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인 유전자:‘자유’로 꿈틀대는 ‘상상’ 에너지
예술가로 변신한 과학자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KAIST 출신이 예술가로 거듭나다니 이색적인 경력이 아닐 수 없다. 이진원 교수는 경기과학고 재학 시절 열정적이었던 화학 선생님에게 매료돼 자연스레 화학을 전공한 ‘100% 과학도’였다. 그러다 우연히 대금을 배우고 KAIST에 국악동아리 ‘떠이어니레’를 만들면서 전통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는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직접 자료를 모아 ‘퉁소연구’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KAIST 대학원을 1년만에 그만두고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전통음악 분야의 개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인문학자로서 과학적 방법론의 유용함을 더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는 이 교수. 그는 과학과 예술, 두 영역을 아우르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지닌 게 분명하다.
우주로 펼친 상상력
박성동 쎄트렉아이 사장
지난 7월 과학기술부는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입주해있는 ‘쎄트렉아이’를 ‘첨단기술기업’으로 선정했다. 쎄트렉아이는 19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을 쏘아올린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출신의 연구원들이 창업한 벤처기업이다.
국내 항공우주산업에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쎄트렉아이, 그 중심에 박성동 사장이 있다. 그는 KAIST 1회 입학생으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무렵 우연히 인공위성 제작 프로그램에 참여할 학생을 뽑는 유학설명회에 간 것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그는 영국 서리대에서 3년간 위성통신공학을 공부하며 우리별 위성을 만들기 위한 밑거름을 차곡차곡 쌓았다. 박 사장은 “누가 보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위성 제작을 성공적으로 끝낸 것처럼 꿈꾸는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KAIST인은 진화한다
김경수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김경수 교수와 KAIST의 질긴 인연은 학부 3년, 석사 2년, 박사 4년을 합치면 전부 9년이다. 전국에서 날리던 인재가 모인 KAIST는 공부하기도, 적응하기도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 무한경쟁을 경험하며 처음으로 생존법칙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2년만에, 대학을 3년만에 조기졸업하고 병역특례까지 받다보니 남들보다 4~5년 앞선 삶을 살았습니다. 사회 어딜 가나 경력에 비해 나이가 어려 막내 대접을 받았죠.”
올해 3월 드디어 KAIST 기계공학과로 돌아온 김 교수는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예리한 질문을 퍼붓는 신세대 KAIST인에게 무척 놀랐다”면서 “많은 학생들이 기계공학동 1층 로비에 있는 피아노를 치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했다. KAIST의 ‘지성’ 유전자가 상상력을 품으며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당당한 리더가 되라!
임수경 LG CNS 상무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KAIST를 선택했다. 프로젝트 중심의 교육, 전공 교수가 실험실을 독자적으로 이끌어가는 시스템은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LG CNS 임수경 상무는 KAIST에서 산업공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4시간 개방하는 도서관과 실험실, 기숙사 덕분에 자신의 생활 패턴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동시에 24시간 불 꺼지지 않는 학교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교수님과 친구들에게 자극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입학할 당시 전교생 500명 가운데 여학생은 고작 9명. 혹시 불편한 점은 없었냐는 질문에 “오히려 남자 동기와 선배들이 더 잘 챙겨줬다”고 말했다. “여러분이 KAIST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KAIST인은 당당합니다. 그리고 늘 도전합니다.”
포스테키안 유전자 : 열정과 고집의 최강 ‘300’
쇳물만큼 뜨거운 열정과 고집
배진찬 포스코 파이넥스2공장장
포스코가 15년의 노력 끝에 세계 최초로 용광로 없이 쇳물을 뽑아내는 친환경 파이넥스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그날 배 공장장의 가슴도 쇳물만큼 뜨거웠다. 1990년 포스코에 입사한 뒤 지금껏 파이넥스 공법 개발의 외길을 걸어온 그는 지난 5월 30일 현장지휘관 공로로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배 공장장의 이런 우직함은 포스텍 재학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활 습관이다.
