 크기라도 더 가벼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술떡, 계란찜, 아이스크림도 모두 빵과 같은 고체 거품이다. 쌀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가 쌀의 단백질에 붙어 거품이 들어간 술떡, 계란을 휘젓는 과정에서 섞여 들어간 공기와 계란의 단백질이 거품을 이룬 상태로 굳어 버린 계란찜, 지방 성분이 많은 우유거품을 얼려 놓은 아이스크림까지…. 식품 속 거품은 무궁무진하다. 거품의 화려한 변신은 계속된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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