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꼬마들이 쎄쎄쎄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게다. 계모와 그 자식들에게 구박 받던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무도회에 참석한다. 왕자와 춤을 추던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리는 밤 12시가 되자 허겁지겁 무도회장을 빠져나오다 유리구두를 떨어뜨린다.
결국 구두 주인을 애타게 찾던 왕자를 다시 만난다. 이 이야기는 9세기 중국 민담에서 처음 발견되고 유럽에서는 16세기경에 등장한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신데렐라는 프랑스 작가 페로 동화집의 주인공이다. 서양에 신데렐라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콩쥐팥쥐가 있으렷다. 깨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콩쥐에게 두꺼비가 나타나 구멍을 막아준다는 줄거리로 한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이 민담은 1919년 대창서원판 ‘콩쥐팟쥐젼’으로 처음 문자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콩쥐팥쥐에서도 주인공을 구박하다 결국 철퇴를 맞는 계모와 그 일당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왜 이런 이야기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거의 보편적으로 등장할까? 얼마전부터 몇몇 외국 문학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런 문학적 보편성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문학과 진화론의 만남이니 셰익스피어가 다윈을 만났다고나 할까? 진화 문학평론가들은 신데렐라가 어찌어찌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후반부 이야기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계부모에게 구박받는 어린이 이야기가 왜 세계적으로 등장하는가다.
문학 - 콩쥐에 관한 진실
1988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만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계부모에 의한 자식 살해 위험이 친부모보다 크게는 무려 70배 정도 높다는 것. 혹자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리 놀라운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 연구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그 현상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했기 때문이다.
연구를 주도한 캐나다 맥매스터대의 데일리와 윌슨 교수 부부는 “부모가 생물학적 친부모가 아닐 때, 부권이 확실하지 않을 때, 자식이 불구이거나 열등한 자질을 가질 때, 가난이나 배고픔 때문에 또는 자식 수가 많아 엄마가 지는 부담이 너무 커 생존과 번영의 전망이 비관적일 때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예측가능한 선에서 줄어들며, 이런 현상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논리는 이렇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유전자를 50% 공유한다. 따라서 부모가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자식의 미래를 담보로 잡을 수도 있다. 즉 모든 자식들을 똑같이 돌보는 행동이 부모 자신의 포괄적응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을 평가하는 무의식적 심리를 갖고 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 중 더(또는 덜) 아픈 손가락도 분명 있다는 것! 유전자의 관점으로만 보면 콩쥐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새엄마는 콩쥐에게 사랑을 퍼부을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당장 반론들이 제기될 것이다. 친부모 이상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계부모도 많고 심지어 자신의 피가 전혀 섞이지도 않은 핏덩이를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는 양부모도 있는데, 이 무슨 시대착오적 발상인가? 물론 그런 훌륭한 부모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캐나다 연구팀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계부모 중 아동학대를 하는 계부모의 비율이 친부모 중 아동학대를 하는 친부모의 비율보다 월등히 높다는 사실이다. 지금 계부모의 아동학대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뇌물을 받는다고 해서 뇌물상납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구분된다.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 김동인이 1932년 발표한 ‘발가락이 닮았다’의 주인공인 노총각 M은 결혼을 하지만, 총각 때의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얻은 성병 때문에 생식능력을 잃었다. 단골의사인 ‘나’(화자)만큼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M이 결혼 2년 후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찾아온 것 아닌가. 그 아기가 자기 아기라는 보장을 얻고 싶어서였다. M은 ‘나’에게 “이보게, 아이가 날 닮은 데가 있어. (중략) 내 발가락은 남과 달라서 가운데 발가락이 그 중 길지. 그런데 이놈 발가락을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라고 말한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면서도 애써 삭이려는 M에게 동정심을 느낀 ‘나’는, 닮은 데가 발가락만은 아니라고 말하고는 의혹과 희망이 섞인 M의 눈동자를 피해 돌아앉는다.
남성(수컷)에게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남모를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 내 짝이 낳은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여성은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부권은 늘 불확실하다. 오죽하면 ‘엄마의 아기, 아빠의 아마’(mama’s baby, papa’s maybe)라는 서양의 우스개 소리가 있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이 자기 짝의 육체적 불륜에 가장 큰 질투심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는 이제 꽤 알려졌다. 발가락에서라도 닮은 구석을 찾아보려는 M의 행동은 어쩌면 이런 질투심으로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작일지도 모른다.
이런 테마는 뻔하고 심지어 비교육적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까지도 텔레비전 앞에 앉혀 놓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날마다 변주되고 있다. 진화론은 이런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그런 현상을 절묘하게 표현한 문학작품의 성공비결을 말해준다.
