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내 진화기술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입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창시한 찰스 칸토 박사는 삼성종합기술원의 초청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명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분자인 DNA와 RNA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약 40억년 전. 초기에는 단순히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분자로 출발해 무수한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물체를 탄생시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진화를 보는 관점도 형태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자연현상의 기초단위인 분자수준의 관점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분자수준에서 인간이 생명체의 진화를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세계 최대 진화공장 가동 중
필자가 운영하는 바이오벤처기업 ‘바이오니아’는 지난 2000년 DNA합성시스템 100대를 가동시킬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유전자공장을 200억을 투자해 건설했다. 이 공장은 하루에 최대 40M(메가, 1M=100만) 염기 길이의 유전자를 자동으로 합성해낼 수 있는 규모다. 박테리아 게놈 길이가 보통 2M, 벼 게놈이 430M, 인간 게놈이 3150M 염기이므로 이제 새로운 생명체 설계가 꿈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재 이곳에서는 하루에 1만5000~3만개의 유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유전자 ‘신제품’을 디자인해 원하는 만큼 대량생산하는 ‘진화공장’인 셈.
요즘 진화공장에서는 인간 단백질을 쉽게 생산할 수 있게 인간 유전자 전체를 재설계해 다시 합성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인간의 단백질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게 되면 성장호르몬이나 인터페론과 같은 바이오의약품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백질의 기능을 알아내 많은 특허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공진화 기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계속 발전해왔다. 그 1단계는 교배에 의한 인공진화다. 약 1만년 전 농경·목축사회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의도적인 교배로 유전자를 재조합해 인간에게 필요한 종자와 가축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교배가 불가능한 종의 유전자를 다른 생명체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단계는 이종 생물 간 유전자재조합에 의한 인공진화다. 1953년 DNA 구조가 밝혀지고 1980년대에 미생물, 식물, 동물로의 DNA 전달이 가능해지자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인간이 키우는 생명체에 넣어 교배에 의해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이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시신에서만 추출하던 인간 인슐린을 대장균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됐고, 인간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미생물을 이용해 생산하는 고부가가치 신산업이 창출됐다.
이제 3단계인 인공진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유전자를 설계하거나 컴퓨터로 계산해 얻은 새로운 유전자를 지닌 인공생명체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게된 것이다.
진화의 분자 메커니즘
사실 시험관내 진화 연구는 생명 탄생의 열쇠를 쥔 초기 분자들의 진화과정을 재현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됐다.
생명 정보는 DNA에서 RNA로, RNA에서 단백질로 전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생명체 이전, 즉 진화 초기 유전자는 DNA보다는 RNA로 돼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RNA는 수산기를 갖고 있어 화학반응이 좀더 효율적으로 일어나도록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자기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들이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미국 코넬대의 조스탁과 조이스 박사는 생명체가 생기기 전 형태라고 추측되는 특수한 RNA를 만들어 1994년 미국과학원상을 받았다.
시험관내에서 진화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RNA를 만들고, 이 중 원하는 기능을 가진 RNA를 선택한 다음, 이를 다시 증폭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된다. 그런데 RNA보다는 DNA가 화학적으로 합성하거나 증폭하기 쉽다. 따라서 시험관내 진화는 먼저 다양한 종류의 DNA를 합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DNA는 화학합성법을 이용해 합성한다. 미국 록펠러대 메리펠드 박사가 고안해 1985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화학합성법은 단백질이나 DNA처럼 특정한 배열로 길게 연결된 생체고분자물질을 합성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0.1~1mm의 실리카나 폴리머 알갱이 같은 미세한 고체표면에 DNA 염기 하나를 화학적으로 붙여놓고 여기에 A, T, G, C의 4가지 염기를 넣어 하나씩 붙여나간다. 물론 이때의 염기는 우리 몸 안에 있는 DNA 염기와는 달리 쉽게 반응할 수 있게 화학적으로 변형시킨 형태다. 반응이 끝난 후 실리카 알갱이를 씻어내면 합성된 DNA는 실리카 표면에 붙어있고 다른 모든 불순물은 제거된다. 마지막으로 합성된 DNA를 실리카 알갱이에서 떼어낸다.
