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 ‘즐거운’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리고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에서 건설 중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의 이름이기도 하다. 중이온가속기는 ‘기초과학의 열쇠’라고 불리는 장치다. 가속기의 기능은 간단하다. 입자를 빠르게 가속한 뒤 충돌시키는 것이다. 가속하는 입자에 따라 중이온, 전자(방사광), 양성자 등으로 구분한다. 그 중 중이온가속기를 이용하면 무거운 이온을 쪼개거나 붙일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새로운 입자들은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부터 암을 치료하는 연구까지 다양하게 활용된다.
2022년 10월 7일 오후 3시 3분. 라온(RAON)이 저에너지 가속구간 첫번째 빔 인출 시험에 성공했다. 구축 사업이 시작된 지 11년 만에 첫 빔이 터져나온 것이다. 중이온가속기연구소 한쪽 벽엔 이 순간을 기념해 빔 인출 데이터가 인쇄된 종이가 붙었다.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장을 비롯해 70여 명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관계자들이 이 종이 위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시월 칠일 라온이가 첫 숨을 내쉰 생일!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란 메모가 눈에 띈다. 중이온가속기에 ‘즐거움’을 뜻하는 이름을 붙인 이는 이날의 벅참을 내다봤던 걸까.
라온의 가속장치는 크게 저에너지 구간과 고에너지 구간으로 나뉜다.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올해 3월까지 저에너지 구간의 빔 시운전을 완료하고, 활용성 검증기간을 거쳐 2024년 10월부터 저에너지 구간을 이용자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고에너지 구간 구축이 완료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2025년까지 선행 연구개발을 거친 다음 본제품을 제작하고 시운전을 시작한다. 라온에게 2023년 봄은 저에너지 구간 구축이 마무리되고, 고에너지 구간 구축이 시동을 거는 중요한 시점이다. 지난 2월 8일, 대전의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를 찾았다.
쪼개고 또 쪼개면 전에 없던 동위원소가 나온다
“여기 화면에 빨간색 글씨가 뜨면 이제 기자님은 못 나가는 겁니다.”
신택수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실험장치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지장치를 마주하니 신 부장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괜히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방사선 노출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라온의 실험재료 때문이다. 중이온가속기는 수소, 헬륨 등보다 무거운 원자를 가속하는 장치다. 가속된 원자가 다른 원자 또는 물질에 충돌하면 마치 폭죽 터지듯 쪼개진다.
원자 파편, 즉 핵반응 생성물 중에는 희귀한 동위원소가 포함돼 있다. 가속에 이용하는 원자나, 충돌 결과 생성되는 핵반응 생성물 중에는 방사선을 뿜는 불안정한 원자가 있다. 이 때문에 라온의 실험장치들은 방사선을 차폐하기 좋은 지하에 설치했다. 장치를 관리하고 실험결과를 분석할 전자장치는 모두 지상으로 배치했다. 실험동을 드나들 때는 방사성 물질이 손이나 발에 묻었는지 검사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감지장치를 거쳐야 한다.
신 부장의 안내로 대전류 저에너지 희귀동위원소 빔 생성장치 ‘ISOL’이 자리잡은 지하1층 실험구역에 들어섰다. 신 부장은 “ISOL은 쉽게 말해 가벼운 이온으로 이루어진 빔을 빠르게 가속해 무거운 원자를 때리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조약돌과 수박을 충돌시켜 수박을 조각 낸다고 생각해보자.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조약돌을 수박에 던지거나, 수박을 조약돌에 던지거나. ISOL은 조약돌을 수박에 던지는 장치다. 수소처럼 가벼운 원자의 이온을 가속해 양성자 빔을 만든 다음, 이걸 우라늄처럼 무거운 원자에 쏴 우라늄을 쪼개는 것이다.
수박이 깨지고 나면 파편 중 먹음직한 걸 고르면 된다. 이 과정을 ‘희귀 동위원소 빔 분리’라고 부른다. 무거운 원자가 깨져 만들어진 핵반응 생성물 중에서 활용하고자 하는 희귀 동위원소를 골라내는 것이다. 골라낸 희귀 동위원소는 가속장치를 거쳐 빛의 속도의 약 20% 정도로 빠른 희귀 동위원소 빔이 된다. 신 부장은 “2월 말, ISOL의 희귀 동위원소 빔 인출시험을 처음 시행하게 된다”며 “희귀동위원소가 원하는 양만큼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는 “라온을 이용하면 전세계 과학자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희귀동위원소를 더 많이,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이 이유는 ISOL에 더해 소전류 고에너지 희귀 동위원소 빔 생성장치 ‘IF’도 활용하기 때문이다. ISOL과 IF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한 연구시설은 라온이 세계 최초다.
IF는 수박을 조약돌에 던지는 방식을 택한다. 우라늄 등 질량이 무거운 원자를 가속해 탄소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원자에 충돌시킨다. 신 부장은 “무거운 원자가 쪼개지면서 날아오던 속도 그대로 실험장치에 도달한다”고 했다.
현재 세계 중이온 가속기들은 ISOL 또는 IF 한 가지 방식만 채택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중이온가속기 HIE-ISOLDE는 ISOL,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의 중이온가속기 RIBF는 IF방식이다. 2022년 가동을 시작해 라온의 라이벌로 꼽히는 미국의 중이온가속기 ‘에프립(FRIB)’도 IF 방식을 택했다.
