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60대의 노벨


1901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20세기의 개막을 상징하는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던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남긴 유서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이 처음으로 시상되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부문에서 6명이 수상했다. 물리학상은 X선을 발견했던 독일의 뢴트겐(1845-1923)이, 화학상은 삼투압과 화학반응 속도를 연구했던 네덜란드의 반트 호프(1852-1911)가, 그리고 생리의학상은 디프테리아의 혈청 요법을 개발한 독일의 베링(1854-1917)이 스승인 코흐(1843-1910)를 물리치고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비과학 부문에서는 프랑스 시인인 르네 쉴리 프뤼돔이 문학상을, 적십자를 창설했던 스위스의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동맹을 창립했던 프랑스의 프레드릭 퍼시가 평화상은 공동으로 수상했다.

이로부터 거의 1백년 동안 몇차례(1916년, 1940-1942년)를 제외하고 노벨의 기일(忌日)이 되면 노벨재단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찾아 노벨상을 수상해왔다. 그날의 주인공들은 엄청나게 큰 상금을 받고 세계인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 후학들은 노벨상을 따기 위해 더욱 열심히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노벨상은 20세기 과학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노벨상을 처음 수상했던 사람들은 20세기 과학 발전에 씨를 뿌렸던 사람들이다. 1895년 X선을 발견했던 뢴트겐, 1898년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부(1903년 물리학상), 1882년 결핵균을 발견한 독일의 코흐(1905년 생리의학상), 무선전신을 발명한 마르코니(1909년 물리학상)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노벨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20세기 과학의 지표로 자리잡았다. 또한 수상자의 수에 따라 과학수준이 평가됐기 때문에 각 나라의 로비설도 오갔다. 비록 노벨상이 물리 화학 생리의학 등 3개 부문만 시상했을지라도, 그 수상자와 업적은 20세기 과학을 기술해놓은 사기(史記)나 다름없었다.


노벨상 시상식 장면. 시상식은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거행된다.


세계사를 바꾼 한장의 유서

노벨상은 노벨이 1885년 11월 27일 썼던 유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협심증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던 노벨은 자신의 유산으로 상을 만들어 해마다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5개 부문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시상하기를 바랐다. 그의 유서 중 과학과 관련된 부분만 간추리면 이렇다.

“유언 집행자는 유산을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바꿔 투자하고, 그것으로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매년 전해에 인류를 위해서 가장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 형식으로 분배해야 한다.

상금의 일부는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인물에게,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개량을 한 사람에게,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각각 주도록 한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서,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연구소에서 각각 수여하도록 하고, 상을 수여함에 있어 후보자의 국적을 일체 고려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당부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확인하거든 화장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유서 전문은 nobel.sdsc.edu/alfred/ will-full.htm 참고 바람)

노벨의 재산은 당시의 스웨덴 화폐로 3천3백23만 크로노트(약 7백70만달러)에 달했다. 그때의 물가가 지금의 20분의 1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노벨의 유산은 세금과 친지에게 물려준 것을 빼고 거의 90% 정도가 노벨재단으로 귀속됐다.

그런데 노벨은 유서를 쓸 때 변호사와 상의는 물론, 스웨덴과학아카데미나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유서에서 그의 돈을 운용하라고 지정한 노벨재단도 만들어놓지 않았다. 이뿐이 아니다. 유럽을 떠돌던 노벨은 스웨던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런 까닭에 8개국에 흩어져 있던 그의 재산을 스웨덴으로 다시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편 그의 유서는 상속자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켜, 노벨상 제정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언집행자였던 26세의 라그나르 솔만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벨재단과 노벨상은 빛을 보았다.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른살 때 이탈리아 화학자 소브레로(1812-1888)가 합성한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해 새로운 폭탄을 만들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력이 큰 폭약이었으나 충격과 열에 약한 흠 때문에 다루거나 운반하기에 매우 위험했다. 노벨은 규조토를 사용해 그러한 약점을 없애고, 뇌관을 터뜨려야 터지는 편리한 폭탄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다이너마이트(그리스어로 ‘분말’이라는 뜻)이다.

다이너마이트가 가장 많이 쓰인 곳은 전쟁터가 아닌 토목공사장이었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는 철도, 댐, 광산 등의 건설로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다이너마이트의 수요는 매우 많았다. 그 결과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공장은 21개국에 95개나 세워졌다. 게다가 노벨은 러시아의 바쿠 유전(油田)에 투자해서 큰 돈을 벌었다.

노벨이 인류의 평화와 과학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놓을 생각을 갖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888년 파리의 한 신문에 그가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당시 그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로 착각하고 썼던 기사였다. 그런데 기사는 다이너마이트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을 비꼬아 그를 ‘죽음의 상인(商人)’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때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이너마이트 때문에 목숨을 잃은 동생과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노벨은 거의 전재산을 인류의 평화와 과학의 발전,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문학을 위해 내놓았다.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것도 작용했으리라. 노벨은 유서를 쓴지 1년 뒤인 1896년 1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199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기자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물리학
  • 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