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은 오랫동안 원자와 분자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분자 속 공간을 ‘어떻게 비워낼 것인가’입니다. 10월 8일(현지 시각),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금속-유기 골격체(MOF)’ 개발에 선구적 역할을 한 3인의 화학자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습니다. ‘분자 수준에서 건축물을 짓는 법’을 개척한 자들입니다.
노벨 화학상 기사를 읽기 전, 잠시 과학동아 2025년 1월호를 펼쳐볼까요. 과학동아는 올 1월부터 노벨상을 예측하는 연재 기사 ‘미리 보는 노벨상’에서 미래 수상 분야를 점쳐 왔습니다. 그중 첫 화에서 이미 이번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인 금속-유기 골격체(MOF)의 수상을 예견한 바 있죠. 당시 과학동아가 예상했던 수상자 기타가와 스스무 일본 교토대 교수와 오마르 야기 미국 버클리캘리포니아대 교수 2인을 비롯해, 리처드 롭슨 호주 멜버른대 교수까지 총 3인이 실제로 2025년 노벨 화학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미 수상이 점쳐질 만큼 대단한 연구 성과였다는 뜻이죠.
10월 8일 노벨위원회는 노벨 화학상을 발표하면서 MOF 연구자들을 두고 “이들의 연구는 인류가 원하는 성질의 물질을 설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과연 MOF는 정체가 뭐길래 새 시대를 연다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헤르미온느 마법 가방’처럼 공간 만드는 MOF
화학 반응이 일어나려면 우선 분자들이 만나야 합니다. 이때 고체 물질은 내부에 분자들이 이미 빽빽이 들어차 있어 반응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고체 물질 내부에도 분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어떨까요? 나아가, 그 통로의 크기와 화학적 성질을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다면요?
MOF(Metal-Organic Framework)는 이런 상상을 현실로 가져왔습니다. MOF는 기체와 같은 화학 물질이 흐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가진 분자 구조입니다. 비결은 금속(metal)과 유기물(organic)의 팀워크(framework)입니다. MOF 구조를 띤 물질 속 금속 이온이 건물 모서리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기다란 탄소(C) 기반 유기 분자가 이 주춧돌을 엮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마치 정교한 대들보를 세우듯, 금속과 유기물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내부에 나노미터 크기의 구멍이 무수히 뚫린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규모는 놀랍습니다. MOF 1g의 표면적을 모두 펼치면 최대 7000m2에 달합니다. 축구장 넓이만 한 면적이 손톱만 한 물질 안에 접혀 있는 셈입니다. 이를 두고 노벨 화학상 위원회 위원장인 하이너 린케 스웨덴 룬드대 나노물리학과 교수는 “겉은 작지만 속이 넓은, 영화 해리포터 속 헤르미온느의 마법 가방과 같은 화학 구조”라고 비유하기도 했죠.
헤르미온느의 마법 가방이 소설과 영화 속 공상이라면, MOF는 실제로 작동하는 과학입니다. 이 구조의 진짜 놀라운 점은 무궁무진한 ‘설계 가능성’에 있거든요. 금속 이온과 유기 분자의 종류를 바꾸면,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원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조합이 가능하죠.
무기물과 유기물의 융합, 분자 건축의 탄생
MOF의 역사는 1980~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화학자들은 금속과 유기 분자를 결합하면 흥미로운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들은 대부분 불안정했고, 용매를 제거하면 쉽게 무너져버렸죠.
MOF 개념은 1989년 롭슨 교수가 처음 개발했습니다. 롭슨 교수는 탄소 원자가 각각 네 개의 다른 탄소 원자와 결합하는 다이아몬드 결정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금속인 구리 원자가 유기 분자로 연결된 피라미드형 소재를 설계했습니다. MOF의 탄생이었습니다.
롭슨 교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안정적인 다공성 고분자 합성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특정한 기하학적 구조를 가진 금속과 유기 분자를 조합하면 예측 가능한 3차원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분자 설계’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이용해 청사진을 그리듯, 화학자도 원하는 분자 구조를 미리 설계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었죠. 다만 롭슨 교수가 개발한 MOF는 불안정해 쉽게 붕괴되는 단점을 지녔습니다.