그런데 화학반응의 특성상 반응이 항상 100% 일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화학합성법으로는 150개 이상의 염기를 갖는 긴 유전자를 합성하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100개의 염기로 구성돼 있는 DNA를 합성할 때 한개의 유전자를 붙이는데 98%의 효율로 붙인다 해도 ${0.98}^{99}$=0.13, 즉 최대 13% 정도의 수율밖에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긴 유전자를 화학적으로 합성할 경우 100개 이하의 염기서열을 갖는 모든 종류의 DNA를 여러개 합성한 다음 효소로 연결시킨다.
화학합성법을 자동화시킨 장비가 바로 DNA자동합성기다. DNA자동합성기로 50개의 염기배열을 갖는 모든 종류의 DNA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50개의 자리마다 A, T, G, C의 4종류 염기가 올 수 있으므로 ${4}^{50}$=${2}^{100}$≅${10}^{30}$, 자그마치 ${10}^{30}$가지의 서로 다른 염기서열을 갖는 DNA가 합성된다.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가능한 모든 염기배열의 유전자를 간단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염기배열의 변화로 다양한 유전자풀이 생성되는 시험관내 진화의 1단계다.
수백만 년 진화 한달 내로 압축
1단계에서 합성한 DNA에 RNA중합효소를 넣고 시험관 내에서 전사(transcription)시켜 각 DNA에 상보적인 다양한 RNA들을 만든다. RNA는 염기배열에 따라 고유한 구조를 가지므로 이렇게 합성된 모든 RNA는 각각 다른 구조를 갖게 된다. 아마도 태초에 이런 다양한 분자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제 시험관내 진화의 2단계. 특정한 물질이 고정화돼 있는 컬럼에 다양한 RNA들을 통과시켜 그 물질에 친화력이 강한 RNA만을 골라낸다. 이 과정에서 특정 물질에 반응하는 RNA만이 ‘선택’되는 것이다. 컬럼에 어떤 물질을 넣느냐에 따라 선택되는 RNA도 달라지므로 원하는 성질을 갖는 최적 RNA들을 선택할 수 있다. 다윈이론의 핵심인 적자생존이 바로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셈.
이렇게 선택된 극소수의 RNA에 다시 역전사효소를 가해 상보적 DNA 서열을 만든 다음, 이를 수십억배 증폭시킨다. 바로 이것이 개체수 증가에 해당하는 진화의 3단계다.
DNA를 시험관 내에서 증폭시킬 때는 효소합성법(PCR)이 쓰인다. 이는 생체 내에 있는 DNA중합효소를 이용해 기존 DNA와 염기배열이 같은 DNA를 복제하는 기술로, 유전자증폭법이라고도 한다. 수천~수만개 염기의 긴 DNA도 1~2시간 내에 정확하고 값싸게 증폭할 수 있는 효소합성법은 1985년 미국 바이오벤처기업 시터스의 과학자인 뮬리스가 기본원리를 발명했다. 뮬리스도 2001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DNA중합효소는 약 1만개 중 하나마다 실수로 엉뚱한 염기를 붙여 점돌연변이를 만든다. 따라서 DNA가 증폭되면서 다양한 유전자풀이 만들어지는 것. 이때 진화 속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엉뚱한 염기를 붙이는 빈도를 100개나 1000개 중 한번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이를 실수유발증폭법이라고 한다.
