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 이야기’의 가장 큰 미덕은 책을 펼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진이다. 갯벌에 몸을 숨긴 키조개와 펄에서 노는 짱뚱어의 모습이 갯벌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해주고, 갯가에서 백합과 주꾸미를 잡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이 정겹게 느껴진다.
‘갯벌 이야기’는 그냥 넘겨보면 사진집 같고, 쉽게 읽으면 수필집 같고, 다시 천천히 읽으면 자연도감 같은 다양한 색깔을 가진 책이다. 사진 한장 글 한줄에 자연과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녹여낸 사람은 백용해 한국갯벌생태연구소장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갯벌에서 뛰놀고, 갯벌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다 이제는 환경지킴이 활동으로 갯벌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갯벌 전문가 백용해 소장을 만나봤다.
진흙밭에서 찾은 생명의 신비
인천에서 태어나 서해바다의 햇살과 소금기 속에서 살아온 백 소장은 바닷바람과 갯내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바다는 어린시절부터 그에게 둘도 없는 놀이터였고, 갯벌에서 자라는 게, 고동, 조개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가장 재밌는 놀이이자 하루 일과였다.
대학시절에는 입학선물로 받은 사진기로 갯벌 생물들의 모습을 찍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사진을 잘 찍고 싶어 물리학을 전공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광학까지 배워가며 열심히 연구했고, 생물들의 모습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궁리했다. 게를 찍을 때는 갯벌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드러누워 앵글을 게와 같은 눈높이에 맞춰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은 이렇게 온몸을 던져 찍은 것이기에 박제된 생물도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살아 꿈틀대는 생명감을 갖고 있다.
갯벌 생물에 대한 백 소장의 관심은 사진찍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직접 채집하고 표본을 만들어 연구하면서, 외국에서 동물생태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한국의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특성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까지 끝없는 관찰과 탐사를 통해 하나씩 밝혀냈다. 그가 전국의 갯벌을 다니며 모은 표본만도 5천점에 이른다고 하니, 그동안의 노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백용해 소장은 갯벌사진작가인 동시에 게 행동생태학자로 불린다.
살아 숨쉬는 생명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스스로 개발한 독특한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갯벌을 무대로 살아가는 생물과 사람들의 삶을 고루 엮어 쓴 ‘갯벌 이야기’는 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연구한 그의 장점이 발휘된 결과물 중에는 2003년 방영된 MBC 자연다큐멘터리 ‘갯벌, 그후 10년’ 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1994년 방송된 ‘갯벌은 살아있다’의 후속편으로 만들어져, 갯벌 생물들의 다양한 삶과 변화를 담아 호평을 받았다.
전작 ‘갯벌은 살아있다’ 는 갯벌 생물들을 소개하고 갯벌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제작여건의 한계로 갯벌 생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갯벌, 그후 10년’을 기획하며 도움을 요청한 PD에게 백 소장은 1년 이상의 장기촬영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적어도 1년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촬영해야 갯벌 생물들의 삶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의 요청대로 ‘갯벌, 그후 10년’은 꼬박 1년동안 촬영됐고, 게가 태어나서 죽는 과정을 비롯해 갯벌 생물들의 한살이를 모두 보여줄 수 있게 됐다. 특히 7-8월 보름에만 2-3일간 집중적으로 산란하는 게의 산란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도 전율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갯벌탐사,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게가 워낙 눈이 밝고 민감한 생물이라 촬영이 힘든 점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방해로 자칫 산란기를 놓치게 되면 어미게의 몸에서 새끼게들도 함께 썩어갈 것이 마음 아파 한 때 촬영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게들의 산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일로 그는 좋은 사진과 좋은 연구는 결국 생물과의 교감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한다.
‘갯벌 이야기’는 당시 자연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만난 갯벌 생물과 새만금을 중심으로 한 갯가 사람들의 생활이 주를 이룬다. 우리사회의 대표적 환경문제인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빠질 수 없다. 갯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예전보다 높아졌고 삼보일배 운동 등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지만, 아직은 개발과 경제 논리에 가로막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갯벌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백 소장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 중 하나는 갯벌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다. 갯벌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갯벌을 ‘쓸모없는 땅’ 혹은 ‘임자 없는 땅’이라 생각하고 함부로 드나드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갯벌은 어민들이 ‘바다 농사’를 짓고 사는 생활의 터전이다. 무심코 외지인들이 헤집고 다니는 발걸음으로 인해 어민들은 소중한 농사를 망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최근에는 갯벌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행과 탐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들이 오히려 얕은 지식으로 갯벌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갯벌 생물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 게나 조개 등 먹거리 채집에 나서는 사람들로 인해 갯벌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갯벌을 국가의 소중한 자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선진국들은 특별히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보존한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함께 세계 5대 해안습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바덴해 갯벌의 경우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갯벌 생물들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보장돼 있다.
갯벌 공원은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태계의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해 생물 채집도 엄격히 금지돼 있다. 또한 연구를 위해 갯벌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안내원의 발자국을 따라 갯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경로로 간다고 하니, 세계적인 갯벌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갯벌을 없애는 공사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수천년의 세월을 거쳐 형성된 갯벌을 잠깐의 공사로 없애버리는 21세기 대한민국. 이 속에서 백용해 소장은 교육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남은 희망을 걸고 있다. 그래서 갯벌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갯벌의 소중함을 전하는데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