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최장수 여성 장관의 비결은 과학자 경력 김명자

“양자역학 문제요? 옛날에는 숱하게 밤을 지새우며 풀었죠.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풀 엄두가 안나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5년 간 화학과 교수로 재직한 학자의 말로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한때 화학 난제에 매달린 수많은 시간이 허송세월이 아니었는지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과학이 인생에 도움이 될까 하는 회의도 들었지요.”

이쯤 되면 진리 탐구의 길을 걸어온 인생을 무척 후회하고 있는 과학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김명자 환경부 장관(58).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99년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돼 국정에 전념하고 있는 인물이다.

투피스 정장 즐기는 멋쟁이 교수

풀어내야 할 난제가 양자역학이나 미적분학 문제에서 사람들의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환경문제로 바뀌었다. 하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행정업무에 몰두하느라 화학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장관 업무를 수행하던 초기에는 과학자로서 쌓아온 자신의 경력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 장관은 일에 본격적으로 부딪치면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화학을 전공했기에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과학적 원인과 대안에 대해 구체적인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나 환경전문 기자들의 세세한 질문에 대해서 서면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 정확한 수치를 들어가며 답변하는 일이 많다. 환경부 직원들은 업무 보고를 할 때 전문적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 일하기 편하다고 전한다. 김 장관은 점차 과학자로서 걸어온 길이 행정업무 수행에 핵심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자연과학이 유망하다고 조언해주신 것이 제 진로 선택에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원래 어릴 때부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진로 선택 이후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죠.”

미국 예일대에서 교환교수(영문학)로 활동중이던 김 장관의 부친은 당시 미국이 과학교육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딸에게 이공계의 길을 권했다고 한다. 1957년 옛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이 대대적으로 과학기술 인력 확충에 나서던 시기였다.

그 영향으로 1960년대에는 이공계를 지망하는 외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강화됐다. 김 장관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학을 떠나 장학금을 받으며 수학, 27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숙명여대 화학과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교수 시절 김 장관은 엄격한 과학자의 삶을 살았다. 당시 김 장관에게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그를 ‘족보가 통하지 않고 성적도 짜게 주는 엄한 스승’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늘 투피스 정장으로 가장 멋을 내는 교수라는 평가도 함께 따라다녔다.
 

김명자 장관은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전공한 후 정 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다고 말 한다.


손가락 인대 늘어나도록 번역에 몰두

다소 평범해보이는 학자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닥친 것은 1980년대 한국 사회가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비롯됐다. 연일 휴교령이 내려지고, 학교는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휩싸였다. 김 장관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과학자인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번역작업에 몰입했어요. 매일 교자상 앞에서 원고지와 씨름하며 하루에 몇쪽을 번역했다고 기록하는게 유일한 낙이었죠. 덕분에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 많이 고생했어요.”

이때의 작품이 현재까지 꾸준히 출판되고 있는 토마스 쿤의 역작 ‘과학혁명의 구조’다. 이후 ‘엔트로피’ ‘현대사회와 과학’ 등 20여권의 책을 발간, 과학대중화 활동에 힘썼다. 그 공로로 1984년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제1회 저술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1994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진흥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과학자로서 사회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학문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과감하게 도전하기도 했다. 1984년 서울대 대학원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 개설되자 자신보다 후배인 교수가 가르치는 강의를 대학원생들과 똑같은 입장에서 수강하는 열의를 보였다.

김 장관이 환경분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관한 국제학술올림픽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환경정의시민연대, 국회환경포럼, 천주교환경위원 등에서 자문활동을 펼쳤다. 비단 환경단체뿐 아니라 과학계, 여성계, 관계 등 다방면에 걸친 정력적인 활동에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김대중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김 장관이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사실 1999년 6월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 주변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연과학자 출신의 장관이 분쟁과 소송이 끊이지 않는 험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였다. 물론 우리의 정치풍토상 여성이 장관 업무를 수행하는데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했다.

하지만 김명자 장관은 이런 우려를 멋지게 불식시켰다. 무엇보다 올해 3월 최장수 여성장관 기록을 경신해 주목을 받았다. 역대 여성장관들이 단명한 것에 비해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또 환경부가 정부부처 업무평가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 6월까지 1위를 달성했다. 어떤 비결이 있었을까.
 

