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와 선사, 역사시대를 통틀어 식량 위기가 발생했던 것은 모두 농업혁명이 있었던 신석기 시대 이후였다. 식량 위기의 근본에는 농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현재의 식량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문명사를 기존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왜 식량 위기 앞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 농업 혁명은 인류 문명의 해가 뜨는 새벽을 알렸을까. 최근 인류학자들은 농사가 인류에게 위기를 안겼다는 주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인류는 빙기가 이어지던 구석기 시대까지 수렵과 채집으로 식량을 구했다. 빙기가 끝나고 시작된 간빙기와 함께 인류는 농업혁명을 이뤄냈다. 더 이상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나운 동물과 싸울 필요도, 계절마다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도 없어졌다. 잉여자원을 저장했다가 농사를 짓지 않을 때 식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개인 재산이 생겨났고, 문명의 발전도 빨라졌다.
농사의 시작에 굳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였던 이유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현재의 식량 위기를 문명사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업혁명을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농사의 시작
인류는 작물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세기와 20세기 중반까지는 농업이 인류 문명 진보의 첫걸음, 즉 인간의 지능 혹은 능력 발달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학계에서는 농업혁명이 오히려 인류 문명사의 새로운 위험요인이었다는 시각으로 보는 인류학자들이 나타났다.
미국의 생태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으로 인해 기아와 불평등 그리고 감염병이 생겼다고 1987년부터 줄곧 주장하고 있다. 농업의 시작을 ‘인류사에서 가장 큰 실수’이며 ‘재앙’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도 농업의 시작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시각을 갖는다.
수렵 채집 사회의 조건을 완전히 재구성할 정도로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영양학적으로 농업혁명 이후보다 열악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농사보다 수렵 채집에 드는 노동력이 더 작고, 효율성은 높았다는 해석이 최근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심지어 농사는 흉작이나 식량 위기의 위험까지 떠안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통념을 뒤엎을 수 있는 시각이며, 현재의 식량 위기 사태를 본다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현재 학계에서는 농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주류 의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불안정성을 가진 농업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농업이 시작된 직접적인 요인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대체로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세 가지는 기후변화와 인구밀도 증가, 동물 밀도의 감소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마지막 네 번째 요인이다. 네 번째 요인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 즉 가축화와 길들이기를 통해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점차 농사에 맞게 교배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길들이기 과정은 수렵채집과 병행된 보조적인 농사의 수준에서 시작돼 5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본격적인 농업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길들여진 동식물이 인간에게 의존하게 된 것처럼 인간도 길들인 동물들과 농작물에 점진적으로 의존하게 됐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농업 이전과 이후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는 발굴지에서는 농업 이후 시기의 유골에서 영양 부족 혹은 노동으로 인한 신체 혹사의 증거가 흔히 발견된다.
농사의 발전
먹고사는 방법에서 문명의 흥망까지
미국의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도 농사가 인류에게 안정과 번영 대신 억압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노예 제도의 시작이 농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곡물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적은 비용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예라는 개념과 제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저장과 계량이 쉬운 곡물이 세금과 재산의 기준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 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이뤄진 이유 또한 노예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스콧의 이런 주장은 국가가 영토 내의 인구를 통제할 수 있다는 영역성이라는 개념이 노예 노동에 의존한 농업에서 시작됐다는 시각을 품고 있다. 현재까지도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라고 판단되는 특성들이 바로 농업에서 시작한 불평등 구조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농업 초기 국가의 흥망은 가축 감염병과 흉작, 토양의 고갈 등 농사와 깊이 연관된다.
