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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간의 숨결에서 향이 탄생했다

[특집] 이 향에 지구의 기억을 담을 수 있다면

사람마다 향수는 다른 의미를 지닐 테지만, 누구나 좋아하고 꿈꾸던 향기가 있다. 머릿속에만 머물던 향기를 구체화해 하나의 용기 안에 담아낸 향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누군가에겐 매력을 더해 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향은 그런 존재다. 


한때 향수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특별한 사람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요즘에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본인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일상에 깊이 들어왔다. 향을 이용한 디퓨저, 향초와 같은 제품도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향료에 대한 집념, 향수의 탄생으로

 

향과 인간의 만남은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기록은 고대 이집트에서 방향족 수지를 이용해 만든 향이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제사장에서 향을 피웠다. 향수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퍼퓸(Perfume)의 어원은 라틴어 ‘페르푸마레(Perfumare)’로 ‘연기를 태우다’라는 의미다. 고대에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향기가 나는 물질을 태웠던 데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에서도 식물에서 추출한 오일을 이용해 향을 만들어 질병 치료에 쓰거나 방부제로 이용했다. 2005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은 키프로스에서 약 4000년 전 향수 공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향수 공장이다. 유적지에서는 월계수, 계피 등 현지 식물에서 추출된 것으로 보이는 성분이 확인됐다. 연구자들은 이들 성분을 올리브유와 혼합해 향수 형태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람들은 향료를 오래 보관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아라비아에서 수증기를 이용해 향을 보존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명했다. 이 제조법은 십자군 전쟁 등을 통해 ‘장미수’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전달됐고, 유럽에서 더 발전된 제조법을 개발하면서 근대 향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4세기 경 ‘헝가리 워터’라는 이름의 ‘오 드 뚜왈렛’ 풍의 향수가 출현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사용하는 알코올성 향수의 원조다. 향수는 알코올 순도와 향료의 농도에 따라 크게 5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퍼퓸’ ‘오 드 퍼퓸’ ‘오 드 뚜왈렛’ ‘오 드 코롱’ ‘오 후레시’ 순으로 향의 강도와 지속력이 낮아진다. 헝가리 워터는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여왕이 뿌린 향수 냄새를 맡은 이웃 나라 폴란드 왕이 70세가 넘은 여왕을 연모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외에도 당시 유럽에서는 향료에 집념이 매우 강했다. 탐험가 마르코 폴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등은 당시 여왕이나 국왕의 명을 받아 향료와 향신료의 산지를 찾고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탐험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양의 향료나 향신료 산지와 거래를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됐다. 이들 국가가 당대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된 데는 향료의 영향이 컸다.


특히 이 두 나라는 탐험을 통해 얻은 향료를 기반으로 공업을 발전시켜 그때까지 아라비아인에게만 의존해왔던 향료 추출 기술을 습득했다. 머스크 향, 용연 향, 사향을 가죽에 묻혀 제품을 만들었다. 현대에 스파이시 가죽이라고 불리는 가죽 냄새이며 여전히 쓰이고 있다.

 

16세기, 향수의 황금시대

 

16세기에 접어들며 비로소 향수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이주해온 도미니카회 수도원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라는 약국에서 약초로 약을 만들어 판매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약국이다. 이곳에서는 약초와 꽃을 독자적으로 연구하면서 약뿐만 아니라 향료도 개발했다. 당시 유럽의 상류 계급이 모두 이곳에서 맞춤 향수를 주문하게 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수를 위한 고급 향수인 ‘니치 향수’에 대한 열망이 일찌감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나는 ‘박물관’으로 꼽힌다. 고급 향수 및 화장품 브랜드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메디치가는 다수의 통치자와 교황을 배출하는 등 정치, 종교 분야에서 활약했고, 예술 문화 후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급기야 메디치가는 1533년 카트린 공주(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의 혼인을 통해 프랑스 왕실까지 세력을 넓힌다. 이때 카트린 공주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서 조제된 ‘아쿠아 델라 레지나’라는 향수를 지참했다. 카트린은 결혼 후 메디치가 전속 조향사 레나드 비앙코와 함께 프랑스로 갔는데, 레나드 비앙코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근처에 향수 전문점을 세워 대성공을 거뒀다. 최초의 향수 전문점이었다. 이 향수 전문점은 목욕을 싫어하고,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는 프랑스 국민성에 부합돼 번창했고, 오늘날 프랑스가 향수의 종주국이 되는 기반이 됐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 시대에는 향료와 향수가 산업으로 크게 꽃피웠다. 루이 14세는 ‘최고의 향기를 풍기는 제왕’이라 불렸다. 궁정에서는 매일 다른 향수를 쓰는 것이 당연시됐는데, 오렌지 꽃 향수인 네롤리가 애용됐고 히아신스 향수도 인기가 있었다.