오픈북이나 오픈노트 방식으로 시험을 보면서도 시험 감독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장소에 구애 받지 말고 다음 날 몇 시까지 답안을 작성해 제출하라는 시험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공부했던 동료 모두는 미련할 정도로 양심을 지켰다. “이런 고집이야말로 포스테키안 모두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가 아닐까요?” 파이넥스 공장에서 나오는 쇳물에는 이런 그의 열정과 고집이 녹아있다.
포스텍과 KAIST의 해킹전 문제출제자
이희조 고려대 컴퓨터통신공학부 교수
이 교수는 포스텍 재학 시절부터 이름 날리던 ‘해커 잡는 해커’였다. 포스텍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이 교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당시 구경조차 힘들었던 워크스테이션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해줬고, 그가 해킹보안동아리 PLUS를 만들 때는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교수가 포스텍에서 컴퓨터보안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안철수연구소의 기술총괄이사로 재직하던 2002년부터 KAIST와 포스텍 학생들이 ‘사이언스 워’의 백미라 부르는 해킹전의 출제를 맡고 있다. 두 학교에서 각각 9명씩 선발된 컴퓨터 ‘고수’들이 이 교수가 만든 가상의 시스템에서 해킹 실력을 겨룬다.
“학생들의 실력과 열정에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나라의 정보보안체계를 만들 꿈나무들이죠.” 후배들을 떠올리는 이 교수의 입가에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공학인의 피가 흐르는 금융인
황지영 넥서스투자 선임심사역
그동안 대학 캠퍼스를 많이 다녀봤지만 포스텍 만한 데가 없었단다. 외국의 조용한 시골마을 같이 아늑한 캠퍼스와 기숙사. 둘러보기만 해도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던 최첨단 연구시설에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황 심사역은 포스텍 캠퍼스를 처음 방문했던 1994년 고등학생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포스텍 생명과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다가 답답한 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2000년 초 현대기술투자 바이오분야 투자심사역으로 입문했다.
“공학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투자도 늘고 인재가 많이 모이죠. 그래야 공학이 진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튼튼한 바이오 기업을 키워내는 게 제 꿈입니다.” 국내 바이오 분야 벤처캐피털리스트 선두주자 중 한 명인 그에겐 여전히 공학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위험감수 유전자’를 타고난 포스테키안
정태흠 미국 렉산파마슈티칼스 재무담당 부사장
“포스텍 출신들은 ‘위험’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존의 명문 대학을 뒤로하고 가능성 하나 믿은 채 지방에 신설된 포스텍을 선택했으니까요. 포스테키안에게는 ‘위험감수’(risk taking) 유전자가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정 부사장에게 포스텍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할 가장 확실한 투자처였다. 그는 재무책임자답게 유명한 투자의 법칙으로 이를 설명했다. ‘No risk, no gain’. 위험 부담 없이 큰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정 부사장은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기존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무언가 추구하는 능력을 얻었다.
벤처캐피탈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1997년 투자업계에 입문해 한국 최초로 바이오전문펀드를 만들고, 2002년부터 항암제 신약후보물질을 5개나 개발한 미국 렉산파마슈티칼스사의 재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 원동력이다.
정 부사장은 “탄탄한 우량주가 된 포스텍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블루칩 인재’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희망했다.
20년 뒤 사회에 기여할 인물이 모인 곳
KAIST가 잘 되면 나라가 잘 산다!
KAIST 총장 서남표
2006년 7월 KAIST의 수장이 된 서남표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폈다.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낸 교수에게는 정년보장이라는 ‘당근’을,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퇴출이라는 ‘채찍’을 안겨주는 영년직 교수제를 도입했고, 평점이 2.0 밑인 학생에게는 수업료를 내도록 했다. 한국인 엔지니어의 고질병인 영어 장벽을 허물기 위해 올해부터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시켰다.
