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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화론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빌 게이츠도 디지털 다윈이즘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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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식은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이고, 뒤의 식은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루드빅 볼쯔만의 엔트로피식이다. 볼쯔만의 식은 일반인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엔트로피’란 개념은 오늘날 물리학을 넘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은 이처럼 단순한 식을 ‘우아하다’고 생각하고 복잡한 식을 ‘지저분하다’고 느낀다. 간결하게 표현되는 식일수록 내포하는 의미가 심오하고 적용되는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물리법칙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은 ‘생물은 변이를 일으키고 그 중에서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연선택’이라고 불리는 이 원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식물의 존재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깨달았다. 진화론은 생물종이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원래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일단 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결코 그 이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된 것이다.

진화의 상흔을 간직한 몸

커다란 원을 배경으로 팔과 다리를 벌린 채 서있는 남성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는 인체의 비례와 조화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우리 몸에 대한 이런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우리 몸은 각 기관이 서로 진화의 보조를 맞추지 못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맥류와 치질. 포유류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동맥을 거쳐 전신으로 퍼진 후 정맥을 거쳐 다시 심장으로 돌아간다. 네발짐승은 몸이 수평이므로 이런 순환에 무리가 없다. 다만 심장보다 아래인 사지의 정맥에는 판막이 있어 중력으로 피가 역류하는 현상을 막아준다.

그런데 인류가 직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심장이 두 배로 높아지면서 중력의 영향력도 그만큼 커진 것. 따라서 발끝까지 내려간 피를 올려보내기가 만만치 않다. 결국 피가 고이면서 높아진 압력을 견디지 못한 다리의 혈관벽이 불거져 나온 것이 정맥류다. 치질은 항문 주위에서 발생한 정맥류로 인구의 5%가 갖고 있을 정도다.

영국의 작가 일레인 모간은 저서 ‘진화의 상흔’에서 “치질의 빈도가 이렇게 높은 것은 항문 주위의 혈관에는 피의 역류를 막는 판막이 없기 때문”이라며 “네발짐승은 항문이 심장보다 높기 때문에 판막이 없어도 된다”고 말했다. 결국 인간의 항문 정맥은 직립으로 심장보다 밑에 놓이게 된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고 그 대가가 치질인 셈이다.

인체가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질병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런 접근법을 ‘다윈의학’이라 부른다. 다윈의학자들은 진화론의 관점에서 질병의 원인과 증상을 파악한다. 따라서 처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복통으로 인한 설사의 경우, 기존의 의사들은 탈수를 우려해 무조건 지사제를 처방했다. 상식적인 대응으로 보인다.

그런데 약을 먹고 설사를 멈춘 사람들이 오히려 복통에서 회복되는 기간이 훨씬 길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왜 그럴까. 설사는 우리 몸이 장에 침투한 독소나 병균을 빨리 몸에서 배출하기 위해 개발한 비상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방어메커니즘을 중단시켰으니 복통이 오래갈 수밖에. 물론 탈수가 심각한 설사는 예외이겠지만 견딜만하다면 화장실에 자주 가는게 복통에서 빨리 회복되는 길인 것이다.

진화론은 전염병에 대한 시각도 바꿔놓았다. 백신과 항생제의 개발로 한때 전염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기도 한 인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도 이런 오만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진화를 통해 항생제를 무력화시킨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하는가하면 에이즈 바이러스처럼 인류를 위협하는 신종이 어느 순간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이들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다.

에이즈 확산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콘돔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콘돔은 생식기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을 막는 역할만 할까. 미국 암허스트대 진화생물학자 폴 에발트 교수는 콘돔의 사용이 바이러스를 온순하게 진화시킨다고 설명한다. 즉 숙주인 인간을 죽일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강력한 바이러스는 전염이 쉬운 환경이 유리하다. 그러나 콘돔으로 막혀 전염이 어려워지면 불리해진다. 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숙주가 죽어버리면 바이러스의 운명도 끝이기 때문이다.

에발트 교수는 “따라서 이 경우에는 파괴력이 약하게 진화한다”며 “숙주를 적당히 괴롭히면서 오래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1980년대 에이즈 공포에 떨었던 미국은 오늘날 에이즈를 일종의 만성병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여전히 감염에 속수무책인 아프리카는 에이즈 창궐로 매년 수백만명이 사망하고 있다.
 