2002년 4월 21일 제4차 한중일 환경장관회의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명자 장관.


여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강점

“과학자로서 연구한 경험이 환경부 업무를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과학 지식이 환경문제를 이해하는 기본이 되고, 과학적 방법론이 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죠.”

과학은 새로운 자연현상과 마주쳤을 때 이를 단순화시켜 기본골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복잡한 현상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론이 수많은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는 복합적인 환경문제 해결에 필수적인 도구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경력이 환경 행정을 수행하는데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장관으로서의 이런 성과의 이유를 단지 과학자 출신이라는 점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김 장관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이 일을 풀어가는데 또다른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밝힌다.

“이해 당사자 간의 조화와 협조를 이끌어내는데 여성적인 시각과 접근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존의 권위주의적, 가부장적 사고가 아니라 섬세함과 치밀함으로 대처하고, 파트너십을 중시하며, 조화와 협조를 이끌어내는 여성적인 시각과 접근이 오히려 강점이 된다고 느껴요. 냉철한 논리와 합리성에 근거하되 감성적 접근을 잊지 않는 것이 한가지 사례지요.”

장관 부임 직후 가장 어려웠던 일은 낙동강물관리종합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낙동강 유역 주민들은 댐을 건설하는 계획이 대책에 포함돼 있다며 반대해 이를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 김 장관은 생각 끝에 평소 알고 있던 문인들의 모임인 ‘맑은물사랑실천협의회’에 지지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고, 이 글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지지로 돌아서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차가운 법령이 아니라 문학적 감성을 갖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감동의 행정이 돼야 한다’는 김 장관의 지론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김 장관은 ‘깐깐한 화학자’의 이미지처럼 평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할 때는 하는’ 유형이다. 낙동강을 비롯한 3개수계 특별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의결된 날, 직원들과 자축하는 자리에서 폭탄주가 돌았다. 한잔을 겨우 마시고 멈추려 할 때 “건너야 할 강이 셋이었으니 어느 강을 버릴 수 있겠느냐”는 주위의 권주사 때문에 석잔을 연거푸 마셨다.

과학기술계 진출 적극 권장돼야

장관 취임 이후 평소 즐기던 수영 한번 못하는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을 제대로 세울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현재의 업무에 대해 커다란 긍지를 느끼고 있어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으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청소년 시절 과학탐구의 길을 택하는 것은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투자입니다. 과학기술계로부터 경영, 행정 등 다른 분야로 진출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하고 있어요. 청소년들의 과학기술계 진출은 적극 권장돼야 합니다.”

특히 화학자 출신이기에 화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세기 산업문명은 화학산업이 이룩한 신소재 개발과 새로운 공법에 크게 의존했어요. 또 21세기 문명을 이끌게 될 반도체, 생명공학 등의 근간도 화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요. 당연히 환경문제 해결에서도 화학이 훌륭한 견인차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질병치료와 생태계 복구, 오염물 처리처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에 화학이 빠질 수 없어요.”

김 장관의 업무실 한쪽 벽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로 가득찬 액자가 걸려있다. 최장수 여성장관 기록 경신 기념으로 환경부 직원 2백여명이 축하의 글을 남긴 것이다. 어떤 내용이 제일 마음에 드냐는 질문에 김 장관은 선뜻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만나 큰 꽃을 피운다’는 글귀를 지목하고는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김 장관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긴 하지만, 막상 얘기하고 보니 ‘아부성 언변’을 소개한 것처럼 보인 탓이다.

학자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행정가로서 성공적인 삶을 꾸려가고 있는 김 장관. 그의 행보는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귀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김명자 장관이 걸어온 길

1944년 서울 출생
1966년 서울대 화학과 졸업
1971년 미국 버지니아대 화학 박사
1974년 -1999년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
1984년 한국과학저술인협회의 제1회 저술상 수상
1985년 과학기술진흥유공 대통령 표창
1994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대통령상 수상
1997년 -1999년 UNESCO 한국위원
1999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이만홍
  • 김훈기 기자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