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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발전의 기틀 마련한 초창기의 원자력연구

최형섭 회고

6,70년대 활발했던 원자력연구는 이후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 이 연구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이 우리 과학기술계를 주도해온 것만 봐도 그러하다.

내가 정식으로 원자력 연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은 1962년 4월 원자력원 산하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사실 59년 3월 1일 원자력연구소가 발족하면서부터 원자력원 초대원장 김법린씨로부터 연구소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기는 하였다. 선친과 잘 아는 사이인데다 원자력원에 경남 출신이 많다는 이유로 나에게도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시 나는 "공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생산기술의 기반을 닦는 것도 중요하다"고 완곡하게 그 요청을 뿌리치고 국산자동차주식회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자동차 회사에 들어와 보니 사업이라는 것이 체질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업의 생리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중 4·19혁명이 일어나 그 여파로 원자력원의 원장도 민주당 중진인 김양수씨로 바뀌었다. 이 사람 역시 연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다 민주화 바람이 불어 사무국과 연구소 간의 갈등이 분출되고 보니 이를 수습해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결국 그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1급연구관으로 근무할 것을 수락하였다. 이것이 원자력 연구소와의 첫 인연인 셈이다.

그런데 원자력연구소로 들어가자마자 5·16이 일어나 이번에는 혁명정부의 정래혁 장군으로부터 "상공부에 와서 제철소 계획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금속분야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제철소계획이나 건설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여서 결국 6개월만 일하기로 하고 상공부 광무국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 일로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광무국장이면 2급공무원인데 원자력 연구소에서 1급직위를 가지고 근무하던 터이니 1급연구관이 2급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1급이 2급을 겸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 업무를 관장하던 관리들이 반대했지만 박정희 의장의 직접 명령으로 억지로 떠맡게 되었다.

62년 4월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이 직책은 자동으로 면제되었다. 62년 3월 국내 최초의 원자로인 트리거마크2(TRIGA MARK 2)가 임계에 도달해 이를 이용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할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연구소를 내용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 편판식973.2.17) 이창수 과기처차관과 운용구 원자력연구소장(오른쪽)


60년대 첨단학문「원자핵공학」

55년 한미(韓美)원자력협정 체결과 더불어 그 기반이 조성되기 시작한 한국의 원자력사업은 59년 원자력원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름이 원자력원이지 사실은 한국의 과학 전반을 다루는 고위 과학행정기구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그 산하 연구소에서도 물리 화학 생물 등 기초과학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했다. 돌이켜보면 원자력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집단적으로 순수과학 연구가 최초로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원자력이 첨단 과학기술로 각광받던 시기로, 서울 공대에 원자핵공학과가 신설되고 공과대학의 부지 일부를 양여받아 그 옆에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학부에 원자핵공학과가 개설된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원자핵공학이 대학원 과정에만 있고 학부에는 없다.

어쨌든 원자핵공학이 첨단학과라고 하니 제1회 입학생을 뽑는데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인재가 다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원자핵 공학을 전공한 전문가도 없는 국내 사정에서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수학하고 물리, 그것도 이론물리가 고작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배출된 졸업생들을 받아줄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연구소에 부임했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제1회 졸업생을 모두 연구소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원자력연구소는 정부 산하기관이었으므로 정원에 묶여 해마다 몇명 뽑는 것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이들 연구원들은 조수에 해당하는데 이들에 대한 급여규정이 없으니 채용을 해도 월급줄 길이 없었다. 생각 끝에 사무국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지금부터 잡역부 청소원 경비원들을 일절 채용하지 마시오. 이들에게 줄 급여를 연구원들에게 5천원씩 지불하시오." 그러자 사무국장은 "그건 공금 유용이 됩니다. 잘못되면 징역을 살게 됩니다" 하면서 극구 말리는 것이었다. "징역을 가도 내가 갈테니 국장은 내 말대로 하시오."

이들 졸업생은 원자로공학연구실 재료연구실 전자연구실 화학연구실 등에 배치돼 각자 전문지식을 익혔다. 돌이켜 보면 당시 졸업생들 중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재료분야만 하더라도 미국 알곤원자력 연구소의 정희목 박사, KIST의 고 김기순 박사, 한국과학기술원의 김인섭 교수 등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기순 박사는 내 밑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미국 MIT에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지도교수가 MIT 재료공학과 개설 이래 처음 보는 우수한 학생이라고 자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MIT에서 박사과정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의 탄불 교수 밑에서 중요한 연구를 하던 김박사에게 나는 이렇게 청했다. "고국에 돌아와 우리나라 기술개발을 이끌어보지 않겠소?"

