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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체 거품 삶의 질 높인다

소음 적은 당산철교의 비밀

3Träume sind Schäume.

‘꿈은 물거품과 같다’란 뜻의, 단어 각운의 맛을 살린 독일 속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품은 ‘덧없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풍성한 것 같지만 속이 텅 비어 있고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 방울이 하나둘 터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품은 열역학적으로 안정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일시적인 존재이지만 거품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긴요하게 쓰이고 있다. 때로는 거품이 심각한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다. 존재감이 안 느껴지지만 없으면 빈자리가 큰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존재인 거품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샴푸로 머리 감기 편한 이유

1937년 물도 거품도 필요 없는 전기면도기가 첫선을 보였다. 매일 아침 얼굴과 목에 허연 거품을 칠하고 거울 앞에서 면도기를 든 손을 놀리던 번거로움이여 안녕. 신문이나 TV를 보면서도, 잠이 덜 깬 채 침대에 누워서도 전원 버튼만 누르면 ‘윙 윙 드르륵 드르륵’ 날 돌아가는 소리와 털이 잘리는 소리가 합창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거품면도를 고수하고 있다. 전기면도기를 쓰다 거품면도 ‘맛’을 보고 전향한 사람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셰이빙 폼(shaving foam, 면도용 거품)을 쓰면 면도 중에 피부의 수분을 유지시킬 뿐 아니라 털 사이에 들어가 털을 세우는 역할도 합니다. 그 결과 피부손상도 적고 털이 쉽게 깎이죠.”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 백두현 연구원의 설명이다. 맨살에 면도날이 닿을 경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미세한 상처가 많이 난다. 따라서 피부가 약한 사람들은 전기면도를 하고 난 뒤 피부가 벌게지거나 염증이 잘 생긴다. 그런데 캔을 몇 번 흔들었다 버튼을 누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고운 거품이 쉽게 생기는 걸까.

“평소 세워 둔 캔 속에는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는 수용액과 고압으로 액화된 탄화수소(프로판과 부탄)가 두 층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캔을 흔들어 용액을 섞은 뒤 버튼을 누르면 좁은 틈이 열리면서 기압 차이로 내용물이 빠져나갈 때 탄화수소가 기화되며 미세한 거품이 형성됩니다.” 셰이빙 폼의 거품은 지름이 0.1mm 수준의 미세한 크기라 피부나 털에 잘 달라붙는다. 계면활성제의 종류와 양을 달리해 거품 크기를 조절한다.

머리를 감을 때도 거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샴푸 역시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는데, 젖은 머리에 샴푸액을 바르고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기만 해도 머리 전체에서 쉽게 거품이 인다.

“만일 거품이 안 난다면 머리를 감기 꽤 어려울 겁니다. 머리카락 사이에 거품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쉽게 머리를 감을 수 있는 것이죠.” 거품을 비롯해 다양한 표면현상을 연구하고 있는 한경대 화학공학과 김영호 교수의 설명이다.

재해 잠재우는 거품

거품은 생활용품뿐 아니라 다양한 범위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유류, 즉 기름에 불이 붙었을 때는 물로 끄기 어렵다. 기름이 타는데 물을 부어 봤자 비중이 큰 물 위로 기름이 뜨면서 오히려 불이 넓게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포말 소화기가 제격이다. 포말 소화기는 셰이빙 폼과 원리가 비슷한데, 탄화수소 대신 이산화탄소가 압축돼 있다.

소화약제를 연구하는 호서대 안전보건학과 정기창 교수는 “불붙은 기름에 포말 소화기를 뿌리면 기름 위에 거품이 덮이면서 공기 중의 산소를 차단시킨다”며 “또 거품 속에는 이산화탄소 기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연소를 방해한다”고 설명했다. 거품은 탄저균 분말 살포 같은 세균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유용하다. 분말이 퍼지기 전에 거품을 뿌려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폐수 처리나 중금속 제거 과정에서도 거품이 쓸모가 많다. 김영호 교수는 “물속에 퍼져 있는 미세한 기름 입자나 중금속 입자를 분리해 모으기가 쉽지 않은데, 이때 거품을 일으키면 거품 표면에 이들 입자가 달라붙는다”며 “그 뒤 물 표면 위로 뜬 거품을 걷어내기만 하면 오염물질을 쉽게 분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석유를 채취하는 유정이나 기름에 오염된 토양의 정화에서도 거품을 유용하게 쓴다. 유정이나 토양에 거품액을 집어넣으면 암석 틈새에 끼어 있는 기름까지 수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품 잠재우는 소포제

생활 곳곳에서 거품이 유용하게 쓰이지만 때로는 거품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빨래비누나 세탁세제처럼 옷감에 묻은 때를 벗겨내는 제품은 계면활성제가 주성분이다. 그런데 손으로 옷감을 치대거나 세탁기가 돌아가다 보면 물과 공기가 섞이게 되고 결국 거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손빨래를 할 때는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세탁기의 경우 거품이 계속 만들어져 뚜껑 밖으로 넘치면 골치가 아프다. 라면을 끓일 때 스프를 넣고 냄비 뚜껑을 덮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생각하면 된다.