정치 - 대통령 눈물의 파장
정치도 진화론과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욕구, 믿음, 사고 같은 정신상태와 그 정신상태에 의해 야기된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고들 한다. 쉽게 말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왜 인간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일까?
최근 들어 영장류의 인지적 독특성을 사회적 복잡성에서 찾으려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마키아벨리적 지능 이론’으로도 불리는 이 이론은 원숭이와 유인원이 사회적 복잡성이라는 적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모술수 전략을 채택하는 식으로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영장류 사회는 변화무쌍한 동맹 관계로 유지되기 때문에 다른 개체를 이용하고 기만하는 행위, 더 큰 이득을 위해 상대방과 손을 잡는 행위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적응도를 가질 수 있다. 물론 권모술수에 능하려면 다른 개체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저명한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발은 ‘침팬지 폴리틱스’에서 침팬지에게도 이런 권모술수의 맹아가 발견된다고 역설했다. 정작 침팬지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마음 읽기’에 대해 공부해야 할 사람은 ‘여론 읽기’에 가장 민감해야 할 정치인인지도 모른다.
최근 연기에 입문한 가수 이효리가 방송에 나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소지섭이 보여준 눈물연기를 교본으로 삼았다”는 고백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보스의 명령으로 살인을 저지른 뒤 공중전화 부스에서 형에게 전화를 거는 배우 한석규의 눈물연기 또한 관객의 마음속에서 쉬 지워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연기자들 사이에는 눈물연기가 자연스럽게 될 때 비로소 연기에 눈뜨게 된다는 통설도 있다. 정치와 진화를 논한다더니 갑자기 웬 눈물 이야기인가?
2002년 대선 직전 2분짜리 광고 한편이 대선결과를 뒤집는 중대한 계기가 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짧은 필름으로 스쳐지나가고 그가 직접 기타를 퉁기며 나직이 노래를 부른다. 주루룩 눈물을 흘리면서. 이게 그 광고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50만표 이상 뒤지고 있던 노 후보는 그 광고를 발판으로 삼아 결국 대역전극을 일궈냈다.
도대체 눈물이 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물행동학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최고의 과학이론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동물행동학자들에 따르면 오로지 인간만이 눈물을 흘리며 운다.
물론 동물들도 우리와 비슷한 슬픔, 기쁨, 놀람 같은 감정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눈물과 같은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눈물샘에서 눈물을 내보내려면 복잡한 생화학적 과정이 필요하며 에너지도 많이 든다. 눈물이 나오면 시야도 흐려진다. 따라서 경제적 관점으로 보면 눈물 흘리는 일은 비용이 드는 작업이다. 가짜 눈물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괜히 연기자인가?
이스라엘의 행동생태학자 아모츠 자하비의 ‘핸디캡 이론’이 작동하기 딱 알맞은 상황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신호일수록 정직한 신호다. 그것을 생산해낼 자원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결코 그 신호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신자는 송신자의 신호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여 표현된 것인지를 가늠해 그 신호의 진실성을 파악한다.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럽고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는 길고 화려한 꼬리를 굳이 달고 다니는 이유는 암컷에게 ‘나는 이런 값비싼 깃털을 만들어낼 만큼 건강하고 능력 있다’는 사실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다. 핸디캡(거추장스러운 꼬리)을 극복하고 잘 생존할 만큼, 즉 값비싼 신호를 만들어내도 까딱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전하고 있다.
인간의 눈물은 공작의 버거운 꼬리와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눈물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지만 공작의 버거운 꼬리는 수컷에게만 있다는 점뿐. 눈물은 비싼 신호이기 때문에 정직하며 눈물을 본 우리는 그 신호의 의미, 곧 송신자의 진심을 읽게 된다. 상대방의 눈물을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고 이해력과 포용력이 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눈물의 정치’가 맹위를 떨친 사건이 또 한번 벌어졌다. 노 대통령 탄핵안이 다수 야당의 찬성으로 통과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던 광경을 기억하는가? 공중파를 통해 생중계된 이 눈물바다 현장은 뜻밖에도 여당에게 17대 총선 승리를 선물로 안겨줬다. 그 눈물들이 실제로 얼마나 진지하고 정직했느냐는 여기서는 논외다. 다만 정치와 눈물 사이에 진화론적 원리가 작동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제 - 이유 있는 폼생폼사
사실 핸디캡 이론은 최근 유행처럼 번진 명품이나 럭셔리 열풍도 설명한다. 미국 경제학자 톨스타인 베블렌은 1899년 ‘유한계급이론’에서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오가는 현대 도시사회 사람들은 비싼 사치품으로 장식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성향이 크다고 봤다. 타인이 실제로 얼마나 부유한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곳에서는 과시적 소비만이 믿을 수 있는 부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베블렌의 이런 설명은 동물의 신호들이 대개 적응도 과시를 위해 진화해왔다는 핸디캡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유난히 크고 긴 꼬리를 가진 수컷 공작은 인간으로 치면 최고급 벤츠를 타고 명품 시계를 차고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으며 타워팰리스에 사는 재벌 2세쯤 될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은 명품 시계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어도 나머지까지 흉내내다간 가랑이가 찢어지고 만다.
