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액체. 석유나 고급 와인보다 더 귀하다고 알려진 액체. 바로 ‘혈액’이다. 수술 현장, 응급 상황에서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는 혈액은 자주 부족 사태를 겪는다. 그러다보니 과학자들이 인공혈액을 개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24년 7월 1일, 일본 나라현립의대 연구팀은 직접 개발한 인공혈액을 선보였다. 이들이 만든 ‘보랏빛’ 인공혈액은 앞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까.
인공혈액 연구의 최전선을 둘러봤다.


일본서 개발한 인공혈액
보랏빛을 띠는 이유
2024년 7월 1일, 일본 나라현립의대(이하 나라의대) 연구팀의 기자간담회. 하얀 가운을 입은 세 명의 교수가 작은 유리병 사진이 담긴 판넬을 카메라 앞에 들어 보였다. 유리병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플라스틱 컵에 담겨있었다면 자색고구마 라떼라고 착각했을 외형이다. 이 액체의 정체는 ‘인공혈액’이다.
인공혈액은 혈액의 일부 기능을 모방해 수혈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혈액 대체품이다. 혈액은 외상이나 수술로 인한 혈액 부족, 백혈병 등의 질병 치료 목적으로 중요하게 쓰인다. 하지만 헌혈량 감소, 전염병과 같은 이유로 혈액 수급이 불안정해 혈액이 부족한 경우가 생긴다. 수혈할 때 혈액형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희귀 혈액형의 경우 항상 혈액 부족에 시달린다. 이럴 때 인공혈액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저희가 만든 인공혈액이 보라색인 건 디옥시헤모글로빈 때문입니다.” 8월 2일 화상으로 만난 사카이 히로미 일본 나라의대 화학과 교수는 인공혈액의 독특한 색을 이같이 설명했다. 나라의대 연구팀이 개발한 인공혈액은 유통기한이 만료된 혈액에서 얻은 적혈구로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는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이 주재료다. 디옥시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하지 않은 헤모글로빈을 말한다.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하면 붉은색을, 그렇지 않으면 보라색을 띤다. 그래서 인공혈액이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인공혈액 역시 산소와 결합하면 혈액과 비슷한 붉은색을 띤다.
혈액은 인체를 순환하며 다양한 일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온몸 구석구석 산소를 운반하는 일이다. 신체 기관들이 잘 작동하려면 산소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산소 운반 기능은 혈액 내에서도 적혈구가 관여하고, 특히 적혈구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인 헤모글로빈이 이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을 이용하면 혈액처럼 산소를 운반하는 인공혈액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인공혈액을 헤모글로빈 기반 산소 운반체(HBOC·emoglobin-Based Oxygen Carrier)라고 부른다.
미국 바이오 스타트업 ‘칼로사이트’는 적혈구 내부의 헤모글로빈을 캡슐에 넣어 혈액 대신 산소 운반체 역할을 하는 인공혈액을 개발하고 있다. 사진은 칼로사이트 연구실의 모습.
인공적으로 혈액을 만들려는 시도는 HBOC 이전부터 있었다. 1960년대 과학자들은 냉매로 사용되는 과불화탄소를 이용한 인공혈액, 과불화탄소 기반 산소 운반체(PFBOC·Perfluorocarbon-Based Oxygen Carrier)를 개발했다. 과불화탄소는 헤모글로빈처럼 산소를 운반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PFBOC는 체내에 없는 인공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외부 물질로 인식한 인체 시스템에 의해 체외로 금방 제거되고, 뇌졸중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과불화탄소를 이용하는 PFBOC 대신 생체에서 유래한 헤모글로빈을 이용하는 HBOC가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바이오 기업 ‘바이오퓨어’가 1990년대에 개발한 ‘헤모퓨어’가 있다. 헤모퓨어는 소의 적혈구에서 추출한 헤모글로빈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이 제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러시아에서 수술 전후 급성 빈혈 치료용으로 각각 2001년, 2010년 판매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헤모퓨어를 비롯한 초기 HBOC도 부작용은 있었다. HBOC가 혈관 내의 산화질소와 결합해 혈관을 수축시키는 부작용이 발견됐다. 이는 고혈압, 심근경색 등의 질병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었다.
2008년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팀이 헤모퓨어를 포함한 5개의 HBOC를 분석한 결과, HBOC를 수혈한 환자가 실제 혈액을 수혈한 환자보다 사망할 확률이 30% 더 높게 나타났다. doi: 10.1001/jama.299.19.jrv80007 이러한 위험성을 근거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는 아직까지 HBOC의 사용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혈액 내에 가장 풍부한 단백질이지만, 본래에는 적혈구 내부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헤모글로빈만 가져다 쓰면 인체에 위험하죠. 기존의 HBOC는 헤모글로빈 여러 개를 연결하거나 화학적으로 가공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헤모글로빈의 독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헤모글로빈을 캡슐에 넣어야 합니다.” 사카이 교수는 설명했다.
나라의대 연구팀은 헤모글로빈을 리포솜 캡슐로 감쌌다. 리포솜은 인지질 이중층으로 이뤄진 공 모양 구조로, 세포 내에서 물질을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어 의약품에도 많이 쓰인다. 2020년 연구팀은 12명의 건강한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해당 HBOC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한 사람당 각각 100mL의 HBOC를 주입한 결과, 일시적인 발열 외에 큰 변화는 없었다. doi: 10.1182/bloodadvances.2022007977
사카이 교수는 “아직 임상시험을 끝마친 게 아니므로 인공혈액 개발에 성공했다고 말하긴 이르다”며 “향후 3년간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기 위해 추가 임상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음 임상시험에서는 16명의 시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100~400mL의 HBOC를 투여할 예정이다.
한편 미국 바이오 스타트업 ‘칼로사이트’도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아 ‘에리스로머’라는 HBOC를 개발 중이다. 에리스로머는 나라의대 연구팀의 것과 비슷하게 헤모글로빈을 캡슐에 넣은 형태다. 칼로사이트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기술관리자(CTO)인 디판잔 판은 e메일 인터뷰에서 “생물 시스템과 유사하게 인지질 기반 껍질을 이용해 에리스로머의 안정성을 높였다”고 전했다.
에리스로머는 이전의 HBOC가 가진 산소 운반 불량 문제도 해결했다. 혈액은 산소가 많은 폐에서는 산소와 결합하고, 산소가 적은 조직에서는 가지고 있던 산소를 방출한다. 판 CTO는 “이전의 HBOC는 기능적인 산소 운반 시스템이 없어 의도한 조직에 산소를 운반하는 데 실패했다”며 “(에리스로머는) 주변의 산소 농도에 따라 조직에 산소를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에리스로머는 동결 건조해 가루 형태로 보관할 수 있다. 실온에서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식염수에 풀어 사용하면 된다. 판 CTO는 “동물실험에서 에리스로머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의 HBOC가 지닌 문제를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며 “조만간 첫 임상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