한경대 화학공학과 김영호 교수는 “화학공장에서 일어나는 반응 가운데서도 거품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대로 방치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며 “따라서 거품이 잘 생기지 않도록 하는 물질을 넣어야 하는데, 이를 소포제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거품
을 없애려면 거품 막을 얇게 해 터뜨려야 한다.

“물이 반쯤 들어 있는 생수병도 막 흔들고 나면 순간이지만 위에 거품이 생깁니다. 거품이 바로 터지는 이유는 거품 막이 급격히 얇아지기 때문이지요.” 중력 때문에 막을 이루는 액체가 아래로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막의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모세관 현상도 관여해 거품 막이 얇아진다. 거품을 보면 방울 2개가 만나는 막 표면은 거의 평면인 반면, 3~4개가 만나는 지점은 막 표면이 곡면이다. 막에서 방울 내부로 향하는 압력(모세관압)은 표면의 곡률반지름에 반비례한다. 반면 방울 안 기체의 압력은 일정하다. 따라서 표면이 평평한 막은 양쪽에서 눌려 액체가 주변으로 빠져나가면서 얇아지는 것.

김 교수는 “물뿐 아니라 알코올이나 휘발유처럼 순수하거나 구조가 비슷한 분자들이 모여 있는 액체의 경우 이런 현상 때문에 막이 금방 터져 거품을 좀처럼 볼 수 없다”며 “하지만 계면활성제가 들어가면 거품막이 점성과 탄성을 띠면서 얇아지지 않기 때문에 거품이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소포제는 계면활성제의 이런 작용을 무력화시키는 물질이다. 대표적인 소포제로는 소수성 실리카 입자가 분산된 실리콘 오일이 있다.

실리콘 오일은 점도가 낮고 산소원자가 포함돼 물 분자와 직접 닿을 수 있어 물방울이나 거품 표면에 신속하게 퍼진다. 실리콘 오일이 계면활성제를 밀어내 거품 막 양쪽에 실리콘 오일이 덮이면 소수성 실리카 입자가 물과 직접 닿는다. 이렇게 되면 물 분자들은 표면적을 줄이는 방향으로 재배치되고 그 결과 거품 막은 불안정해져 터진다. 김영호 교수는 “거품을 관리하는 건 여러 산업 분야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며“거품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데 관여하는 여러 분자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명확히 이해하면 좀 더 효율적인 공정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에 뜨는 돌, 비누, 알루미늄

거품을 엄밀히 정의하면 기체를 감싸고 있는 액체 막이 모여 있는 구조이지만 액체가 굳어 고체가 된 형태도 여전히 거품이라고 말한다. 물에 뜬다고 해서 이름도 부석(浮石)인 돌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고체 거품이다. 납작한 돌을 솜씨 좋게 던져도 몇 차례 물 위를 튀다 결국은 잠기는 게 고작인데, 설마 돌이 물에 뜰까. 부석을 쪼개 자세히 보면 빵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어떻게 이런 돌이 만들어졌을까.

탄산음료 병뚜껑을 따면 압력이 낮아지면서 음료수에 들어 있던 이산화탄소가 방울을 만들며 올라와 표면 위에 거품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땅속에 녹아 있는 마그마가 지표로 노출될 때 기체가 빠져나오면서 거품을 만든다. 그런데 마그마 거품이 터지기 전에 식어 굳으면 결국 지표면 쪽의 돌들은 기체를 잔뜩 머금은 고체 거품, 즉 부석이 된다. 공기를 많이 머금은 경우 비중이 0.25(물은 1)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물에 뜨는 비누’로 유명한 ‘아이보리’(Ivory)는 1879년에 탄생해 올해로 130주년을 맞았다. 비누를 개발하던 한 직원이 실수로 비누원료를 너무 오래 끓여 거품째 굳어 버린 비누를 만든 게 시초라고 한다. 물에 넣으면 뜨는 건 눈에는 잘 안 보이는 미세한 거품 때문에 가벼워져서이고, 제품명인 뽀얀 코끼리 상아색(ivory)도 미세거품이 빛을 산란시켜 생겨난 효과다. 손안에 쥐고 문지르면 고체 거품이 녹아내리면서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지고 풍부한 물거품이 만들어진다.