오늘날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수많은 사기사건을 들여다보라. 사정이야 다 다르지만 쉽게 말하면 사기꾼의 허세에 넘어간 사건이 태반이지 않은가.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의 조작된 신호를 잘 읽어내지 못해 생긴 비극이지만, 사기꾼 입장에서 보면 피해자의 신호 입출력 시스템을 잘 조작해낸 사건이다.
‘우리가 과연 합리적인 경제 주체인가’는 이제 더이상 경제학이나 심리학만의 물음이 아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진화론적 고찰은 전통적 경제학과 심리학의 기본 전제들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지금도 주류 경제학의 설명 양식은 ‘합리적 선택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요소들을 검토하고 특정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저울질한다.
그리고 결정하기 전에 위험도, 감정적·물질적 보상 같은 이해득실을 따져본다. 선호된 선택은 효용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실 전통 심리학의 인간관에 기초한 것이며, 정치학을 비롯한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진 전제다.
하지만 진화론은 인간이 그런 식의 합리성을 결코 진화시키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인간의 두뇌가 계산능력이 탁월한 슈퍼컴퓨터로 진화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두뇌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불완전한 정보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마치 태풍이 도시 전체를 휩쓸고 지나간 지 2분이 흘렀는데 아직도 태풍의 출현가능성을 계산하고 있는 슈퍼컴퓨터처럼 말이다. 인간 두뇌의 사고능력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화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의 비현실성은 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이 1957년 제시한 ‘만족화 모형’에 의해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 모형은 단기간에 가용적이고 감지되는 것들로부터 맨 처음 만족스런 해결책을 만나면 그것으로 선택이 종료되는 식으로 인간이 사고한다는 이론이다. 예컨대 결혼 적령기의 미혼남 중 이상형을 무작정 찾아나서는 미련한 사람은 별로 없다. 대개 주변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에게 청혼한다. 이게 바로 만족화 모형이다.
진화발생학자 자크 모노의 말대로 ‘진화는 주변의 가용한 것들을 가져다가 여기저기 땜질 하는 수선공’이지 모든 문제를 모든 가능한 방식대로 풀어내는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이 모형에 영감을 받은 진화론자들은 최근 ‘생태적 합리성’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합리적 추론 능력에 대한 기존 사회과학 전제들에 도전하고 있다.
과학기술 - 총각의 힘이 만든 창조성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이유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의 창조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조성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 “30세 이전에 과학에 위대한 공헌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이 툭 던진 이 말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좌절감을 느꼈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2년 전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일본인 연구자 사토시 가나자와에 의해 발표됐다. 280명의 위대한 남성 과학자들의 일생을 분석한 후 그 중 65%가 35세 이전에 자신의 최고 논문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결혼을 하고 나면 나이에 상관없이 학문적 성과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대신 미혼 과학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좋은 연구결과들을 내놓았다. 그는 이를 두고 남성 과학자의 창조성이 짝짓기와 관련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남성 과학자들이 기를 쓰고 경쟁을 한 결과 양질의 논문들이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기혼 과학자들에게는 이 얼마나 참담한 소식인가? 짝짓기가 창조성의 원천이라니!
성선택 이론을 인간 본성의 진화에 본격적으로 적용한 심리학자 제프리 밀러는 저서 ‘메이팅 마인드’(Mating Mind)에서 창조성과 성선택 이론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는 인간만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음악, 미술, 문학, 자의식, 언어, 유머, 창의적 사상, 종교, 도덕 능력, 과학기술 같은 독특한 특성의 진화를 성선택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해석한다. 이 능력들이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전략으로 최근 250만년에 걸쳐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성선택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 진정한 추동력이었던 셈이다. 성선택으로 인간의 독특성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제는 “과학기술, 음악, 문학 능력이 생존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반문이 예전만큼 당당해보이지 않는다.
창조성과 진화를 생각하다보니 문학으로 다시 돌아왔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옛날 연애편지를 들춰본 적이 있는가? 닭살이 돋다가도 ‘연애를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진화론은 문학, 정치, 경제,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문어발처럼 적용 범위를 넓혀가며 지금도 한창 진화 중이다.
포괄적응도 | 어떤 개체의 행동이 자신의 적응도뿐 아니라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른 개체의 적응도에 미칠 영향을 함께 고려해 더한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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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진화론
1. 진화 고속으로 일어난다
2. 공장에서 진화 찍어낸다
3. 진화론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4. 마음도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