찰스 다윈의 초상화. 그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영역을 넘어 의학, 컴퓨터과학, 경제학 등 많은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인간 존재를 다시 생각하다

진화론은 우리 몸을 바라보는 시선 뿐 아니라 개체와 자아, 지능 등에 대한 개념 자체를 흔들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박사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출간해 그 서막을 울렸다.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 책에서 그는 “개체는 유전자의 증식을 위해 이용되는 운반체일 뿐”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았다. 수십억년에 걸쳐 만들어진 정교한 신체기관, 고도의 지능과 미묘한 감정이 고작 DNA라는 생체분자가 존재하기 위해 몸이 진화해온 결과라니.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근거가 약한 일종의 말장난”이라며 그의 주장을 애써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1980~1990년대 뇌와 관련된 일련의 연구결과로 도킨스의 생각은 이제 상식이 돼 버렸다.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교수가 1997년 펴낸 책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한 구절을 보자.

“자연선택은 유전자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는 뇌를 구축한다. 다른 유전자 조합은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뇌를 만들어낸다.”

즉 뇌의 정보처리과정의 진화는 세세한 부분까지 뇌의 형성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뇌는 개체가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해 환경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고안된 기관이다. 잣까마귀는 소나무 씨앗 3만개를 넓은 지역에 걸쳐 숨겨놓은 뒤 최대 6개월 뒤에도 회수할 수 있다. 만일 사람에게 씨앗 300개를 주고 숨기게 한 뒤 다음날 찾으라고 하면 절반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잣까마귀가 사람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닉행동은 먹이가 부족한 시기를 견디기 위한 전략이다. 잣까마귀의 뇌는 이런 행동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진화된 회로를 갖고 있을 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로조 셰파드 교수는 흥미로운 그림을 만들었다. 그림에는 책상이 두개 그려져 있는데 하나는 가로로 나머지는 세로로 배치돼 있다. 세로로 그려진 것은 길쭉한 책상이고 가로로 놓인 것은 정사각형에 가깝게 보인다. 과연 그럴까.

자를 대고 재보면 두 책상은 가로와 세로 길이가 똑같다. 그런데 이런 지식을 갖고 봐도 둘은 여전히 다르게 보인다. 왜 눈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셰파드 교수는 “이 그림은 뇌가 2차원 구조인 망막에 있는 정보를 어떻게 3차원의 실체로 계산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한다.

즉 뇌는 세로 방향은 원근의 영향으로 상이 짧아 보이는 것이라고 추론해 실제 형상은 더 길다고 결론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은 자동으로, 즉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셰파드 교수는 “우리의 지각과 인지체계는 몸의 크기나 체형, 피부색처럼 자연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착시는 뇌가 얼마나 효율적인 시각정보처리체계를 진화시켰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측할 수 없는 유전자의 변이를 통해 뇌처럼 정교한 신경회로의 성능이 개선되는 일이 실제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돌연변이가 생기면 백발백중 회로의 결함으로 이어질 것 같다.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컴퓨터과학의 새 분야인 ‘진화알고리즘’이 내놓았다. 진화알고리즘은 생명체처럼 복제하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이 과정을 통해 좀더 지능적인 소프트웨어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소프트웨어개발회사인 미국 내추럴 셀렉션사는 진화하는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물론 사람을 이기는 체스 프로그램은 많이 나와있다. 1997년 슈퍼컴퓨터 ‘딥 블루’에서 가동된 프로그램은 당시 세계 챔피언인 러시아의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그래머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일일이 프로그램화한 대형 소프트웨어다.

그런데 내추럴 셀렉션사의 프로그래머가 한 일은 임의의 전략을 갖는 간단한 소프트웨어 15개를 만든 것 뿐. 이들 프로그램은 서로 시합을 거쳐 성적을 매기게 된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소프트웨어들이 선택돼 부모가 돼 자손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프로그램의 일부가 서로 교환되기도 하고 명령어가 바뀌는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250세대가 지난 뒤 등장한 프로그램은 초기 조상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전략을 갖게 됐다.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 체스 사이트를 통해 데뷔했고 상대가 소프트웨어인지 모른 채 경기에 임한 체스 고수들 중 상당수가 고배를 마셨다고.

