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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바이러스도 있을까

Chapter 2. 정체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을 가진 이 사자성어는 우리가 바이러스를 활용하는 데도 들어맞는다.


바이러스는 1900년경 인류에게 감염병을 전파하는 원인 물질로 밝혀지면서 물리쳐야 할 악(惡)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며 악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비슷한 시기 바이러스와 유사한 전철을 밟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이러스처럼 수억 년간 지구에 존재했고, 수천 년 전 문헌에도 기록돼 있지만 1940년께 화학요법으로 백혈병을 완화하는 첫 치료 방법이 개발된 악성 종양이다. 


악성 종양은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그 수가 무수히 늘어나고 다른 장기로도 전파되는 조직이다. 흔히 암이라 부르며, 뇌에 생긴 악성 종양은 다른 신체 부위에 생긴 것과 특성이 달라 뇌종양이라고 부른다.


두 악의 만남은 1960년대 시작됐다. 암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 건강이 더 안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갑자기 병세가 호전되는 사례가 잇따라 나타난 것이다.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바이러스가 악성 종양에는 오히려 득이 될 수 있다니. 실제로 암 연구자들은 바이러스가 악성 종양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이러스 항암제 연구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정상세포는 감염시키지 않고 암세포만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바이러스 항암제의 효과에 반신반의하던 연구자들에게 1998년 캐나다 캘거리대 연구팀은 바이러스가 암세포만 효과적으로 사멸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연구팀은 건강한 어린이의 분변에서 분리한 레오바이러스가 종양을 퇴화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고, 특히 레오바이러스가 암세포만 효과적으로 사멸시킬 수 있음을 증명해 그간 바이러스 항암제가 인체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후 2001년 캘거리대 연구팀을 중심으 로 ‘국제항암바이러스학회(IOVC)’ 콘퍼런스가 처음 개최돼 지금까지 열두 차례 열렸다. 


그리고 2015년 다국적 제약회사인 암젠이 개발한  ‘임리직’은 바이러스 항암제로는 최초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임리직은 같은 해 유럽에서도 승인됐다.


임리직은 헤르페스바이러스를 이용한 항암제로, 멜라닌 세포의 변형으로 유발되는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치료에 효과가 있다. 헤르페스바이러스는 인체에 감염되면 수포를 만드는데, 헤르페스바이러스의 일부 유전자를 편집해 암세포만 감염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암세포에 들어간 헤르페스바이러스는 수차례 복제돼 증식하고, 그 결과 암세포가 부풀어 오르다 터져 사멸한다. 이 헤르페스바이러스는 정상세포에도 결합하지만 증식하지는 못한다.


임리직의 성공 이후 글로벌 제약회사와 전 세계 대학, 연구소는 바이러스 항암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7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샌디에이고) 공동연구팀은 태아의 소뇌증을 유발하는 지카바이러스로 뇌종양을 퇴화시킨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실험의학 저널’에 발표했다. 또 2018년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제약회사인 존슨앤드존스과 머크는 각각 10억 달러(당시 약 1조1053억 원)와 3억9400만 달러(당시 약 4354억 원)를 들여 바이러스 항암제 개발사를 인수했다.


최근에는 바이러스 항암제를 기존의 항암제와 함께 사용해 치료 효과를 더욱 높이는 방법도 연구되고 있다. 인체에 주입된 항암 바이러스가 암세포에서 자라면 기존 항암제가 이를 인식하고 암세포만 공격해 없애게 하는 원리다. 항암 바이러스로 인해 세포가 사멸할 뿐만 아니라 암세포가 항암 바이러스에 감염돼있는 덕분에 기존 항암제가 이를 더 잘 인식할 수 있어 치료 효과는 배가 된다.


한 예로 2018년 미국임상종양학회에서 미국 듀크대 연구팀은 소아마비 바이러스와 면역항암제인 ‘여보이’를 동시에 처방하면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는 악성 유방암도 치료할 수 있다는 동물실험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바이러스 항암제가 바이러스 자체를 치료제로 활용한 경우라면 바이러스 일부만 사용하는 치료법도 있다. 


대표적으로 바이러스 벡터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를 들 수 있다. 유전자 치료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교체하는 치료법이다. 질병의 근본 원인을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서 난치성 유전 질환을 말끔히 해결할 수 있는 차세대 의학 기술로 각광 받고 있다.


단, 이를 위해서는 첨단 생명공학 기술이 다수 요구된다. 그중 하나가 정상 유전자를 치료가 필요한 체내 세포에 정확하게 운반할 수단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사로 바이러스가 주목받고 있다.
본래 바이러스는 증식을 위해 자신의 DNA나 RNA를 숙주세포의 DNA에 삽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말은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 내로 침투한 뒤 세포의 DNA 일부를 자르고 자신이 가진 유전자를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생명공학자들은 이를 활용했다. 바이러스의 DNA나 RNA 일부분을 원하는 유전자로 바꾼 뒤 숙주세포에 넣어 이 유전자를 치료가 필요한 유전자와 교체하면 어떨까. 바이러스를 유전자 운반체로 쓰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바이러스 벡터다. 


바이러스 벡터 개발과 가장 관련 깊은 바이러스 종은 아데노바이러스와 레트로바이러스다. 아데노바이러스는 DNA 바이러스로 모든 세포에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간 인간은 감기에 걸리면서 아데노바이러스를 많이 접했고, 그래서 아데노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막아버리는 항체를 갖고 있다. 


레트로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인체에 삽입된 유전자가 자손에게도 전달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데노바이러스보다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 암이 발생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레트로바이러스는 1980년대 최초의 바이러스 벡터로 개발됐고, 1990년 인체를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임상시험에 활용되면서 유전자 치료의 실현을 한 걸음 앞당겼다. 하지만 1999년 아데노바이러스 벡터를 투여한 환자가 임상시험 중 사망하고, 2002년에는 레트로바이러스를 활용한 임상시험에서 부작용으로 4명의 백혈병 환자가 발생하면서 바이러스 벡터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제 개발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침체기 동안 바이러스 벡터는 독성이 약해지는 방향으로 개량됐다. 그 결과, 아데노바이러스를 개량한 아데노연관바이러스(AAV) 벡터와 기존의 레트로바이러스를 개량한 렌티바이러스 벡터가 개발됐다.


현재는 개량된 바이러스 벡터들을 활용한 유전자 치료제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가령 레트로바이러스 벡터를 사용한 선천성 면역결핍증 치료제인 ‘스트림벨리스’는 2016년 유럽의약품청(EMA)의 승인을 받아 판매되기 시작했으며, 아데노연관바이러스 벡터를 이용한 희귀 유전성 망막질환 치료제 ‘럭스터나’는 2017년에 미국 FDA, 2018년에는 EMA의 승인을 받아 판매 중이다.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여러 질병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여전히 암과 다수의 난치성 질병들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연구되는 가운데, 인간을 갉아먹는 악으로만 여겨졌던 바이러스가 이제는 거꾸로 선행을 베푸는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202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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