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겐 꿈이 하나 있었다. 무대에서 제대로 된 실시간 연주를 한번 해 보는 것. 지휘봉 대신 조이스틱을 든 연주자, 무대를 가득 메운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 대신 몇 대의 미디(MIDI), 그리고 스크린 속 또 다른 연주자와 함께 빚어내는 디지털 사운드의 황홀한 앙상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그 꿈이 이뤄졌다. 서울, 대전, 부산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콘서트’가 세계 최초로 시도됐다. 각 연주회장에 있던 연주자는 네트워크에서 매순간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영상과 사운드를 통해 서로를 보고 맞춰가며 공간을 초월한 합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전송 속도가 0.1초라도 어긋난다면?
여기도 저기도 리얼타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장재호 교수는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시간차가 있어서 네트워크 콘서트에서는 간단한 신호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디의 경우 음 하나는 숫자 3개로 이뤄진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전달된다. 실제 피아노나 플루트에 가까운 풍부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디에서 사용하는 음의 수가 많아야 한다. 그만큼 네트워크가 실어 보낼 정보량은 늘어난다. 장 교수는 “많은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실시간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실시간 연주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비단 음악만이 아니다. 요즘 ‘잘나가는’ 기술 치고 ‘리얼타임’(실시간)이라는 수식어가 안 들어간 것이 없다. 바둑을 두듯 내가 한번 컴퓨터가 한번 번갈아 가며 게임을 즐기는 턴방식의 온라인 게임은 스타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진화했다. 배틀넷에서 게이머들이 일대 일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진행하는 실시간 게임은 e스포츠라는 새로운 분야까지 탄생시켰다.
실시간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트리밍 기술이 없었다면 ‘벅스’가 저작권 문제로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7월 1일 국내에서 열린 DMB 영화제도 영상과 음성을 바로바로 전송하는 실시간 멀티미디어 스트리밍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 행사였다.
비행기나 우주선 등 0.01초의 시간차가 안전 문제로 직결되는 곳에서는 하드 리얼타임 시스템이 쓰인다. 여기서 ‘하드’는 정확한 시간에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 만약 비행기에서 날개의 표면 형태를 바꾸려고 하는데 컴퓨터의 응답 시간이 1초나 걸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즘 하드 리얼타임 시스템은 세탁기에도 적용된다.
리얼타임이 독도를 지킨다. 오는 2008년 한반도 전 해역에는 리얼타임 화상 송수신이 가능한 디지털 광역통신망이 구축된다. 무궁화위성을 이용해 음성과 영상, 팩스, 인터넷이 되는 종합통신이 완성되면 1년 365일 실시간으로 독도를 ‘생중계’할 수 있다.
스트리밍과 플래시
러닝타임의 기술적인 의미는 뭘까.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최윤식 교수는 “데이터가 끊어짐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영상의 경우 1초에 16장 이상 연속적으로 이어지면 잔상효과 때문에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보인다. 디지털 TV의 경우 1초에 30장의 영상이 연달아 나간다.
실시간 기술이 완벽하지 못할 경우 시간차가 생긴다. 위성항법장치로 불리는 GPS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랬다. GPS는 인공위성 3대에서 각각 발사된 전파가 수신기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차를 측정한 다음 여기에 빛의 속도를 곱해 삼각측량으로 계산해서 정확한 위치를 얻는다.
그런데 1마이크로초를 넘진 않지만 위성시계에 오차가 있고, 대기 중에서 전파가 지연되거나 위성에서 신호 처리가 지연되는 경우에는 약 1~2초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지상파가 아닌 위성방송으로 TV를 볼 때 시간차가 발생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2개 이상의 수신기와 시시각각 데이터를 처리하는 장비를 이용하는 실시간 이동측량법을 써서 거리 오차를 1~2cm로 줄이는 방법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실시간 기술이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의사소통을 하고 싶고, 내가 주문한 상품이 지금 어디쯤 왔는지 바로 확인하고 싶기도 하다. 허리케인이 유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래서 주식을 사야할지 팔아야할지 재빨리 결정해야 할 때도 있다. 실시간 기술은 단순히 현실의 순간을 재생하기도 하지만 매순간에 영향을 미쳐 다음 순간을 결정하기도 한다.
기를 쓰고 1초에 A4 200억 페이지 분량의 정보를 전송하는 광케이블을 만들며, 최대 시속 200km로 달리는 차에서도 유선 인터넷에 견줄만한 속도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무선 휴대 인터넷 와이브로를 개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플래시기술은 스트리밍과 함께 실시간 기술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플래시메모리로 한순간에 대용량의 데이터를 기억했다가 필요할 때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다.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등 각종 디지털기기에 사용되면서 디지털 시대의 순간을 포착하고 즐기게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최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16기가 낸드 플래시메모리로 32기가비트급 메모리를 만들면 인간의 기억을 24시간씩 일주일간 저장할 수 있다. 일간지로는 200년치, MP3 음악파일은 8000곡, DVD급 영화는 20편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앞으로 실시간 기술은 어떻게 발전할까. 최윤식 교수는 “보고 듣는 것뿐 아니라 오감이 실시간으로 구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냄새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실시간으로 맡아보고, 부드러운지 거친지 감촉도 디지털 신호로 바꿔 실시간으로 느끼게 될 수 있다는 것.
진짜현실 같은 가상현실
진짜 같은 가상현실도 가능해진다. 장재호 교수는 “실시간 기술이 발전하면 가상현실에서 소리를 실시간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에서 숲 속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자. 지금까지는 숲에서 들리는 벌레 소리, 바람 소리가 미리 녹음된 것이었다. 이런 소리를 실시간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3D사운드 기술이 결합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3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5년간의 소비 경향 5가지를 발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리얼타임 소비’였다.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이 자리 잡으면서 ‘빨리’ ‘동시에’ ‘바로바로’ 같은 실시간 소비가 늘었다는 것. 이제 리얼타임은 디지털 시대의 핵심 코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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