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학과가 정치·교육·과학·산업의 무대 한가운데 섰다. 반도체학과를 증원하겠다는 정부의 발표 때문이다. 교육부는 6월 12일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수도권 4100명, 비수도권 3900명 정도 증원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총 8000명 수준이다. 아직 정확한 규모나 증원 시점은 결정되지 않았다. 증원 찬성과 반대로 진영이 갈라져 치열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학과를 증원하기 위해서는 법을 바꿔야 해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
비수도권 대학에서는 증원 반대 의견이 거세다. 수도권 대학 정원 총량을 늘리면 지방대학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7월 8일 비수도권 7개 권역 대학 총장들이 교육부 장관을 만나 학부 증원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우종 청운대 총장은 “수도권 대학 정원 증원이 아닌 국가균형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산업계에서는 증원 찬성 목소리가 크다. 반도체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학생 수, 교수 수가 모자란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은 지난 10~20년 동안 상당히 커졌다. 유능한 인재가 필요한데 한국 교육은 수요를 못 받쳐주고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인재 풀을 천천히 잘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반도체학과뿐 아니라 반도체 (산업) 인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며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다양한 인재들이 양성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현재 정원 1393명, 앞으로 몇 배 많아질 수도
정부가 반도체학과를 증원하려는 이유는 뭘까. 우선 반도체가 한국 경제의 큰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7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반도체는 국가 안보 자산이자 우리 경제의 근간”이라며 반도체학과 증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반도체 기술을 선점하면 수출 규제 등을 통해 기술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
반도체는 한국 총수출액의 약 20%를 차지한다. 2021년까지 9년째 수출액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 제1의 산업이다. 반도체는 미래 과학기술과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미래 과학 산업에서 반도체는 핵심 부품이다. 특히 AI 실현을 위한 AI반도체도 주목받고 있다.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각종 소프트웨어 기반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IT 업체의 성장에는 반도체가 함께한다.
현재 전국 4년제 대학에서 반도체 명칭이 들어간 학과는 총 28개로 모집 규모는 1393명이다. 수도권에는 총 13개 학과가 개설돼 있다. 이 중 대기업과 협약을 맺은 반도체 계약학과는 2023년 입학 기준 총 7개다. 계약학과는 대학과 기업이 협약을 맺고 (일정 기준 통과시) 특정 학과 졸업생을 채용하기로 약속한 학과다. 장학금이 나오고 취업이 보장돼 인기가 많다. 2006년 성균관대가 삼성전자와 협약을 맺고 처음 신설했다. 2019년 고려대와 SK하이닉스, 연세대와 삼성전자가 각각 협약을 맺고 2021년부터 선발에 들어갔다.
대표적인 계약학과로 꼽히는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졸업생 86%가 삼성전자에 취업한다. 졸업생들은 삼성전자 내부의 연구개발, 기술·설비 부서 등에 취직한다. 나머지 14%는 주로 진로를 바꾼 경우다. 김소영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반도체학과에 들어온 뒤 물리에 흥미를 느껴 물리학 박사를 해서 대학교수가 된 졸업생이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증원될 반도체학과에는 계약학과가 아닌 경우도 많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일반학과(비계약학과)의 취업률은 어떨까. 2020년 기준 반도체학과와 전자공학과가 동시에 있는 대학들 위주로 취업률을 비교해보니 전기·전자공학과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경상국립대는 반도체공학과 57.9%, 전자공학과 45.6% △원광대 반도체·디스플레이학부 60%, 전자공학과 49.1% △위덕대 반도체전자공학전공 59.1%, 전자정보통신공학전공 54.5% △청주대 반도체공학과 62.5%, 전자공학과 68.1%였다. 반도체학과 졸업생들은 반도체 설계 회사를 비롯해 IT기업, 소프트웨어 회사, 반도체부품가공 업체, 설비/소자 업체, 연구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반도체학과와 전자공학과, 다른 점은
반도체학과에서는 전자기학, 전자회로, 디지털신호처리, 논리회로, 자료구조, 시스템 소프트웨어, 컴퓨터 시스템 등을 배운다. 반도체소자·공정·구조와 시스템반도체, 반도체 집정공학 등 학과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반도체’와 관련된 정보들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과 등과 비교했을 때 반도체 시스템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병성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반도체학과가 “전자공학과와 컴퓨터공학 핵심을 융합해 깊게 가르치는 곳”이라고 말했다.
