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끼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채우는데 3초면 되지만 아래에서 위로 채우면 7초나 걸린다.” 19세기 말 미국의 프랭크 길브레스는 ‘순간의 아버지’였다. 그는 사람의 동작을 카메라로 찍어 동작 하나마다 걸리는 시간을 일일이 분석했다. 당시 카메라가 사람이 손으로 크랭크를 돌려 찍는 방식이라 컷의 간격이 일정치 못하자 0.03초까지 잴 수 있는 마이크로크로노미터라는 시계를 직접 만들어 동작과 시계를 화면에 같이 담아 분석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매 순간 동작을 분석한 이유는 불필요한 동작에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17살에 벽돌공이었던 그는 벽돌을 쌓는 18가지 동작을 5가지로 줄였고, 그 결과 1시간에 120개에서 350개를 쌓을 수 있게 됐다. ‘순간이 돈’이라는 명제를 글자 그대로 증명한 셈. 길브레스가 30살에 건설회사 사장이 된 것은 물론이다.
순간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곳은 스포츠 경기다. 박찬호의 손끝에서 백팔번뇌의 과정을 거친 야구공이 출발해 타자의 방망이를 때리기 직전까지 0.47초의 짧은 순간, 그리고 방망이에 맞고 튕겨 나오기까지 0.001초 순간에 홈런과 스트라이크가 판가름 난다. 100m 육상에서는 0.01초 차이가 세계 신기록을 갈아 치운다. 거칠고 과격해 보이는 축구에서도 상대보다 0.01초 먼저 발을 움직여야 공을 뺏기지 않고 골문을 두드릴 기회가 생긴다.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기는 첫인상도 마찬가지다. 첫인상은 대개 2~3초 안에 결정된다. 1960년 미국 대선 당시 닉슨 후보와 케네디 후보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닉슨보다 더 자신 있고 박력 있는 모습을 보인 케네디는 순식간에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순간은 역사를 새로 쓰기도 한다.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그 순간 토끼와 계수나무가 있던 달은 전설이 됐고,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한 순간 인간의 염기서열을 읽어내는 생명과학 혁명이 시작됐다.
무릎을 탁 치며 ‘유레카’를 외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과학이 만들어졌다. 1665년 사과나무 아래에서 달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뉴턴 앞에 사과 하나가 떨어지던 바로 그 때 그의 머리를 스쳐간 생각이 20여년 뒤 만유인력법칙의 씨앗이 돼 과학혁명을 불렀다. 1854년 교과서를 집필하다 잠깐 잠이 든 케쿨레가 원자가 뱀처럼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꿈을 꾼 순간 19세기 화학에서 가장 큰 의문이었던 벤젠화합물 구조의 실마리가 풀렸다.
따지고 보면 언제든 ‘결정적 순간’ 은 있었다. 마치 영화가 초반부에 관객에게 의문만 잔뜩 던져주며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반전을 터뜨리며 모든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순간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유독 그 순간을 ‘결정적’이라고 하는가.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효과는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1972년 워싱턴시에서 열린 과학진흥협회에서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논문을 발표한 데서 나왔다.
로렌츠는 날씨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비의 날개짓을 빌렸지만 이제 나비효과는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모든 경우를 일컫는다. 나비가 한번 날개짓하는 0.03초의 아주 작은 찰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을 낳아 거대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예컨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 있는 원자시계 NIST-7은 100만년 동안 단 1초의 오차가 생길 뿐이다. 도대체 이렇게 정확한 순간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시는 NIST-7을 이용해 교통 신호를 작동시킨 결과 교통 정체를 해결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짧은 순간이 도로를 따라 연결된 수천 개의 신호등에 차례차례 영향을 미쳤고 급기야 차량의 흐름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네트워크로 하나 되는’ 요즘 순간의 위력은 날로 더해지고 있다. 누군가 휴대전화로 메시지 한 통만 보내면 마치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순식간에 수천 수만 명에게 정보가 퍼진다. 플래시 몹이 가능해진 것도 이 때문. 인스턴트 메시지는 그 순간의 생각과 그 순간의 느낌을 세계 어디에 있든 상대방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순간을 선택할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순간만 골라서 남길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맘에 들지 않는 순간을 손쉽게 지우고 새로운 순간을 포착해낸다.
1997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립대 심리학과 로버트 레빈 교수는 나라별 삶의 스피드를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다. ‘빨리빨리’로 유명한 한국은 의외로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걷는 스피드 20위, 우체국의 일 처리 20위, 시계 정확도 16위로 전체 순위 18위를 차지했다. 스위스가 1위를,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은 각각 4위와 2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한국 인구의 78%가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대학 캠퍼스에선 잔디밭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초고속 무선 랜으로 인터넷을 즐기는 광경이 낯설지 않다. 우리의 삶이 더 짧은 순간을 추구하며 스피드를 높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구리 회선 대신 빛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회로기판을 개발해 컴퓨터의 처리 속도를 높이는 연구를 발표했다. 아예 양자컴퓨터를 만들면 몇 년을 걸려 계산할 수 있는 것을 단 몇 초 만에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은 슈퍼컴퓨터로도 계산하기 힘든 날씨나 은하, 행성의 운동을 간단히 알 수 있다. 순간이 세상을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원래 불교에서 한 찰나는 10-18을 나타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미 펨토초라는 0.000000000000001초(10-15초)와 아토초(10-18초)를 넘나들며 찰나에 다가가고 있다. 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순간은 1초인가, 0.1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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