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다섯 개짜리 대형 호텔이 즐비한 서울 소공동에는 ‘양복거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수십 년 경력의 재단사들이 몸에 꼭 맞는 양복을 만들어 주는 맞춤양복집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양복을 맞추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과 재질에 맞는 옷감을 고른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해서 옷감도 다양하게 준비되기 마련이다.
옷은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자동차, 비행기,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나름대로의 ‘옷’을 입고 있다. 취향에 따라 옷감이 달라지듯, 물건의 특징에 따라 사용하는 재료 역시 달라진다.
재료는 크게 금속, 세라믹, 고분자재료로 나뉘며, 다양한 기능성 재료로 세분할 수 있다. 그중에서 금속 재료는 ‘결정’의 성질을 띤다. 원자가 주기적으로 배열돼 있다는 뜻이다. 주기적인 배열은 일정한 방향을 띠고 있어서 그 방향으로 힘을 가하면 깨지기 쉽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하는 것이 비정질 재료와 준결정 재료다.
무질서는 강하다
‘비정질’이라고 하는 것은 원자가 일정하게 배열돼 있는 게 아니라 무질서하다는 뜻이다.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강도가 세다. 하지만 문제는 덩어리 형태로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비정질은 이미 1930년대에 등장한 개념이지만 30년이 지난 1960년대에 와서야 얇은 막이나 분말 형태로 만들 수 있었고, 1mm 이상의 두께로 만들기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이 또 흘렀다.
물질이 액체 상태일 때는 비정질을 띠지만 고체 상태로 변하면 어떤 일정한 결정을 이루게 된다. 결국 비정질이란 액체 상태 그대로 원자 배열 형태를 유지하면서 고체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액체인 비정질 상태를 그대로 고체로 만들려면 급격히 냉각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냉각 기술이 어렵기 때문에 큰 덩어리 형태로 만들지 못했다. 준결정재료연구단의 김도향 교수는 액체를 비정질 상태로 고화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비정질 상태에서 원자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합력을 높였습니다. 또 원자들이 꽉 차도록 종류를 많이 늘려 서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지요.”
김 교수는 니켈기, 마그네슘기, 구리기, 타이타늄기 합금을 두께 10mm 이상의 크기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금속 비정질 합금을 만들려면 비금속 원소를 첨가했지만, 니켈기 비정질 합금의 경우 금속 원소들의 조합만으로 우수한 비정질 형성능력을 가져 덩어리로 만들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미국공군연구소(Air Force Lab.)와 함께 차세대 전투기의 외장재로 쓸 니켈기 비정질 합금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세라믹의 한계를 넘어
비정질 합금을 외장재로 사용하려면 제품의 모양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료가 단단하면서도 늘어나는 성질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 늘어나기 전에 깨진다. 김 교수는 이런 단점을 ‘상분리 현상’으로 개선했다. 물과 기름을 섞으면 비중 차이로 인해 서로 나눠지는 것처럼 비정질 합금에서도 상분리 현상이 나타난다. 상분리 현상이 일어나는 합금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지만 상분리 현상이 일어나는 비정질 합금은 더 빠른 속도로 냉각해야 하고 합금 성분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김 교수는 이런 점을 개선해 새로운 재료를 만들어 냈다.
“지르코늄기, 타이타늄기, 구리기 합금에서 상분리 비정질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합금을 개발해 합금 조성에 대해 특허를 출원했어요. 특히 상분리 비정질 지르코늄기 합금은 최근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실렸어요.”
지금까지 세라믹 재료는 잘 깨지지 않는 유리나 도자기 재료로 널리 활용돼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김 교수는 금속 비정질 합금에서 상전이 현상을 처음으로 구현해 세라믹 재료의 활용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 높은 강도와 연성이 필요한 구조용 재료, 완충재나 필터 재료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가볍고 단단하게
준결정 구조는 원자의 배열이 황금비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1984년 미국규격표준국(NBS)의 존 칸 박사가 대칭성을 띤 원자배열의 주기성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비정질 구조가 발견된 지 무려 50년이 지난 뒤였다. 준결정 구조의 재료 역시 비정질 재료와 마찬가지로 강도가 높다. 비정질 재료와 비교해 깨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기전도도와 열전도도가 낮고 부식이 잘 안돼 합금소재로 많이 연구되고 있다.
김 교수는 마그네슘과 같은 경량 합금에 준결정 구조를 적용하면 고강도의 합금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준결정을 이용한 마그네슘 고강도 경량합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마그네슘 합금은 알루미늄보다 강해 쓰임새가 넓지만 내식성, 내열성이 낮고 원하는 형태로 만들기가 어려워 사용하기 어려웠는데, 준결정 강화 마그네슘 합금은 일반 마그네슘 합금에 비해 강도는 1.5배, 연신율(끊어지지 않고 늘어나는 정도)은 2배로 향상됐다. 특히 400℃가 넘는 고온에서도 성질이 변하지 않아 고온에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이에 따라 가벼운 재료가 필요한 자동차, 항공기 등의 재료로 연구되고 있다.
“우리 연구단에서 설계하고 개발한 비정질, 준결정재료들은 휴대전화나 MP3 플레이어, 노트북 등 소형 전자제품의 외장재뿐만 아니라 높은 강성이 필요한 방탄복, 대전차 미사일, 우주왕복선 등 방위산업이나 우주개발에도 이용 가능합니다. 용도에 맞는 맞춤형 재료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 우리 역할입니다.”
좋은 옷감이 양복의 편안함을 더해 주듯이 좋은 재료는 제품을 더 뛰어나게 만든다. 김 교수는 ‘소리 없이 세상을 바꾸는’ 재료 설계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무슨 재료든 맞춰 드립니다 - 김도향 교수
“힘든 일을 피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지요. 그래서 사람들 어려운 것을 피하려고만 하지요. 하지만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결실은 눈앞에 와있답니다.”
김 교수가 금속공학과 인연을 맺은 때는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면서 전자, 항공, 자동차 분야의 산업이 크게 부각되고 있을 때라, 앞으로는 새로운 재료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해서 금속공학의 길로 뛰어 들었다. 예상대로 산업 발달이 활발해지면서 재료공학 분야는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갔다.
김 교수는 1986년에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준결정재료와 인연을 맺었다. 전자현미경을 다루면서 기존의 재료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는 준결정재료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밤에는 전자현미경 관찰에, 낮에는 이를 해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준결정재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창의적진흥사업단에 선정되면서부터다.
두께가 10mm인 니켈 합금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합금은 기존 합금에 비해 3배 이상 강하고, 쉽게 부식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만드는 공정이 단순해 산업에 적용하기 쉬웠다.
마그네슘 합금 개발도 주목받았다. 마그네슘 합금은 알루미늄보다 강해서 쓰임새가 많지만 원하는 형상을 만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김 교수는 세계 최초로 준결정을 이용한 ‘마그네슘 고강도 경량합금’을 개발했다.
김 교수는 이런 연구개발의 성과로 국제특허 4편, 국내특허 15편을 출원하고 해외 저널에 15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기계적 특성이 우수한 준결정 및 비정질 강화 복합재료 개발’이라는 연구 성과로 한국과학재단이 선정하는 ‘2005년 대표적 우수 연구성과 50선’에 선정됐다.
“정보통신기술, 생명공학기술, 우주항공기술 등의 발달은 새로운 부품과 재료를 개발하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부품의 성격에 적당한 재료를 사용했다면 이제는 부품의 성격에 꼭 맞는 재료를 새로 설계해서 만드는 맞춤식 재료설계를 도입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