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맞서 싸울 인류의 새로운 무기가 건설됐다. 서울 신촌에 위치한 연세의료원 중입자 치료센터다. 암은 한국인 사망 원인 1위의 질병이다. 2022년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사망자 4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했다. 종양 제거 수술을 비롯해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을 갖추고 있음에도 암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최근 다양한 무기 가운데 ‘입자 치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입자 치료란 양성자나 중입자와 같은 입자를 가속시켜 고에너지 빔으로 만든 뒤 암 세포를 향해 쏘는 치료법이다. X선을 활용한 기존 방사선 치료와 방식이 동일해 방사선 치료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자 치료는 기존 방사선 치료와 사용하는 재료가 다르다. 입자 치료는 수소(양성자)와 탄소(중입자)를 사용한다.
입자 치료가 전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입자가 가지는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 들어간 입자는 암세포에만 대부분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브래그 피크(Bragg peak)’란 성질 덕분이다. 브래그 피크는 물질에 입사된 빔이 멈추기 직전, 대부분의 에너지를 내놓고 사라지는 지점이다. 기존의 X선 방사선 치료의 경우 몸속 암세포가 있는 부분에 X선 빔을 쬐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면 강한 에너지를 가진 X선 빔이 암세포를 파괴한다. 문제는 X선이 빔의 진행 경로에 있는 정상 세포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반면 브래그 피크 성질을 이용한 입자 치료는 암세포만 정확히 조준한다.
브래그 피크 위치는 빔의 에너지 크기를 통해 조절한다. 그래서 입자 치료를 위해 가속기가 필요하다. 빛의 속도의 70% 수준으로 빠르게 입자를 가속시켜 고에너지 빔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입자 치료의 시작은 약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양성자 입자 빔을 사용해 환자를 치료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 비싸고 거대한 가속기를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 대중적인 치료 방식으로 정착하진 못했다. 일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중입자 치료기는 1994년 일본 방사선의학종합연구소(NIRS)에서 첫 운영을 시작했다.
브래그 피크 성질을 사용해 암과 싸우고자 하는 치료센터는 최근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전세계 입자 치료센터는 2016년, 약 70개였지만 2023년 1월엔 121개로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입자 치료센터는 단 두 곳. 각각 2007년, 2015년에 개소한 국립암센터와 삼성서울병원에 설립된 양성자 치료센터로 중입자 치료센터는 없었다.
실제로 전세계 입자 치료센터 중에서도 중입자 치료센터의 비중은 대략 8% 수준으로 대부분이 양성자 치료센터다. 중입자 치료센터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양성자보다 무거운 중입자를 가속하기 위해선 훨씬 큰 가속기가 필요하다. 실제로 현재 양성자 치료센터의 경우 하나의 치료실을 건설하는 데 약 2~300억 정도 들지만 연세 중입자 치료센터는 총 3개의 치료실을 갖춘 중입자 치료센터를 건설하는 데 총 3000여 억 원을 들였다.
더 무거운 중입자는 더 좋은 치료방식이 된다. 탄소는 수소보다 12배 무겁다. 이 무게 차이가 치료 결과의 차이를 만든다. 중입자는 양성자보다 복잡하게 생긴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다. 무거운 까닭에 입자가 퍼지는 정도가 작아, 타깃에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중입자의 암세포 살상력이 양성자보다 2~3배가량 뛰어나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중입자 치료를 “암세포를 파괴하는 날카로운 명사수”라고 표현했다. doi: 10.1038/508133a
직선, 원형, 곡선으로 만든 암세포 파괴 무기
2023년 2월 7일. 암세포를 파괴하는 명사수, 중입자 치료기를 보기 위해 서울 신촌에 위치한 연세의료원 중입자 치료센터에 방문했다. 김진성 연세대 방사선종양학과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중입자가속기를 보러 지하 4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시간은 낮 12시. 하루 종일 가동되는 가속기는 직원들의 점심시간에만 잠깐 운행을 중단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공간이 높게 트여 있었다. 환자들의 대기 공간으로 사용될 로비였다. 김 교수는 “일반 병원 로비보다 층고가 굉장히 높다”며 “그 이유는 이따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 이곳을 드나들 환자들은 벽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가속기실로 들어갔다.
가속기 안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설치된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중입자가속기는 똬리를 튼 뱀처럼 보였다. 밖에서는 복잡해 보였지만 총 3개로 구역을 구분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온 발생기’에서 선형 가속기로 이어지는 직선 구간이다. 이온 발생기는 노란색 철창 안에 설치돼 있는데, 이곳에서 탄소 입자를 플라스마 상태로 만든 뒤 선형 가속기로 이동시킨다. ‘라이낙’이란 이름의 선형 가속기는 일종의 워밍업 존이다. 라이낙을 지난 이온 입자는 이후 본격적으로 속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4Mev(메가전자볼트 · 1MeV는 100만eV)로 가속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그라미 구조를 한 원형 가속기, ‘싱크로트론’이다. 싱크로트론이란 일정한 궤도의 원 운동을 하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 여기서는 탄소 이온)에 전기장 혹은 자기장을 걸어 그 속도를 빛의 속도 가까이 끌어올리는 원형 가속기다. 세계 최대의 가속기인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충돌기(LHC)도 둘레가 27km에 이르는 싱크로트론이다.
