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컬 평점 ★★★★☆ 불의에 항거했던 모성의 외침
‘체인질링’은 192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실제 일어난 아동 실종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진한 모성애, 그런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권력에 외롭지만 당당히 맞서는 주인공의 모습은 관객에게 진한 감동을 안긴다.
키가 작아질 수 있을까
영화 초반, 무려 5개월에 걸쳐 아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애쓰던 크리스틴에게 희소식이 들려온다. LA경찰이 아들 월터를 찾았다는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크리스틴은 그토록 그리던 아들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며칠 뒤 경찰은 엄마와 실종된 아이의 재회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아이는 크리스틴이 기억하는 아들 월터가 아니었다. 생김새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경찰과 사진사, 신문기자들 앞에서 혼란스러웠던 크리스틴은 황망하게 그 소년을 집으로 데려온다.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린 크리스틴은 아이의 키가 5cm나 줄어든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뒤늦게 경찰에 항의한다. 하지만 사건수습에만 급급한 경찰은 그녀의 주장을 묵살해 버리고 만다. 심지어 경찰 편에 선 의사를 보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의 키가 줄어들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까지 한다. 경찰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만약 아이의 척추 뼈가 주저앉는다면 키가 줄어드는 수도 있긴 하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대개는 척추 뼈에 종양이나 결핵이 생기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은 매독의 영향?
영화 중반 크리스틴은 수차례 경찰을 찾아가 아이가 뒤바뀌었다는 주장을 펴지만 번번이 묵살 당하고 만다. 이에 그녀는 부패한 LA경찰에 맞서 싸우는 교회와 언론의 편에 서서 수사의 부당함을 호소하는데, 이 때문에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크리스틴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LA경찰이 법적으로 그녀를 가둘 수 없게 되자 정신과 의사를 매수한 것이다. 이에 크리스틴은 졸지에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미친 여자로 전락하고 만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크리스틴은 맨 먼저 매독검사를 받는다. 당시 의사들은 매독 때문에 정신병이 생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연 매독은 정신병의 원인이었을까.
매독은 임질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1940년대에 환자 수가 최고 수준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성병이다. 매독은 흔히 제1기, 제2기, 잠복기, 제3기의 4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제2기를 지나게 되면 잠복기에 들어가므로 겉으로는 병이 나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치료가 지연되면 수십 년 뒤 실명, 청각 상실, 중풍, 정신병 등과 같은 제3기 매독 증세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매독은 정신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한편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에는 매독 외에도 다양한 질환이 정신병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1920년대 미국 뉴저지 주 트렌턴 주립병원의 헨리 코튼 원장은 정신병 환자들이 예외 없이 충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충치와 정신병이 서로 관련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발치=정신병 해법’으로 간주했다. 실제 1920년과 1921년에 뽑은 이의 수가 각각 4392개, 6472개나 됐다고 한다. 현대의학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짓 주장에 불과했지만 당시 미국의학계에서는 정설로 여겨질 정도였다. 정신병의 원인은 아직도 현대 의학의 숙제로 남아 있다.
영화 속에서 크리스틴과 함께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의료진의 요구에 반발할 때마다 혹독한 전기충격 요법을 받는다. 간호사들이 팔다리를 꽉 붙잡은 상태에서 환자의 머리에 전극을 붙여 전기충격을 가하는데, 이는 옥에 티가 아닐 수 없다. 환자의 몸을 통과한 전기가 간호사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환자뿐만 아니라 간호사들도 기절을 해야만 옳다. 전기충격 요법은 일견 끔직스러운 치료법으로 보이지만 요즘에도 정신과 영역에서 중증의 우울증 치료에 흔히 사용되는 안전한 치료법이다. 환자는 전신마취 상태에서 전기충격을 받게 되므로 외상을 입을 염려가 없다. 학계에선 심장박동에 영향을 줘 일시적인 부정맥이 생기거나 뇌혈류와 뇌압이 증가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안전성에선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알약과 주사약

이는 주사기에 사용되는 약물은 먹는 약과 성분이 같더라도 농도는 달라야 하는 특징이 있어서다. 사람 몸속에 체내와 농도가 다른 물질이 직접 들어가면 ‘삼투압’ 현상이 일어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데, 당시 의료 기술 수준은 이 같은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준은 못됐던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병원에서는 혈액에 직접 주입되는 링거액의 염화나트륨 농도를 0.9%로 고정하는데, 이는 사람의 혈액 속 염화나트륨 농도가 0.9%이기 때문이다. 만약 링거액 대신 순수한 물로만 구성된 증류수를 몸속에 주입하면 혈장 속 삼투압이 낮아져 적혈구나 백혈구 같은 혈구들이 부서지는데, 이를 용혈이라고 부른다.
용혈이 심하면 환자는 사망할 수 있다. 증류수를 절대로 혈액 속에 주입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러한 비밀이 알려진 것은 네덜란드의 물리화학자 야코부스 반트 호프 덕분이다. 그는 화학동역학의 법칙 과 삼투압을 발견한 공로로 190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호프의 연구가 없었다면 의사들은 아직까지 알약만 처방했을지도 모른다.
납치와 퇴행?

영화 후반부, 월터를 비롯한 10여 명의 아이들을 유괴 살해한 엽기적인 살인범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에 빠진다. 철면피 살인범의 극악무도한 행각에 여론이 들끓자 경찰이 월터 유괴사건을 재수사한 것. 결국 경찰은 초동수사의 실수를 인정하고 크리스틴을 풀어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살인범에게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던 아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에 크리스틴은 언젠가 월터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납치를 당했던 아이들은 어딘가 미숙하고 모자라 보인다. 왜였을까.
이는 바로 ‘퇴행’ 때문이다. 퇴행은 인생이 성숙·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심한 좌절을 겪었을 경우 그동안 이룬 발달의 일부를 상실하고 현재보다 안정적이었던 과거 수준으로 후퇴하는 현상을 말한다. 스트레스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방어메커니즘으로 이해하면 쉽다. 정신분석학자로서 프로이트와 함께 아동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로 극복해야 할 심리사회적 위기와 발달 과업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영아기 때는 ‘신뢰감 대 불신감’이란 위기가 존재하고 이를 잘 극복하면 신뢰감을, 그렇지 못하면 불신감을 얻게 된다는 방식으로 발달 과업의 성취 과정을 설명했다. 정상 발달을 위해서는 그 연령에 적합한 발달 과업을 성취해야 하는데, 납치를 당한 아이들은 그 기간에 이런 성취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납치가 아이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해쳤던 셈이다.
강석훈 전문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2006년부터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2007년 방송된 SBS 의학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의 보조작가로 활동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의학회에서 건강정보심의위원회 실무위원을 맡아 잘못된 건강정보를 바로잡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