지난 2004년 제조사인 미국계 생활용품회사인 P&G는 아이보리 비누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표했다. 당시 발명자인 제임스 갬블의 연구노트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그가 비누를 물에 띄우려고 시도한 기록을 발견한 것. 탄생과정이 실수였든, 의도적이었든 아이보리 비누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히 보는 고체 거품은 ‘스티로폼’이라는 상표명으로 더 알려진 발포플라스틱이다. 폴리스티렌 합성수지를 녹인 뒤 공기를 넣어 거품을 만든 뒤 굳힌 형태인 스티로폼은 90% 이상이 공기여서 가볍지만 플라스틱 막이 틀을 이루고 있어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다. 스티로폼을 누르면 탄성이 느껴지는데, 안에 갇혀 있는 공기가 눌리면 압력이 올라가면서 반발하기 때문이다. 포장박스를 열어 보면 그리 두껍지 않은 스티로폼이 전자제품을 감싸고 있는 게 전부인데도 운반과정에서 별 탈 없는 이유다.

플라스틱은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발포플라스틱은 냉난방에 필요한 에너지소비를 크게 줄일 수 있는 건축자재다. 열전도도가 낮은 공기가 부피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단열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포플라스틱은 화재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런데 에어로젤(aerogel)이라는 신소재가 등장해 단열재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에어로젤은 일종의 유리 거품으로 두께 10nm(나노미터, 1nm=10^-9m)의 실리카(이산화규소) 막이 지름 50nm의 기체를 감싸는 나노구조체다. 기체가 90% 이상으로 단열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기재료 소재라 불꽃이 닿아도 녹아내리지 않는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열을 막는 단열재로 에어로젤을 썼다.

최근 에어로젤 분말 양산 기술을 개발한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안영수 박사는 “에어로젤은 단열성이 뛰어난 안전한 소재이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에 널리 쓰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즉 유리에 에어로젤을 얇게 코팅하면 투명도는 유지하면서도 뛰어난 단열효과를 볼 수 있고 옷에 쓰면 얇고 가벼운 겨울옷도 만들 수 있다.

묵직한 견고함의 대명사인 금속도 거품으로 변신하고 있다. 비중이 2.7로 금속치고는 가볍지만 물보다는 무거운 알루미늄이 금속 거품으로 즐겨 쓰이는 재료다. 알루미늄 가루에 티타늄수소화물(TiH₂)을 섞고 녹이면 수소기체(H₂)가 생기면서 알루미늄 거품이 만들어지는데, 알루미늄 거품은 기체함량에 따라 비중이 0.2~0.3에 불과해 물에 둥둥 뜬다.

알루미늄 거품 제조법을 연구하는 경상대 재료공학부 허보영 교수는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는 당산철교를 보면 알루미늄 거품이 설치돼 있어 충격과 소음을 흡수한다”며 “현재 자동차 범퍼에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루미늄을 비롯한 금속 거품은 비행기나 선박처럼 강도는 유지하면서도 무게가 가벼울 경우 비용이 크게 절감되는 분야에 점차 적용되고 있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거품이 한몫하는 셈이다.
 
 
거품 없인 못 살아!

지금은 하천이 많이 정비됐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커먼 물에 거품이 둥둥 떠다니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생활하수나 공장폐수에 섞여 있는 계면활성제가 거품을 유지시켜 생기는 현상이다. 보기도 안 좋을뿐더러 물과 공기를 차단해 용존 산소량을 떨어뜨려 수중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이 됐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거품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스스로 거품을 만들어 덕을 보는 녀석들도 있다.

이름부터 ‘거품벌레’인 노린재목(目)에 속하는 곤충은 거품 없이는 생존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곤충생태를 연구하는 충북대 식물의학과 조수원 교수는 “거품벌레 애벌레는 배 아래쪽에 긴 홈이 있어서 공기를 포획해 거품을 만들어낸다”며 “이 녀석들은 거품을 이용해 몸을 숨기기도 하지만 적당한 온도와 충분한 습도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곤충처럼 몸이 작아 부피에 비해 표면적의 비율이 높은 생명체는 탈수가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두꺼운 겉껍질(외골격)에 둘러싸여 있다. 거품벌레 애벌레는 대신 거품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한 셈인데, 거품을 없애면 얼마 못 가 말라 죽는다.

양서류인 개구리 가운데서도 거품에다 알을 낳는 종류가 있다. 주로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 사는 종들인데, 퉁가라 개구리(tungara frog)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녀석은 물가에 풍성한 거품둥지를 만든 뒤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잘 꺼지지 않는 거품은 그 속의 알이 부화할 때까지 숨겨줄뿐더러 미생물 감염도 막아준다.

영국 글래스고대 생태학·진화생물학과 말콤 케네디 교수팀은 퉁가라 개구리가 물이 없는 샬레 위에 거품둥지를 만들게 한 뒤 관찰했더니 3일 뒤에 올챙이들이 무사히 부화했다. 연구자들은 “거품둥지가 오랫동안 거품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렉틴을 포함해 여러 단백질이 거품 표면을 안정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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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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