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공학에 품었던 분홍빛 환상은 깨어졌지만, 개척자로서의 사명은 갈수록 무거워진다.
도서관 창문 밖의 봄은 화사하기만 한데 나는 지금 내일 치르는 시험을 위해 읽어야 할 3백페이지의 원서와 9개나 되는 리포트에 짓눌려 끙끙거리고 있다.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개 아침 7시30분. 강의실을 드나들고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고 저녁 8시쯤에야 도서관을 나서게 된다. 그래도 예습은 거의 하지 못하고 복습과 리포트 작성과 격주로 실시되는 시험준비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그나마 보는 책들은 대개 86년판이어서 기껏해야 85년 전반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 이후 5년간의 엄청난 학문적 진전은 교수님이 소개해 주시는 몇 편의 최근 논문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유전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학문과 나를 돌아보는 글이라니… 이과적 특성인지는 모르나 차라리 원고지에 DNA 구조식이나 그려넣으면 딱 알맞을 것 같다.
국내의 사정을 반영하듯
고등학교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유전공학'은 산업화의 부작용에 따른 공해와 자원의 고갈 위험에 직면한 인류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미래지향의 학문이자 돼지를 코끼리만하게 만들고, 감자 뿌리를 가진 토마토를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의 분홍빛 꿈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과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국내 유전공학의 사정을 반영하듯 제대로 된 실험실 한 칸도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선배라고 해봐야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한 해 위인 84학번 뿐이어서 그저 막연히 무언가 해보겠다는 열의만 가득 차 있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잘못되었다 해도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실망의 빛이 역력한 우리들에게 교수님은 '파이오니어'라는 크고 무거운 짐만 양 어깨에 잔뜩 얹어 주셨다.
신생학문이 갖는 이런 어려움 외에도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많았다. 그 대부분은 유전공학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이 잘못된 데서 온 것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듯 나 역시 유전공학은 생물학과 유사한 학문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물론 유전공학이 생물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유전공학은 생물학적 현상을 화학적 메커니즘으로 규명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입학 이전의 내 단정과는 달리 나는 수많은 화학실험에 시달려야 했다.
유전공학이 열역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열을 가해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60~70℃의 온도는 유지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는 36.5℃ 밖에 안되는데도 체내에선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물론 엔자임(enzyme) 즉 효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나, 어쨌든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역학에 대한 공부도 필수적이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유전공학에 걸고 있던 기대가 많은 부분 지나친 낙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전공학을 해서 뭘 할거냐고 내게 묻는 사람들에게 "고래를 어항 속에서 키울 수 있도록 붕어만하게 만들어서 왕창 팔아먹겠다"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실험 하나에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뿐아니라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 주눅이 들곤 했다.
유전공학에 대한 투자는 속된 말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 할만큼 그 성공을 확신하기 어렵다. 국내에 유전공학 전문연구소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어지간한 재정사정으로는 연구지원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악한 연구환경은 사회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환원하고자 하는 많은 유전공학도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중요했던 것은 "과학자가 되기 전에 철학, 아니 가치판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편의에 따라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며 개조한 결과는 무엇일까. 슈퍼쥐나 포마토 등은 비록 일시적으로 인간의 물질생활을 풍요롭게 할지는 몰라도 자연의 거대한 조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부정적인 변화일 수도 있다.
유전공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 부분만을 침소봉대해서 이해하거나 지나친 낙관을 갖는데는 언론매체나 광고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유전공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생명공학을 통한 유토피아의 건설, 즉 바이오피아(biopia)지만 그 목표에의 전진은 단순히 기술적인 진보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변화의 영향을 여러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늘 너무 쉽게 간과되고 있다. 게다가 재미있고 희망적인 부분만 확대, 선전되다 보면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편적인 몇 개의 지식을 통해서 그 분야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모자이크식 환상을 갖게 된다. 내가 학업도중에 군에 가게 된 이유도 결국 유전공학에 대해 갖고 있던 나 자신의 환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이오피아'를 향한 행군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유전공학과도 많이 변해 있었다. 건물이 증축돼 몇 개의 독자적인 실험실과 사무실이 생겼고 많은 실험기기가 들어왔다. 교수님과 학생들의 노력으로 대학원도 생겼으며 벌써 6회째인 신입생들이 예전의 나와 똑같은 꿈을 꾸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보다 더 침착하고 냉철했던 동기들은 이미 졸업을 해서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대학과정만으로는 유전공학의 실제 응용을 할 수 없기에 유학이나 대학원진학 등으로 학업을 계속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벌써 시집을 가서 유부녀가 된 여학생 동기도 둘이나 있었다. 그들 모두 신입생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던 '파이오니어'라는 크고 무거운 짐을 나름대로 열심히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혼자 도망(?)을 갔다가 이제서야-'이제'라고 어렵고 힘들지 않은 것만 아니지만- 나타난 내가 그들에게 갖는 미안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기간의 고뇌와 방황은 '파이오니어'라는 짐을 짊어지기 위한 내 나름의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한다.
멀고 힘든 길이겠지만 언젠가 우리가 전진하며 개척한 그 곳에 찬연한 새 문명이 꽃피고 있을 것을 기대한다. '파이오니어'란 이름은 그때쯤 우리에게 걸맞을 명예이리라.
상당히 많은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유전자'(human gene)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가 없다. 유전공학을 통해 지금까지 하늘이 내린 형벌로만 알아왔던 수많은 유전병을 극복하고 싶다는 것이 내 소망이다.
무겁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개척자라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이제 내 앞에 놓인 3백페이지 짜리 원서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