이렇게 하여 KIST로 오게 된 김기순 박사는 광섬유 개발에 참여하여 이 연구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불행히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김박사는 내게 좀처럼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전화로 조수들의 연구지도를 하는 등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연구하는 사람의 귀감이었다.

얼마 전 한국원자력학회의 초청을 받고 내한한 정희목 박사를 만났다. 정박사는 펜실베이니어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후 시카고에 있는 알곤원자력연구소에서 거의 20년간 일하고 있다. 알곤원자력연구소는 미국에서도 지속적인 연구실적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까다로운 곳인데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으니 고국에 돌아와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희망이 있어요. 20여년간 일선에서 일을 해왔는데 돌아와서 소장이니 부소장이니 하고 후방에서 행정이나 하는 것보다 계속 일선에서 연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는 것은 얼마 없지만 제가 경험한 것을 이 땅에 심어놓고 싶습니다."

정말 좀처럼 듣기 힘든 이야기다.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귀국할 때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자기 직위가 무엇인가'이다. 한결같이 소장 부소장 부장 등 직위를 우선시 하던 후배들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미국 과학자문관 방안(65.7.12)앞줄 오른쪽부터 모스맨 AID부처장, 존슨대통령 과학고문 호닉박사, 최형섭, 호닉부인


기술자의 중요성을 깨닫고

취직자리가 없어 방황하던 원자핵공학과 졸업생들의 수용과 함께 원자력연구소의 연구기반 조성을 위해서 했던 또 하나의 조처는 갓 제대한 공군 기술하사관들을 채용하여 이들을 각 연구실에 배치했던 일이다. 제대로 연구를 하려면 연구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연구에 쓰이는 첨단 기기들을 운영하고 정비하는 기술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거의 모든 기기를 해외로부터 들여와야 하는 우리 실정에서 기기들에 대한 정비는 연구의 성패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군 기술하사관 4,50명을 연구소의 기능직으로 채용해 수학 물리 화학 전자공학 영어까지 집중교육을 시켜 각 연구실에 배치했다. 이들 역시 지금은 여러 기업에 진출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술자의 역할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일화가 하나있는데 지금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 있는 안병선 박사에 대한 일화이다. 연구소에 들여온 기기 중에 MCA(Multi Channel Analyzer)라는 기기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값도 비싼 기기인데다 연구원 중에는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애써 들여왔는데 저렇게 방치하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사람을 급히 찾았다. 그때 데려온 사람 이 안병선 박사다.

"당신 이 기계 다룬 적이 있소?"
"다뤄 본 적은 없지만 기계 안을 들여다보면 압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는 그 기계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능숙하게 잘 다루었다. 그 능력을 믿고 즉각 4급연구원으로 채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연구원들 전부가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전원 서울대 출신이었던 연구원들은 "인하대 출신에 다리도 저는 사람을 어떻게 우리와 동일한 4급연구원으로 채용할 수 있느냐"고 극구 반대했다. 그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설득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소 벨연구소에서 단결정(單結晶)을 만드는 사람이 있소. 이 사람이 단결정을 만들지 않으면 어떤 물리학자도 실험을 하지 못해요. 그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제안을 하더랍니다. 자신에게 많은 돈은 필요없지만 꼭 한가지 이것만은 들어줘야 일을 하겠다고. 뭐냐고 하니까 논문을 작성할 때 공동연구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달라고 하더랍니다. 물리학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오. 그렇지만 별수없이 물리학자들은 그를 공동연구자로 올려야 했지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채용된 그는 KIST에서도 전자교환시스템 개발을 위시하여 아주 많은 일을 했다.

네루와 인도의 원자력발전

부임후 학문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모범을 보인다고 해서 낮에는 원자력연구소에서 밤에는 금속연구소에서 분주하게 보내던 나는 63년초 캐나다 정부로부터 금속지르코늄 연구를 의뢰받아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그만두고 캐나다 앨버타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캐나다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64년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인도 봄베이에서 열린 연구용 원자로의 이용에 관한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캐나다 원자력연구소가 있던 초 크리바는 마치 인도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인도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이 사실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참에 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인도로 달려갔던 것이다.