스콧은 기원전 약 4500년에 존재하던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 문명의 사례를 자주 인용한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점토판으로 남아 있고, 결국 농업의 실패로 쇠퇴했기 때문인 듯하다. 티그리스강에는 홍수가 잦아 관개시설을 만드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당시 문명에선 노예를 징발해 해결했고 그 과정에서 도시화가 이뤄졌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약 2100년에는 기후가 건조해 토양에 염분이 쌓이면서 밀의 경작이 어려웠다. 대신 염분에 강한 보리가 주된 작물이 됐다. 토양의 염분 축적으로 인해 더 이상 작물을 경작할 수 없어진 시기에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했다. 토양이 회복되면서 인구도 회복하는 듯 했지만, 전성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국가를 성립할 수 있게 한 농업이 결국 농업 활동의 결과, 즉 토양의 고갈로 인해 국가의 쇠퇴를 가져온 것이다.
농사의 현재
식량 위기는 반복되고 있다
농업과 식량으로 인한 흥망은 근대에 들어서도 계속된다. 물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 속의 식량 위기들은 다른 역사적인 배경으로 발생했다. 고대 문명의 식량 위기와는 직접적인 비교가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농업으로 인해 고대 문명에 발생한 위기들이 주는 교훈은 중요하다.
고대 문명의 식량 위기는 초기 농업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일정한 주기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근대 이후로는 농업이 발전했지만 부의 불평등과 전쟁 등으로 인해 식량 위기가 나타났다.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식량 폭동은 흉작 때문이 아니라, 시장이나 교역과 같은 분배의 실패로 인해 일어났던 경우가 많았다. 또 특정 지역 내에서 가격이 높은 곡물의 생산에만 집중하는 단작(monoculture)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직접 경작을 하는 농민과 농지의 주인이 달라 갈등이 발생하곤 했다.
1840년대 후반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근대 농업에서 한 가지 작물만 재배하는 단작과 감염병이 만난 결과다. 당시 아일랜드 전역에서는 한 품종의 감자만을 집중재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감자 역병이 돌면서 역사적인 대기근이 시작됐다. 여기에 더불어 영국 정부가 원조를 제한함에 따라 제대로 된 대책 없이 7년 동안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의회와 지주는 서로 책임을 미루기에 바빴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아일랜드에서는 민족주의가 부상했다.
식량 위기가 국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하고 악화된 사례도 있다. 스탈린이 집권하던 1930년대 옛 소련(현재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발생한 식량 위기다. 옛 소련 전역에서 약 6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으며,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만 약 5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특유의 비옥하고 수분 함유량이 높은 검은 토양(초르노젬) 덕분에 역사를 통틀어 곡창지대로 발달했다. 이런 이유로 옛 소련에서도 식량 공급뿐만 아니라 외화를 벌기 위한 곡물 수출을 담당했다. 정부는 흉작 때문에 곡물 생산량이 계속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수출용 곡물 확보를 위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도 처벌하고 숨긴 곡물까지도 단속하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최근에는 이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농업과 정부 정책, 정부의 대응처럼 구조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새로운 기밀문서를 통해 당시 잘못된 지도자들의 책임을 추적하고 있다. 당시 지도부에 있던 소수의 인물이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원조를 차단한 것이 당시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최근 러시아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된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식량 위기는 가뭄과 홍수 같은 기후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맥락이나 상황과 떼 놓고 볼 수는 없다. 아프리카 남부의 앙골라는 냉전 시대부터 2002년까지 내전을 겪어왔다. 내전은 미국과 옛 소련의 대리전 양상으로 시작돼 30년이나 이어졌다.
아직도 남아 있는 지뢰밭과 소규모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2016년에는 식량 위기가 발생해 1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걸렸다. 또 2020년부터는 해마다 새해 초에 드는 가뭄 때문에 기아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올해 초에도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발생했다.
최근 들어 가장 큰 규모인 수천 명의 기아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나미비아로 이동해 난민 캠프에서 어렵게 버티고 있으나 다시 앙골라로 되돌려보내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부유한 나라들이 매년 버리는 식량의 양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연간 식량 생산량인 2억 3000만 t(톤) 수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교적 작은 규모의 식량 위기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