ISOL과 IF을 모두 적용하면 각각의 방식이 갖고 있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ISOL의 경우, 한 번의 충돌로 많은 양의 희귀 동위원소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신 그 종류가 제한적이다. 반면 IF는 얻을 수 있는 희귀 동위원소의 종류가 많지만, 희귀 동위원소 빔 분리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류의 동위원소가 섞여 들어갈 확률이 크다. 신 부장은 “ISOL-IF 시스템을 적용하면 앞으로 더욱 더 희귀한 동위원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저에너지 가속구간 56개 가속모듈의 지휘자
ISOL-IF 시스템은 ISOL을 통해 생성한 희귀 동위원소 빔이 가속관을 거쳐 IF에서 다시 한번 더 충돌하는 방식이다. 신 부장은 “저 벽 너머가 바로 저에너지 가속구간”이라며 “이 벽을 기준으로 역할이 나뉜다”고 했다. 신 부장이 가리킨 곳을 보니 ISOL 장치에서 나온 빔라인이 벽을 통과해 옆 방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실험구역에서 저에너지 가속구간으로 넘어가려면 지하1층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 각 구역을 차단해 둔 이유는 가속기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으로부터 작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계단을 올라오자 정연세 중이온가속기연구소 가속기운영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빔 인출 시험의 총괄책임자다.
“조마조마했죠. 제가 총지휘를 맡았거든요. 빔 인출에 성공하려면 가속관에 영향을 주는 주변의 진동을 제어해야 합니다. 미세한 진동이 어디서 발생하는 건지 찾기 쉽지 않아 고생했죠.”
벽 너머 저에너지 가속구간에는 초전도 가속모듈이 56개 줄지어 있다. 현재까지 성능을 검증한 가속모듈은 총 22개다. 2022년 10월 7일 앞 5개 가속모듈까지 빔을 인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12월 16일 22번째 가속모듈까지 성능 검증을 마쳤다. 뒤에 이어지는 고에너지 가속구간에는 가속모듈 48기가 들어선다. 라온 구축이 완료되면 총 102개의 가속모듈이 자리잡는다. 이를 위해 IBS 중이온가속기연구소의 가속기동은 최대 길이가 550m에 달한다. 연구소 전체 면적은 축구장 137개와 같다. 라온을 한국 역사상 최대 연구시설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에너지 가속구간에 들어서자 금속 통이 줄지어 있는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금속 통 각각이 초전도 가속모듈이다. 가속모듈 내부의 원통형 초전도가속관 양 끝에 각각 음전하와 양전하를 빠른 속도로 교차시킨다. 그 안에 전하를 띈 입자를 넣으면 입자가 빠른 속도로 가속관을 빠져나가는 것이 가속기의 원리다.
차세대 중이온가속기의 트렌드는 가속기의 크기를 작게 줄이면서 더 많이 가속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라온의 가속모듈 안에는 볼펜 하나 정도 길이의 가속관이 들어있다. 여기에 걸리는 전압이 1.5MV(메가볼트)에 가깝다. 짧은 구간에 높은 전압을 안정적으로 걸기 위해 등장하는 키워드가 ‘초전도’다. 물체의 온도를 0K(영하 273.15℃) 가까이 낮추면 물체의 저항이 0이 되는 현상을 초전도현상이라고 부른다. 액체 헬륨 공급 시스템을 총괄하는 기태경 팀장은 “라온은 초유체 상태의 헬륨을 이용해 가속관의 온도를 2K(영하 271.15℃)까지 낮춰 저항을 줄인다”고 설명했다. 빔 인출 시험 성공의 숨은 공로자가 바로 액체 헬륨 공급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가속모듈을 설명하는 또다른 키워드는 ‘공진 가속’이다. 양전하를 띤 이온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전기장을 만나면서 가속이 된다. 이를 이용해 입자를 가속하는 것이 공진가속기다. 정 부장은 “한국에 중이온가속기, 라온이 생긴다는 건 ‘초전도공진가속모듈’을 만들 기술력이 뒷받침된다는 증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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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
2011년 첫 삽을 뜰 당시 라온의 완공은 2017년으로 예정돼 있었다. 이 일정이 2019년 완공, 2021년 완공까지 미뤄지다 2021년 9월엔 다시 2027년 이후로 늦췄다.
중이온가속기는 ‘거대과학(big science)’ 프로젝트다.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준비 단계에서 부침을 겪은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CERN의 대형 강입자충돌기(LHC)의 완공 일정도 수 차례 연기됐고, 미국의 초전도 슈퍼입자가속기(SSC)는 건설 도중에 계획이 폐기된 사례가 있다.
홍승우 소장에게 우리가 거대과학 프로젝트를. 그 중에서도 특히 중이온가속기를 가져야 할 이유를 물었다.
홍 소장은 “남들이 중이온가속기를 갖고 있으니 우리도 만들자는 게 아니다”라며 “대형 가속기라는 도구 없이 기초과학을 하기 어렵기에 건설하는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라온의 목표는 중이온 가속 실험을 통해 초기 우주의 모습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밝히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점점 더 높은 에너지, 높은 전류, 출력의 가속기가 필요해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홍 소장은 그러면서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를 만든 미국의 과학자 어니스트 로런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이클로트론 입자가속기에 대한 연구로 193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에겐 말기암에 걸린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상태가 위중해 살 날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은 로런스는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린다. 자신이 연구하는 가속기로 어머니의 암세포를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로런스의 희망은 적중했고, 어머니는 그로부터 16년 더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면 지푸라기가 주변에 있어야 한다. 홍 소장은 의학 외에도 반도체, 신소재연구 등 중이온가속기가 활약할 분야가 많다고 짚었다.
“기초과학을 하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기초과학을 이루기까지, 그리고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구현되기까지는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연구개발을 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입자가속기는 한국이 그동안 한번도 만들지 못했던 기초과학 시설입니다. 세계 10위권에 드는 한국의 경제력, 그리고 탄탄한 제조업 덕에 이제는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기술로 지을 수 있고, 짓고 있습니다. 이 단계가 끝나면 이곳은 세계 최고의 중이온 가속기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