봄베이 근교에 1만5천여명(현재는 3만명 이상)의 연구원이 일하고 있는 트롬베이 원자력연구소는 실로 대단했다. 인도인들에게 거의 신격화된 네루 수상이 원자력성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유명한 물리학자 바바 박사가 차관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도는 캐나다에서 기술을 도입하여 자력으로 캔두 시스템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인도 방문은 나에게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표를 제시해준 사건이었다. 실제 원자력 발전을 건의할 때 연료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자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캔두 시스템의 도입을 고려했다. 나는 인도의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바바 박사를 우리나라에 초청하였고 그도 기꺼이 수락했는데 불행히도 이듬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대신에 연구소의 물리학 연구부장이었던 라마나 박사가 내한하였다. 라마나 박사는 그 후 인도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원자력에 관한 외국의 선진기술 소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인도 방문 직후 우리와 협동하여 원자력 연구를 지원해 줄 외국의 연구소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한미 원자력 쌍무협정에 따라 이미 다수의 연구원들이 미국 알곤국립 연구소에서 훈련받은 바도 있고 해서 원자력 연구소와 알곤국립연구소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하게 되었고 마침내 65년 3월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일하다 죽도록 해주십시오"

원자력 연구의 국제 협력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나는 연구분위기 조성에도 다시 힘을 기울였다.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나의 지론에 따라 연구원들에게 24시간 근무할 것을 요구하였고 어리석을 정도로 공부하는 자세를 요구하였다. 내가 주관하던 재료 분야 세미나는 혹독하기로 유명하였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그것도 모자라면 주중에도 세미나를 강행하였는데, 얼마나 어려웠던지 한번은 한 연구원이 발표하다가 기절을 하기도 하였다. 당사자인 나는 이런 일을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본 사람들의 견해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일례로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현경호 박사가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세미나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발표자는 한결같이 비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최박사님의 끈질기고 열화같은 질문 공세에 모두 땀을 흘렸는데, 더러는 그 공박을 이겨내지 못할 정도였다. 발표자로 지목되면 며칠밤을 지새더라도 준비공부를 하지 않으면 못배길 만큼 힘들었다." 이런 고된 훈련 덕분이었는지 이들은 나중에 미국의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모두들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어차피 말이 나왔으니 이 기회에 현경호 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59년 원자력원이 발족했을 때 원자력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분야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해외에 공부하러 보냈는데 주대상국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에 갔던 사람들 중에는 현박사를 위시하여 김호길(현 포항공대학장, 물리학) 이동녕(현 포항가속기연구소 소장, 물리학) 이관(전 과기처장관, 기계공학) 김호철(현 KAIST 교수, 물리학) 등이 있다.

현박사는 런던 대학에서 학위를 했는데 전공은 전기공학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다. KIST가 설립된 67년에 전기기기 연구실장으로 KIST에 유치돼 왔다가 그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발탁돼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78년 윤용구 박사가 원자력연구소 민영화 작업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다시 KIST 연구위원으로 돌아오게 되어 후임 소장이 거론됐는데 가장 강력하게 물망에 오른 사람이 현경호 박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때 현박사는 이미 불치의 중병(임파선 암)을 앓고 있어 절대 안정이 요구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하루는 그에게 넌즈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절대 안정을 취하고 요양을 해야 하니 그 일은 잊어버리고 병치료나 전념하도록 하시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원자력 연구소였습니다. 그리고 전공도 원자력 분야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 분야에서 일을 하다가 죽도록 해주십시오." 이와 같은 순수한 열정에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원자력 연구에 전력을 다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트리거마크2 연구용원자로


"유가가 5달러 넘으면 경제성 있다"