미국 브랜다이스대 컴퓨터 과학자인 호드 립손과 조단 폴랙은 진화알고리즘을 이용해 컴퓨터가 로봇을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부모 역할을 하는 이 컴퓨터에는 플라스틱 부품을 만드는 3D프린터가 연결돼 있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부품이 프린터로 찍혀 나오면 사람은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회로를 연결해 작동시켜 그 결과를 입력한다. 이런 식으로 수백세대의 진화를 거쳐 모래 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이 탄생했다. 현재 연구자들은 연결나사와 배터리까지 스스로 설계해 찍어낼 수 있는 기계를 연구하고 있다.
 

말라리아에 감염된 어린이. 매년 2백만명이 희생되는 말라리아를 통제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모기장 사용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감염이 어려워지면 덜 치명적인 말라리아충이 선택되기 때문이다.


수로 밀어붙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약 개발은 ‘합리적인 의약설계’라는 방법을 추구해 왔다. 질병이 일어나는 원인을 분자수준에서 규명해 그 과정을 차단하거나 변경하는 약물을 설계하는 방법이다. 마치 자물쇠의 구조를 밝힌 뒤 거기에 맞는 열쇠를 깎는 것과 같다.

그런데 최근 진화의 방식이 신약 개발에도 도입되고 있다. 다양한 구조의 분자단위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해 좀더 복잡한 구조의 분자를 만드는 ‘조합 화학’이 그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만~수십만가지 분자는 자동화된 스크린 장치를 통해 약효가 테스트된다. 이 과정을 통해 소수의 분자가 ‘선택’되는 것이다.

한국화학연구원 김성수 박사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자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며 “최근 자동화기술의 발달로 조합과 스크린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떨어짐에 따라 이 방법은 더욱 활발하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진화의 개념은 최근 마케팅 전략에도 도입되고 있다. 신제품을 개발할 때는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갈수록 제품수명이 짧아지고 소비자의 기호는 예측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 지나치게 신중한 제품개발 전략은 자칫 때를 놓치기 쉽다.

최근 기업체들은 다양한 컨셉의 제품을 한꺼번에 내놓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 뒤 소비자의 반응이 좋은 제품을 택해 집중적으로 마케팅을 벌이는 것이다. 출판업계가 대표적인 분야. 2002년 4월 출간돼 100만권 이상 팔린 틱낫산 스님의 저서 ‘화’(명진출판)는 지금까지도 출판계의 신화로 남아있다. 보통 1만권 정도면 선전했다는 명상서적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릴 줄은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

살림출판사의 출판기획자인 최진씨는 “어떤 책이 성공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화론을 적용하는 것은 위험은 줄이면서 기회는 놓치지 않는 묘수”라며 “한해에 출간한 수십권 가운데 한두권만 히트해도 그 출판사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에번 뉴워트은 2002년 출간한 ‘디지털 다윈이즘’에서 급변하는 인터넷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진화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임을 강조했다. 인터넷의 진화가 자연진화의 압축판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제적 생명체의 토양인 웹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의 사업과 기업들을 탄생시켰다”며 “이 새로운 경제적 유기체들은 기존의 기업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새로운 사업모델과 특성들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다윈이즘의 신봉자를 자처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은 지난 1월 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05 국제 가전전시회’(CES) 기조연설에서 “미래에는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생활 태도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국 레인콤의 MP3플레이어 ‘아이리버 H10’을 손에 든 채 “뛰어난 소프트웨어와 기기가 결합되면 고객들의 삶과 일 모두를 충실하게 채워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신종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택’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볼쯔만의 엔트로피식, S=klogW 

볼쯔만이 1877년 발표한 식으로 S는 엔트로피, k는 볼쯔만 상수, W는 원자들의 분포를 만들어내는 방법의 수다. 원래 열역학적 개념이었던 엔트로피를 기회와 가능성으로부터 정의한 이 식은 오늘날 디지털 정보나 통신을 포함해서 질서와 무질서가 함께 섞여 있는 모든 경우에도 엔트로피를 계산할 수 있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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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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