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꿈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과학자와 경찰관을 번갈아 그릴 정도로 과학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판검사는 어떠냐는 부모님 말씀에도 아주 단호하게 “법 조문들 주구장창 외우는 건 성향에 안 맞아요”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땐 ‘카이스트’라는 TV 드라마에 흠뻑 빠졌습니다. KAIST가 드라마 속 허구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대학교란 이야기를 듣고서 막연히 카이스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천재들과 함께하는 법을 익힌 학창 시절
부산과학고에 진학하면 카이스트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통물리, 공통화학, 공통수학 등의 문제집부터 사서 경시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운 좋게 학교 대표로 선발됐지만 지역 대회를 망치고 다시 1년 동안 노력한 끝에 중학교 2학년 땐 결국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습니다. 이때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학고 진학을 준비할 수 있었죠.
마침 부산과학고가 한국과학영재학교로 새로 출범하면서 ‘창의성’을 평가하는 서술형 시험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략 방법을 알 수 없는 이 입시를 준비하며 과학동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전에도 과학 전문 잡지를 자주 읽었지만, 이후로는 과학동아를 지속적으로 꼼꼼히 읽으면서 여러 과학 분야의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삼았죠. 과학동아를 정기구독 중이던 도서관에 자주 들러 재미있는 주제의 기사들이 있는지, 표지와 사진을 열심히 찾아본 기억이 납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진학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주위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세상엔 눈부실만큼 지성이 빛나는 소위 ‘천재’라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죠. 각각 한 분야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실력을 가진 친구들이었고, 그런 이들을 처음 본 저는 첫 몇 달 간은 주눅이 든 채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 친구들이 수학과 과학을 좋아할 뿐 보통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2년 반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과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때의 친구들 중 몇몇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의 경험은 이후 카이스트와 서울대에서, 그리고 박사후 연구원으로 지내던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천재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어우러져 공부할 수 있는 큰 자산이 됐습니다.
연구 속에서 만나는 짜릿한 순간들
카이스트에 입학하면 첫 1년 동안에는 전공이 없는 무학과 상태로 지냅니다. 전공별 정원이 정해지지 않아서 원하는 전공을 뭐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두루 이해하고 유연하게 사고하기를 좋아해서, 저는 전공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소재공학(과거의 재료공학)’이란 낯선 학문을 만났습니다. 학과 설명회에서 ‘과학과 공학의 중간 영역, 화학과 물리의 중간 영역을 다룬다’라는 설명을 듣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게 맞는 전공들을 추리다 보니 자연스레 신소재공학 전공을 택하게 됐습니다.
대학원은 학문에 정진해 세상에 기여하는 직업을 갖고 싶어서 입학했지만, 석사 과정 땐 너무 힘들었어요. 연구는 누구도 답을 모르는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임을 대학원에서 깨우쳤죠. 특히 지금의 아내와 박사 2년차 때, 비타민B2(리보플라빈)를 리튬이온전지의 전극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연구는 결과 발표날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스스로 정한 주제로 좋아하는 사람과 연구할 때의 그 재미를 계속 느끼고 싶어서 몰두하다 보니 이렇게 계속해서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청정에너지 확산을 위한 이차전지 연구
현재 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에너지소재연구센터에서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저장하기 위한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이차전지 소재를 원자 단위에서 분석, 개발하는 연구를 수행 중입니다. 풍력, 태양광 등 청정에너지를 적재적소에 쓰려면 초과 생산된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생산된 전기 에너지를 필요한 곳까지 운반하는 에너지 저장 장치 기술이 필수입니다. 그 대표적 저장 장치인 리튬이온전지는 오래전부터 휴대폰, 노트북 등에 적용돼왔고,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리튬이온전지 기술의 발전 가능성이 여전히 크다고 봅니다. 전지의 충전 시간을 줄이고,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문제없이 전지의 성능을 유지하며, 수명을 몇 십년까지 늘릴 수 있도록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 머지 않은 미래에는 지구에 다량 존재하는 원소로 전지를 만들고, 사용하고 난 폐전지를 완벽히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 저는 이렇게 세상에 없는 새로운 화학 반응에 기반한 이차전지 기술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KIST는 이런 첨단 분석을 위한 최신 장비와 전문 운영 시스템이 잘 갖춰져서 연구 환경이 좋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들과 힘을 합쳐 연구하는 지금이 참 재밌습니다.
되돌아보면 운이 좋게도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여러 혜택을 받으며 최고의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큰 무리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로서 제 사명은 제가 지금까지 받은 것들에 보답하기 위해 세상을 보다 이롭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이 실제 제품에 적용되는 단계까지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이민아 KIST 에너지저장연구센터 선임연구원님과 공동 개발 중인 음극 고효율화 기술이나 폐전지 재활용 기술 등을 기업에 이전해서 상용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주시는 저희 연구센터 및 본부 박사님들, 그리고 소중한 청춘을 바쳐 함께 연구에 매진하는 저희 팀 대학원생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방향으로 나아갈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연구자가 아닌 제 개인적인 목표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며 살기’입니다. 이 목표를 지키려면 항상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특히 SNS가 활발한 요즘에는요. 짧게 ‘자유 의지(free will)’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정신은 저와 아내가 정한 가훈이기도 합니다.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대학원 진학을 망설이는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이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과학자는 작가, 예술가, 요리사와 비슷하다. 유사한 문제라도 서로 같은 방식으로 푸는 사람이 없다. 풀어낸 결과엔 과학자만의 가치관, 사고방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과학자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길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연구방식과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는 게 중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1등이 아니어도 충분히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어요. 나만의 방향이 있고 꾸준히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요. 그러니 도전해보세요.
요즘의 어린 친구들은 저희 세대에 비해 삶의 고민이 훨씬 많고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명성을 떨치는 분들 중 다수는, 본인이 그렇게 되고자 어릴 때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생의 큰 방향성이나 가치관을 설정하고, 그 방향이 틀어지지 않도록 굳은 심지를 갖고 순간순간의 선택을 해온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가며 큰 기회나 실패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죠. 그런 경우에도 자신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방향만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어린 시절 상상했던 모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걱정하기보다는 과학의 길로 과감히 나아가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