KIST의 고 천병두 소장 역시 이와 비슷한 열성을 보이며 KIST 도약을 위해 일을 하다가 80년대 초반에 암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밖에도 자신의 사력을 다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과학기술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71년 과기처장관으로 부임한 후 나는 원자력국을 만들었다. 원자력국에서는 원자력을 에너지로 이용하기 위해 윤용구 이병휘씨가 주축이 되어 '원자력발전 15년 계획'을 세웠다. 원자력발전의 본격적인 연구는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원자력원을 만들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그때는 원유가격이 1달러 정도여서 원자력발전에 눈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에너지 정책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던 나는 우연히 스탠퍼드대학에서 나온 에너지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원유가격이 5달러만 되면 원자력 발전에 경제성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멀지않아 원유가격이 5달러가 넘을 것이라 생각하고 원자력발전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원자력개발 15년 계획'의 개요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장기적인 에너지개발 방향을 '원자력 주도형'으로 설정하고 1986년까지는 전체 발전시설 용량의 약 30%를, 그리고 2000년까지는 그 비중을 60%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90만~1백20만 kW급 대용량 발전소를 40여기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우리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를 확보하려면 현재로서는 원자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원자력발전 사업 추진을 건의하던 1960년대 후반에는 도처에서 그 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앞을 다투어 발전소 건설을 자기네 고장으로 유치하려 하였는데 이제는 그와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 잘못이 있기 보다는 우리 전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안전성이나 기술적인 문제 이전에 정부와 국민 서로 간에 믿지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는 위와 같은 구상 아래 대통령에게 제안을 올렸다. "가까운 장래에 원유 가격이 5달러가 넘으면 원자력발전이 경제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공급이 불안정한 원유에 비해 원자력은 공급이 안정되어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이 제안에 박대통령은 즉각적인 추진 명령을 내렸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원자력발전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오일쇼크가 일어났다. 그에 대한 예측은 전혀 없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발빠르게 대응한 셈이 되었다.

원자력발전 계획에서 부닥친 어려움은 기술 문제였다. 원자력발전소를 만들려고 하니 모두 턴키방식(turn-key, 완성품을 인도하는 방식)이어서 10억달러짜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려면 1억5천만달러는 고스란히 엔지니어링 비용으로 외국 용역회사에 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원자력발전을 하려면 우리 손으로 타당성 조사도 해야 하고 기본설계와 상세설계를 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을 갖추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그래서 75년 한국원자력기술개발(주)가 설립됐다.

미국압력으로 좌절된 핵연료 사이클

또 하나 문제는 핵연료의 주기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핵연료를 만들어야할 뿐만 아니라 사용한 연료는 다시 우리가 재처리를 해야 비로소 효율적인 원자력발전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에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그 발전소가 가동하는 동안 소요되는 핵연료비는 건설비의 2배 이상이다. 따라서 핵연료의 안정공급이 무엇보다 관건이 되는 것이다. 한편 원자력발전소를 제공하는 나라는 고가의 발전기기를 수출하는 동시에 장기간의 핵연료 공급으로 수입국을 예속시켜 에너지 공급국으로서 갖가지 어려운 조건까지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핵연료 사이클의 확립과 원자로의 유지보수를 위한 대책 등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핵연료 공급선의 다변화를 위해 캐나다의 중수로 도입, 연료의 자급화를 위한 프랑스와의 협력 사업, 발전시설 부품의 국산화 등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러는 중에 슈나이더 미국대사가 나를 찾아왔다.

"최장관님, 한국에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계획하고 있다는데 다시 생각해줄 수 없겠습니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에서 재처리를 하면 플루토늄이 생산된다. 그렇게 되면 남한에서 원폭을 만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소련이 북한에 원폭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제정치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으니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설명이었다.

"아니 우리가 언제 원자폭탄을 만들겠다고 했습니까? 원자력발전을 하면서 핵연료도 자기가 간수하지 못하고 쓰고난 것을 재처리 하지도 못하면 무슨 발전을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막무가내로 핵연료 재처리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할수없이 그는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미국무부는 76년초 마이런 클라처 해양 국제환경 과학담당차관보서리를 단장으로 하는 교섭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교섭단이 찾아와도 여전히 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습득하겠다고 우기자 급기야는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하루는 박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최박사, 이제 그만 고집꺾고 재처리 그만두기로 합시다. 미국에서 자기네들이 해주겠다고 하니 그만둡시다."
"말도 안됩니다. 방사성 폐기물은 어디에서도 말썽인데 자기네들이 어떻게 해준다는 겁니까?"

국제원자력기구가 프랑스에 압력을 가하고 프랑스에서 기술원조를 해주겠다던 협정을 파기하고 나오자 결국 핵연료 재처리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핵연료를 기공하는 것만은 미국측의 양보를 받았다. 이에 근거하여 76년에 핵연료 개발공단이 세워졌다. 재처리를 해주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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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한국원자력 연구소
  • 기획

    박진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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