롭슨 교수의 발견 이후, 기타가와 교수는 MOF 분자의 동적 특성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1997년 형태 변화없이 기체를 흡수하고 방출하는 MOF를 만들었습니다. MOF 내부를 채운 기체 분자가 모두 증발돼도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모습을 확인한 거죠. 나아가 스펀지처럼 유연하게 구조가 바뀌는 MOF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실제로 만들어내기까지 했죠. 기체를 흡착하면 구조가 팽창하고, 방출하면 다시 수축하는 식입니다. MOF가 ‘숨을 쉴 수 있음’을 보여준 겁니다. 이런 유연성 덕분에 MOF는 단순한 저장 용기를 넘어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스마트 물질이 될 수 있습니다.
야기 교수는 2000년대 초반 MOF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강한 결합을 이용해 용매를 제거해도 구조가 유지되는 안정적인 MOF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그가 1999년에 개발한 MOF-5는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이어서, 이후 MOF 연구의 표준이 됐습니다. 야기 교수는 MOF-5를 개선해 MOF-210이라는 물질을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물질 단 1g이 2870mg의 이산화탄소를 흡착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습니다.
사막에서 물을, 대기에선 탄소를
MOF의 응용 가능성은 실로 방대합니다.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환경 분야입니다. MOF는 사막의 공기에서 수분을 포집해 식수를 얻고, 배기 가스에서 이산화탄소를 선택적으로 포집하는 데 활용됩니다. 야기 교수팀이 개발한 MOF 기반 장치는 수분 함량이 극히 낮은 사막의 공기에서도 물 분자를 선택적으로 붙잡아 둡니다. MOF의 미세한 구멍들이 물 분자 크기에 딱 맞게 설계돼 있죠.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로서의 MOF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화력발전소나 공장에서 배출되는 가스에는 질소, 산소, 수증기 등 다양한 성분이 섞여 있습니다. MOF는 이 중에서 이산화탄소만을 선택적으로 흡착할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습니다. 마치 특정 열쇠만 맞는 자물쇠처럼, 특정 분자의 크기와 화학적 성질에 딱 맞는 구멍을 만드는 것이죠. MOF 분자 속에 포집된 이산화탄소는 압력이나 온도를 조절해 다시 분리해낼 수 있고, MOF는 재사용 가능합니다.
아직 열리지 않은 MOF의 무한대 가능성
무량한 가능성에도 MOF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습니다. 많은 MOF가 수분에 약해 대기 중에서 안정성이 떨어지고, 대량 생산 비용이 높으며, 장기 내구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일부 MOF는 독성이 있는 금속을 사용하기 때문에 생체 적용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낙관적입니다. 실제로 MOF 연구는 계속 진화하고 있거든요. 최근에는 빛에 반응하는 MOF나 자기 치유 능력을 갖춘 MOF까지 개발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MOF들을 층층이 쌓아 복합 소재를 만드는 연구도 활발합니다. 노벨위원회 역시 수상 발표에서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MOF가 단순히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물질이 아니라, 무한한 조합이 가능한 ‘분자 설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것이죠. 알파벳 26자로 수없이 많은 문장을 쓸 수 있듯, 제한된 구성 요소로 끝없는 기능성 물질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빈 공간이 때로는 가득 찬 것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 2025년 노벨 화학상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든 과학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 MOF라는 빈 공간은 인류가 직면한 환경 위기를 해결하고, 에너지 문제를 극복하고, 질병을 치료할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세 명의 화학자가 연 분자 건축의 문을 통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혁신이 쏟아져 나올지 기대해 봐도 좋겠습니다.
한 눈에 보는 노벨상
MOF의 기초가 된 ‘다이아몬드’ 구조
과학의 발견은 대개 자연의 모방에서 시작한다. 노벨 화학상을 거머쥔 ‘금속-유기 골격체(MOF)’ 또한 자연에 존재하는 구조를 본따 만들어졌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물질 중 가장 단단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지닌 ‘다이아몬드’다. 리처드 롭슨 호주 멜버른대 교수는 다이아몬드 구조를 바탕으로 최초의 MOF를 제시했다.
다이아몬드는 탄소(C) 단일 원소로 이뤄진 물질로,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각 탄소 원자는 모든 인접 원자와 공유 결합을 하며 정사면체 구조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정사면체 구조 덕에 다이아몬드 내부에는 공간이 확보돼 있다. 롭슨 교수는 금속(구리 이온)과 유기물(나이트릴기)을 섞어 이 구조를 재현했다. 이는 최초의 MOF가 되며 현재의 MOF 발전의 서막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