2008학년도 입시전형부터 심층적인 인성면접을 도입하기로 한 배경에도 이러한 개혁 의도가 숨어있다. 서 총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20년이 지난 뒤 과연 누가 성공하고 사회에 기여할지에 초점을 맞춰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긍정적인 자세를 지니고 협동할 수 있는 성격, 남들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창의성, 특별한 영재성, 리더십 등 5개 항목에서 인성을 고루 평가하겠다는 의도다.
KAIST는 미국의 MIT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MIT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의 교수를 지낸 서 총장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공대를 중심축으로 성장한 MIT는 연구 중심 대학이며 교수가 산업현장으로 뛰어들길 마다하지 않는, 창업이 활발한 대학이다. 이는 KAIST도 마찬가지다.
현재 KAIST는 MIT처럼 교수 한 사람이 1주일에 3시간만 강의한다. MIT가 미국 사회와 기업에서 환영 받는 인재를 1년에 1000명씩 배출한다면 KAIST 역시 매년 700명의 학부 졸업생을 배출하며 대한민국 이공계의 인재양성소로 자리매김했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은 KAIST의 전체 학생 수는 MIT의 70%이지만 교수 인력은 40%, 예산은 15%에 불과하다는 것. 서 총장은 앞으로 5년간 현재 420명인 교수를 700명으로, 700명인 학부생 정원을 1000명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정부로부터 받는 예산도 2배로 끌어올릴 각오인데, 가능성이 있고 성과가 좋은 곳에 집중 투자해야 세계 최고의 대학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Is it good for KAIST?”라고 묻는다는 서 총장은 ‘KAIST가 잘 되면 대한민국이 잘 된다’는 생각으로 지금도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조이고 있다.
21세기 이공계 명품인재 포스테키안
청년 포스텍의 질주를 주목하라
포스텍 총장 박찬모
포스텍은 지난해 20세를 맞는 성인식을 치렀다.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를 모델로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세워진 포스텍이 국내 대학평가 수위를 다투는 대학으로 잘 성장한 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박 총장은 포스텍이 30대 중반쯤 되는 2020년, 포스텍을 세계 20위 대학으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를 담은 ‘비전 2020’을 야심차게 선포했다.
박 총장은 먼저 교수의 연구와 학생 교육,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행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대학운영시스템인 포비스(POVIS)를 지난 2월 도입했다. 도시개발을 할 때 건물을 세우기 전에 먼저 도로를 놓듯 청년 포스텍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길을 탄탄하게 닦아놔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여기에 선배가 후배를 도와주는 멘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국제화를 앞당기기 위해 포스텍국제관을 건립하며 포스텍의 ‘소수정예 명품교육’을 좀더 강화하기로 했다.
포스텍은 개교 이래 학부 입학생 정원을 300명으로 그대로 유지하며 산학이 원하는 고순도 ‘엑기스’ 인력을 배출해왔다. 박 총장은 “전체 1%에 해당하는 소수의 과학영재를 모아 세계 과학기술계를 이끌 0.1% 수준의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앞으로도 입학정원을 늘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현재 포스텍 졸업생의 취업률은 300%가 넘는다. 한사람이 평균 3군데 회사에서 취업 제안을 받는다는 뜻이다. 또 지금까지 포스텍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1300여명에 불과하지만 이 가운데 250여명이 국내외 대학교수로 임용됐다.
박 총장은 포스텍이 지방에 있고 교수들이 공부를 많이 시킨다는 사실 때문에 오기를 주저하는 학생들에게 “명품 인재가 되려는 학생이라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며 일침을 놨다.
오는 9월 임기를 마치고 평양과학기술대 로 자리를 옮길 예정인 박 총장은 차기총장에게 “외국인 학생과 우수교수를 더 영입하고 영어강의를 확대해 포스텍이 국제적인 대학이 되는데 힘을 실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청년 포스텍의 질주를 주목하라”고 힘주어 말하는 박 총장의 말에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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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공계 쌍두마차 KAIST VS. 포스텍
PART1 비교체험 KAIST vs. 포스텍
PART2 있다! 없다! BEST 5
PART3 선배가 말하는 우리 대학 유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