연세 중입자 치료기 싱크로트론 안에서 탄소 이온의 운동에너지는 55.6MeV부터 430MeV까지 높아진다. 딱 떨어지지 않는 숫자에 의미가 있냐고 묻자 김 교수는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물에서 55.6MeV는 0.5cm, 430MeV는 30cm를 이동하는 양의 에너지이기 때문이에요.” 입자 에너지 전달에 있어 사람의 몸은 물과 똑같다. 즉 싱크로트론은 몸속 0.5cm 깊이에 있는 암세포부터 30cm 깊이에 있는 암세포까지 도달할 수 있는 탄소 이온 빔을 만드는 것이다. 김 교수는 “최대 거리가 30cm로 설정된 것은 우리 몸에서 대부분의 장기가 그 안쪽에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은 가속된 고에너지 탄소 이온 빔을 치료실로 전달하는 꼬리 구간, ‘빔 라인’이다. 싱크로트론 한 부분엔 두 갈래 길이 있다. 에너지가 가속될 때는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 탄소 이온 빔이 싱크로트론에서 빠져나가 치료실로 향한다. 빔 라인은 치료실 벽 바로 앞에서 다시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고정 빔, 두 개는 ‘갠트리(회전형 빔)’다.
고정 빔은 고정된 각도에 따라 빔 에너지가 치료실로 전달된다. 연세의료원은 수평형 고정 빔을 설치했다. 반면 갠트리는 360°로 회전할 수 있어 원하는 각도뿐만 아니라 여러 각도로도 빔 에너지를 전달한다. 연세의료원은 고정형 치료실 하나와 갠트리 치료실 2곳을 운영할 예정이다.
전립선암으로 시작, 난치암 치료로 이어진다
가속기실을 빠져나와 세 개의 치료실을 차례로 둘러봤다. 처음으로 들른 고정형 치료실이 2023년 상반기, 첫 운영을 앞두고 있다. 2016년 4월, 연세의료원이 중입자 치료기 도입을 결정한 이후 꼬박 7년 만의 일이다. 센터는 4월까지 가속기가 만드는 빔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하며 데이터를 확보할 계획이다. 센터 밖에서는 보건복지부 등 유관기관의 허가 및 심의가 완료될 예정이다.
고정형 치료실에서 한국 최초로 진행될 중입자 치료는 전립선암 환자를 대상으로 이뤄진다. 전립선암이 선정된 이유에 대해 이익재 중입자치료센터장은 “다른 암과 달리 전립선 암의 경우 다른 ‘정상 장기’가 앞뒤에만 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몸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중입자 치료 때도 가급적 정상 장기를 피해서 입자를 쏘는 것이 좋다. 전립선은 바로 앞에 방광이, 그 뒤에는 직장이 있을 뿐 오른쪽과 왼쪽에 다른 장기가 없다. 따라서 90°의 수직형 고정 빔에서 그대로 중입자를 종양에 쏠 수 있다. 고정 빔은 주로 전립선암 치료에 쓰인다.
회전형 빔을 쓰는 ‘갠트리’ 치료실에서는 빔 에너지 조사기가 환자 침대를 가운데 두고 360°로 회전한다. 조사기가 어떻게 회전할 수 있는지는 고정형 치료실엔 없던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야 알 수 있었다. 앞서 가속기실에서는 벽에 가려 빔 라인이 각각의 치료실로 이어지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벽 뒤에 갠트리가 설치돼 있었던 것. 이 갠트리가 360° 회전하기 때문에 갠트리와 연결된 조사기가 원하는 각도로 움직일 수 있다. 거대한 갠트리는 앞서 중입자 치료센터 로비 층고가 높게 건설된 이유였다. 지하 5층부터 3층을 터 설치했음에도 갠트리가 들어올 수 있는 적정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 지하 4층의 층고를 높인 것이다.
갠트리는 고정형 빔보다 더 어렵고, 다양한 암을 치료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특히 간암과 췌장암 치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간암과 췌장암은 수술과 방사선 치료나 항암 치료 같은 기존의 방식만으로 치료가 쉽지 않은 대표적인 난치암이다. 두 곳의 갠트리 치료실은 고정형 치료실이 올해 상반기 첫 진료를 시작한 뒤 각각 6개월 간격을 두고 운영을 시작한다. 난치암을 향해 쏘아질 중입자에 많은 이들의 염원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