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에도 언어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채팅을 하거나, e메일을 주고받을 때,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모두 언어가 사용된다. 이처럼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흔히 ‘인터넷 언어’ ‘사이버 언어’ 혹은 ‘통신 언어’ 라고 부른다. 인터넷 언어도 분명히 자연어이지만 사이버 환경에서의 심리 상태에 따라 점차 자연어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사전에도 오른 인터넷 언어
인터넷 언어의 위력은 옥스퍼드 대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70여년만에 새로 찍은 개정판에 ‘B4(Before)’ 나 ‘ic(I see)’ 같은 인터넷 단어가 당당하게 올랐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 단어를 사용하는지 그 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이제 인터넷 언어도 일상의 자연어만큼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창조적인 인터넷 언어로 쉽게 발전할 수 있는 몇가지 언어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 한글은 영어와는 달리 자모를 모아쓰는 형식이고, 대체로 자모와 발음이 일치한다. 또 어순이 자유롭고, 용언의 형태소 변화가 자유롭다. 한글은 이처럼 사용자 중심적이기 때문에 언어의 축약과 변형, 조합이 쉽다.
자연어는 일상 환경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상대방과 의사소통하는 일종의 도구다. 반면 사이버 언어는 그 사용 환경이 사이버 공간이다. 인간의 마음도 환경이나 문화의 영향으로 바뀌듯이, 언어 역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다. 언어가 좀더 쓰기 쉽고 간편한 형태로 바뀌어 가는 원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의 어떤 특성이 언어의 변화를 가져왔을까. 언어의 시작은 말이다. 글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말을 주고받는 것이 전형적인 언어 사용 방식이었다. 이같은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글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언어 환경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인터넷, 즉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언어 사용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넷 환경에서는 말과 글이 모두 사용되며, 이에 덧붙여 그림이나 동영상의 사용도 자유롭다. 말 그대로 ‘멀티미디어 언어 환경’ 이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 언어가 가져온 충격은 채팅에서 발생했다. 채팅은 자판을 쳐서 실시간 대화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글은 말에 비해서 속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빠른 말을 느린 글이 따라잡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멜’ (메일)이나 ‘방가’ (반갑습니다)처럼 문자를 덜 사용하는 축약이 사용됐다. 또 글에 감정을 살리기 위해 ‘(^-^)’, ‘d*.*b’ 같은 이모티콘(그림말)이 출현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제한적인 언어 환경을 극복하고 감성적인 음성 의미처럼 만들 수 있었다.
최근 인터넷 언어가 널리 확산되면서 품사의 사용 비율이 달라지는 등 언어 사용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최근 중앙대 심리학과에서 실시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언어는 일상 언어에 비해 명사의 사용 빈도가 12% 줄어든 대신 대명사의 사용 횟수는 7%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용언의 사용에서도 동사의 사용빈도는 6% 준 반면 형용사는 7% 늘어났다.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 우리는 대명사를, 글을 쓸 때는 명사를 많이 쓴다. 이는 결국 인터넷 언어가 글을 바탕으로 하지만 말의 특성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동사는 행위나 사건을 표현하지만 형용사는 어떤 상태를 기술하는 품사이므로 인터넷 언어가 정서나 감정 표현에 충실하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서 표현 쉬운 형태
인터넷 언어의 변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채팅 언어에 괴상한 문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ㅎ?㈜λ?ㄸйㄲじズ?_글올ㄹらし?て℉_∽*’ (해 주실 때까지 글을 올립니다)같은 ‘외계어’ 가 출현한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단어의 축약이나 변형을 넘어서 좀더 복잡한 자모와 기호의 조합이 등장했다. 이와 동시에 띄어쓰기도 없고 어미 종결도 모호한 어휘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다. ‘KIN’ 처럼 ‘즐’ 에서 변형의 변형을 거듭하고, ‘KIN’ 의 원래 의미인 ‘즐거운’ 이 어느 순간 ‘놀고 있네’ 와 같은 반어적 욕설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왜 벌어졌을까.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왜 외계어를 사용하는가’ 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모양이 예쁘다’ 라는 대답과 ‘우리만의 언어를 갖고 싶다’ 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특정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은밀한 결속력을 가지려는 심리적 요구가 언어에 반영된 것이다. 이같은 네티즌의 심리적 요구는 사이버 공간의 언어 사용 환경과 맞물려 독특한 언어를 출현시켰다. 대화의 맥락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자연어처럼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만 통용되는 사이버 언어를 갖게 된 것이다.