반도체학과에 진학하면 전기·전자공학에 비해 좁은 영역을 깊게 학습한다. 4학년 2학기 과정 중에는 전자공학 대학원에 준하는 수준을 학습하기도 한다. 제어, 소자, 전기 및 에너지 등을 폭넓게 다루는 전기·전자공학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습 범위가 좁다. 진로도 다소 제한적일 수 있다.
다만 학생의 의지만 있다면 전자공학, 소프트웨어 산업으로도 진출이 가능하다. 1~2학년 때 전기·전자공학부와 동일한 기초과목을 수강하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서는 반도체의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관련한 교과목 트랙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전자공학 산업과 연구개발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기본 교육이 이뤄진다. 김소영 교수는 “반도체학과를 졸업한 뒤 AI 분야에서 박사과정까지 하고서,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에 취업한 학생도 있다”고 했다.
반도체학과 선택? 자신의 적성부터 살펴보자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져볼 차례다. 다른 학과가 아닌 반도체학과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우선 물리와 수학을 좋아한다면 환영이다. 반도체학과에서 배우는 많은 과목이 물리와 수학을 기초 지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반면 화학이나 생명과학을 더 좋아한다면 반도체학과 진학은 다시 고려하는 게 좋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물리학Ⅱ’ 과목의 전자기장, 파동과 물질의 성질 등은 사실상 반도체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수업을 들어본 뒤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어떤 진로를 택하고 싶은지도 중요한 문제다. 전기·전자공학부에는 반도체뿐 아니라 로봇공학, 제어, 전력, 통신 등 더 넓은 분야의 과목이 개설돼 있다. 전자공학 영역에서 일하고 싶지만 세부 진로를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면, 전기·전자공학부에 진학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반면 반도체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방향성이 뚜렷이 있다면 반도체학과 진학을 추천한다.
반도체학과에서는 하드웨어 전문가가 되는 토대를 만들 수 있다. 전자공학의 기초를 탄탄히 배우고 반도체에 필요한 다양한 것을 배운다. 메모리반도체, 즉 실리콘 기반 반도체뿐 아니라 센서, 자율주행차, AI 등에 기반이 되는 시스템반도체와 각종 화합물반도체를 만드는 인력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고 있어서 자동화된 기계의 시스템반도체도 필요한 상황이다.
그럼 반도체 대기업에서는 반도체학과 졸업생을 선호할까. 기자의 질문에 반도체 대기업 홍보팀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선호한다. 그래서 반도체 계약학과도 만든 것이다. 여기서는 졸업생이 기업에서 바로 일할 수 있게 실무 중심의 교육을 한다. 전기·전자공학과는 기업에서 커리큘럼에 개입할 수 없지만, 반도체 계약학과는 기업의 기술 전문가와 대학 교수들이 (교육과정을) 같이 짠다. 입사 즉시 전력이 될 수 있어 통상적으로 1~2년 정도의 재교육 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다.”
짧은 기술수명…급변하는 반도체 환경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분야는 급변한다. 다른 어떤 산업·연구 분야보다도 빠르게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시스템반도체 설계기술은 기술순환주기가 8.18년으로 짧다. 2016년에 발표된 ‘기술순환주기 기반의 기술경영 전략수립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IT분야의 기술순환주기(TCT)는 8.8년, 자동차 분야는 11.6년, BT(생명공학기술) 분야는 12.4년 그리고 소재 기술은 21.8년으로 산업별로 달랐다. 특허 출원 연도를 분석해 기술의 경제적 수명을 예측하는 것을 기술순환주기라고 한다. 급변하는 기술 변화에 도전정신을 느끼면 좋지만, 짧은 기술주기를 심적 부담으로 느낀다면 단점이 될 수 있다. 노태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반도체소부장기술센터장은 “변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주기가 빠르다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반도체학과를 졸업한다고 바로 반도체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김병성 교수는 “학부를 졸업한다고 바로 시스템 집적 회로(IC)나 메모리를 설계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AI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학부 과정에서 반도체와 AI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전 세계에 없다고 설명했다. AI와 반도체를 융합하려면 대학원 공부나 산업계 경험 등이 필요하다. 또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과 졸업 후 바로 설계 인력이 되는 것은 다르다. 김병성 교수는 “반도체학과를 졸업하면 전문가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