시험관 내에서 증폭된 DNA로 다시 RNA를 만들고 선택하는 과정들을 수차례 반복하면 자연 상태에서 수백만년에 걸쳐 일어날 진화가 한달 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100억배 다양한 유전자 생성
진화 속도를 고려해보면 점돌연변이는 전 DNA에 걸쳐 무작위로 발생하므로 진화의 효율 면에서 떨어진다. 이는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박테리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복잡한 구조를 합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번식주기가 느린 고등생물로 갈수록 진화 속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분열하는데 30분 걸리는 세균A와 1시간 걸리는 세균B가 생존경쟁에 들어갔을 때 하루 동안 세균A는 세균B에 비해 ${2}^{24}$, 즉 약 2000만배 더 많은 후손들로부터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슈퍼후손을 선발해 진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등생물에서는 점돌연변이보다 좀더 효율적인 진화방식이 필요하다. 바로 ‘성’(sex)이다. 고등생물은 암수의 결합을 통해 DNA 염기배열을 서로 조합함으로써 다양한 유전자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염기배열 변화는 자외선 방사선 열 같은 물리적 요인, 각종 돌연변이 유발 물질 같은 화학적 요인, 교배나 세포내 침투 같은 생물학적인 요인 등에 의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DNA에는 특정한 순서로 연결돼 있는 염기들이 바뀌는 점돌연변이, 염기가 빠져 없어지는 결실, 새로운 염기가 첨가되는 삽입, 염기배열이 서로 바뀌는 재조합 등으로 다양한 형태의 염기배열 변화가 생긴다. 최근 10년간 여러 미생물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많은 외래 유전자들이 들어와 게놈에 합쳐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시험관내 진화에서도 이 같은 원리를 이용해 DNA뒤섞기(유사염기배열재조합) 기술이 개발됐다. 이 기술은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스테머와 아놀드 박사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다른 생명체에서 나왔지만 같은 역할을 하는 유전자들을 섞은 후 DNA를 무작위로 토막내는 DNA가수분해효소를 처리하면 유전자 조각들의 집합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유전자 양 끝부분에 해당하는 짧은 서열을 넣어 증폭하면 유전자 조각들이 무작위로 재조합된다. 스테머와 아놀드 박사는 이 기술을 이용해 베타락타메이즈라는 효소를 반응 속도가 3만2000배 빠르게 진화시키기도 했다. 이는 점돌연변이를 만들어내는 실수유발증폭법을 사용해 반응 속도를 16배로 증가시킨 것에 비해 훨씬 월등하다.
어떤 유전자가 n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성에 의해 자연적으로 재조합된다면 부모로부터 각각 1개의 유전자를 받으므로 2ⁿ종류의 새로운 유전자 생성이 가능하다. 그런데 실험실에서 DNA뒤섞기 방법을 쓰면 부모의 2개 유전자보다 더 많은 유전자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개의 서로 다른 유전자를 사용하고 역시 n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재조합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20ⁿ종류의 새로운 유전자가 생성될 수 있다. DNA뒤섞기가 성에 의한 자연적 진화(2ⁿ)보다 10ⁿ배 다양한 유전자 생성이 가능하다는 얘기. 10개의 조각을 갖고 재조합을 한다 해도 100억배 다양한 유전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DNA뒤섞기는 인위적으로 유전자를 잘게 쪼개 n을 수십~수백배 증가시켜 재조합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계에는 없었던, 생각지도 못한 유전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진화 타임머신이 보여줄 인공생명체
시험관내 진화는 결국 미래에 발생할 진화를 현재로 앞당기는 ‘진화 타임머신’인 셈이다. 이제 진화 속도는 과거에 지구에서 진행됐던 진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이로써 인간이 아니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어떤 유전자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화성의 생태계를 변화시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다. 최근 화성에서 두 대의 탐사로봇이 활동하면서 화성에 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화성에서 살 수 있는 생명체는 지구에는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생존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화성의 환경 조건을 알아낸 다음, 실험실에서 화성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 유전자를 빠른 속도로 진화시킨다면 화성에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또 지구의 환경문제 해결도 가능해질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는 이산화탄소는 인간이 빠른 시간에 배출량을 늘렸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이런 환경에 적응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이대로 간다면 미래에는 이산화탄소가 많은 지구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한 생명체가 등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탄소동화작용을 5% 정도 더 빨리 하는 새로운 유전자를 갖는 녹조류 미생물이 탄생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시험관내 진화로 이 같은 미생물을 미리 만들어 바다에 번식시킨다면 지구온난화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인간 활동으로 만들어진 다이옥신 같은 독성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생명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수백만년 뒤에는 다이옥신을 분해하는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험관내 진화기술로 다이옥신 분해 생명체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자 의도대로 진화된 인공생명체를 과연 어느 수준까지 제조할 수 있을까. 이미 전세계 바이오의약품 공장에서는 인간의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인공대장균과 효모들이 자라고 있다. 또한 농약을 분해하는 미생물의 유전자, 곤충의 독소를 가진 유전자 변형 식물들이 전세계 농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앞으로 시험관내 진화기술이 진화의 시계를 얼마나 앞당길지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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