한 채팅방에서 사용된 인터넷 언어에 대한 조사를 통해 그런 동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앙대 심리학과가 실시한 또다른 실험 결과 그림글을 사용하는 빈도는 채팅에 참가한 다른 참가자의 사용 횟수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했다. 실험자가 그림글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다른 참가자의 5%만이 그림글을 사용한 반면 적정 수준의 그림글을 사용할 때에는 참가자의 23%가 그림글을 사용했다. 아예 처음부터 실험자가 그림글을 많이 사용했을 때는 참가자의 45%가 그림글을 사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결과는 상대방과 같은 언어를 공유하려는 심리적 동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뜻이 없어도 언어가 되는 이유
그렇다면 인터넷 언어는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외계어는 독자적인 음운과 철자 체계가 없고, 형태소·품사·어순의 문법 체계는 전무한 소수를 위한 말글이다. 언어의 문법 체계는 없고 단지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언어적 요소를 조합했다는 얘기다.
외계어는 다시 최근 신조어의 탄생으로 인해 그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신조어 ‘아햏햏’ 와 영상 패러디의 탄생이 가져온 새 풍속도다. 한때 외계어가 채팅 언어를 장악하였다면, ‘스타쉬피스’ ‘꽁기꽁기’ ‘아햏햏’ 같은 신조어가 게시판이나 블로그의 유행어로 자리잡고 있다. 새로운 어휘의 공통점은 단어에 특정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언어 관습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이다. 특히 ‘아햏햏’ 는 뜻없는 단어로 많이 쓰인다. ‘아햏햏’ 라는 표현이 가진 뜻은 어휘 그 자체보다는 대화의 줄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신조어의 의미는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집단이 공유한 공감대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어의 진화 과정은 사이버 공간에서 인간 심리가 진화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축약어가 자연어를 사이버 환경에 적응시킨 언어라면, 외계어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상징체계를 갖고 싶은 심리에서 태어났다. 신조어는 아예 자연어의 틀을 깨고 사이버 공간에서만 통용되는 의미를 갖는다.
인터넷 언어의 심리
‘메일’ 이란 단어는 ‘편지’ 와 같은 뜻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메일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편지라는 단어보다 이해 속도가 느린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메일’ 을 ‘편지’ 보다 더 빠르게 이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반갑습니다’ 보다 ‘방가방가’ 가 더 쉽게 다가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괴상한 인터넷 언어가 일상어보다 더 빨리 떠오른다면 분명 인터넷 언어가 네티즌의 마음에 자리잡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특히 커뮤니티 중심의 사이버 공간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사이버 공간에서 쓰이는 언어는 비교적 제한된 감각과 소통 경로 안에서 운용된다. 그래서 인터넷 언어는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을 최대한 간결하고 생동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사이버 공간에서는 공통의 화제가 모든 소통의 중심에 있다. 공통의 주제에 이끌린 네티즌들은 자신들끼리만 통용되는 언어를 만들어 그 의미와 줄거리를 공유하려 한다. 따라서 이런 성향은 차별화되고 전문화된 언어를 양산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언어는 기존 언어의 형태와 의미를 처리하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사이버 세계에서 네티즌들의 대화 방식은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이버 언어를 알아듣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어를 사용하는 것 만큼 편해졌을 때 인터넷 언어는 완전히 독자적인 언어로 자리잡을 것이다.
현재의 자연어를 좀더 진화한 인터넷 언어가 대체하게 된다면 후대 사람들이 지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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