한편 프랑스에서 귀족을 중심으로 가죽 패션이 유행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두질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가죽 특유의 동물 악취가 났다.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향료였고, 상인들은 가죽에 향을 입히며 가죽의 가치를 높였다. 현재 향수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남프랑스의 그라스 지방은 본래 가죽제품 생산지였다.

 

근대 향수의 아버지 자크 겔랑

 

이전까지는 천연 향료만을 사용해왔던 탓에 향수는 상류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화학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합성향료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향수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값싼 화학 원료인 에스터로 과일의 향을 낼 수도 있었다.


향수의 대중화가 시작되면서 대중문화에서도 향이 친근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을 원작으로 1939년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연인 레트 버틀러를 만나기 전에 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 드 코롱’으로 양치질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향의 대중화 분위기에서 ‘근대 향수의 아버지’가 등장했다. 바로 자크 겔랑이다. 장 폴 겔랑, 에메 겔랑에 뒤이어 겔랑 가문의 세 번째 조향사다. 가문의 이름을 딴 겔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프랑스의 향수·화장품 브랜드로 1828년 향수 회사를 설립해 300여 개의 향수를 개발했다. 가문 대대로 뛰어난 조향사도 배출했는데, 자크 겔랑은 그중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조향사로 인정받았다. 


향수는 쉽게 말해 향을 가진 물질이다. 화학적으로는 ‘향료를 알코올에 용해해 만든 혼합물’을 의미한다. 어떤 물질들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매력적인 향이 될 수도 있고, 머리만 아픈 악취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수천 가지 종류의 향료에서 조화로운 향료들을 골라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향을 만드는 일을 ‘조향’이라고 한다. 조향하는 사람은 조향사, 또는 ‘퍼퓨머(Perfumer)’ ‘르 네(Le Nez·프랑스어로 ‘코’라는 뜻)’ 등으로 부른다. 조향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다. 작곡가들이 걸작이라 불릴 만한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화가가 일생에 걸친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오랜 세월 고심해야 탄생할 수 있는 것이 향이다. 또 같은 레시피라도 어떤 조향사가 만드느냐에 따라 다른 향수가 나올 수 있다. 같은 요리를 해도 전문가와 아마추어가 만든 음식의 맛이 다르듯, 향도 조향사의 경험과 실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향을 조제할 때 조향사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자크 겔랑은 조향사로 활동하면서 수백 개의 향을 만들었고, ‘파란 시간’ ‘미츠코’ ‘야간비행’ 등 연이은 역작으로 실력을 검증 받았다. 겔랑 향수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자크 겔랑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파리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향수를 패션에 도입했다. 동시에 조향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탄생한 향수가 샤넬, 랑방, 장 파투(빠뚜), 니나 리치 등이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유명 디자이너들이 연달아 향수를 출시하면서 근대 향수산업을 완성했다.


샤넬의 고급스러움, 크리스찬 디올의 화려함, 지방시의 우아함, 이세이 미야케의 모던함. 각 패션 브랜드들을 생각하면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향을 통해 완성됐다. 실제로 이런 브랜드는 새로운 패션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향수를 선보이는데, 향이 브랜드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본인을 표현하기 위해 향수가 쓰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메시지를 향기로 전달하고, 의사소통하기도 한다. 늘 같은 향수를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곳에서 같은 향기가 날 때 그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래서 향수를 뿌리는 일은 자기 자신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로 향을 사용하면서, 향의 의미는 더욱 깊고 다양해지고 있다. 

 

 

※필진소개

정미순. 향수제작사인 지엔(GN) 퍼퓸 대표로 향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조향분야를 선도한 조향사다.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미아 조향 스쿨을 수료했다. 향수 잡지 씨센트를 발행하고 있으며, 지엔 퍼퓸&플레이버 스쿨에서 향수와 항료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aromams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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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과학동아 정보

  • 정미순 지엔(GN) 퍼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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