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향을 피워주시겠습니까?”
얼마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대사다. 오해로 죽을 위기에 처한 궁녀가 오래전 일을 떠올리지 못하는 영조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은 향이었다. 어떤 사물을 보여주거나 어떤 소리를 들려준 것이 아니라, 향을 피워 기억을 소환해낸 것이다. 후각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가장 좋은 감각이다.
문학 작품에서도 향은 종종 기억을 되돌리는 소재로 활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자전적 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프랑스 과자 마들렌과 홍차의 향일 것이다. 어느 날 주인공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다가 그 향에 취해 감미로운 기쁨에 휩싸인다. 그리고 어릴 적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고모가 자신에게 마들렌과 홍차를 내줬던 장면과 함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경험을 한다.
프루스트처럼 어떤 향을 맡고 갑자기 어린 시절의 사건이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람 혹은 장소가 떠오르는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렇게 냄새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현상을 작가의 이름을 따 ‘프루스트 효과’라 부른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냄새를 감지하는 후각신경이 뇌 속에서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와 의식을 담당하는 대뇌 피질로 정보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후각을 ‘기억의 창고를 여는 열쇠’라고 말한다.
치매 환자는 땅콩버터 냄새를 못 맡아
앞서 언급한 ‘옷소매 붉은 끝동’은 필자가 열심히 애청한 드라마라 그냥 지나치고 싶지만, 후각 연구자의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드라마 속 옥에 티가 있다. 일단 드라마 속 영조가 과거 일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고령이었으니 아마도 선향 냄새를 잘 맡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나이가 들면 후각상피와 후각망울의 재생 능력이 떨어지면서 점차 후각기능이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어르신들이 가스불 위 음식이 타는 냄새를 맡지 못해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드라마 속 영조는 치매를 앓고 있는데, 알츠하이머성 치매나 파킨슨 치매의 경우 발병 초기부터 후각기능이 떨어져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선향을 이용해 영조의 기억을 소환해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는 100%, 파킨슨 치매 환자는 90%가 후각 상실을 경험한다. 이에 의료현장에서는 치매 조기선별을 위해 후각검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물론 후각기능을 저하시키는 요소는 많다. 단순 노화일 수도 있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 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도 냄새를 맡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치매의 경우 특정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미국 플로리다대 의대 연구팀은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들이 발병 초기부터 땅콩버터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를 2013년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저널’에 발표했다. doi: 10.1016/j.jns.2013.06.033 이후 ‘땅콩버터 테스트’가 만들어져 땅콩버터 냄새를 감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통해 치매환자를 조기에 선별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발병되면 후각상피와 후각망울의 특정 부위부터 퇴행이 시작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지역 특이성 신경퇴행 현상은 특정 냄새 감지를 담당하는 부위에 순차적인 손상을 초래한다. doi: 10.1186/s13195-020-00730-2, doi: 10.1111/bpa.13033
반대로 환자의 냄새를 통해 치매를 진단할 수도 있다. 영국의 한 간호사가 어느 날부터 남편에게서 특이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냄새가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있는 파킨슨 치매 환자에게 나는 냄새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신경과 치매 전문의들은 모두 간호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후 그 간호사가 암맹평가에서 파킨슨 치매 환자가 입었던 옷과 건강한 사람이 입었던 옷을 냄새로만 정확하게 구별해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후 치매 전문의들은 파킨슨 치매 환자들에게 나는 특이한 냄새를 추출해 2019년 국제학술지 ‘ACS 센트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doi: 10.1021/acscentsci.8b00879
사실 환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로 질병을 진단하는 일은 역사가 오래됐다.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침을 뜨거운 석탄 위에 뱉게 한 뒤 그 냄새를 맡아 병을 진단했고, 중국과 국내의 옛 의학서적에도 환자의 냄새를 통해 병을 진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몸의 신진대사가 바뀌고 정상일 때와 다른 화합물을 분비하는데, 이를 통해 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일례로 당뇨를 앓는 환자는 몸에 글루코스와 아세톤 화합물이 많아져 유성매직 냄새가 난다. 따라서 특정 질환에 걸린 사람의 몸에서 만드는 화학물질을 감지하는 후각센서를 이용하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우리 몸 곳곳에서 냄새를 맡고 있다
우리는 몸속 여기저기에 후각센서를 가지고 있다. 1991년 린다 벅 미국 컬럼비아대 의대 교수는 같은 대학의 리처드 액설 교수와 함께 후각상피에 존재하며 냄새를 감지하는 단백질인 후각수용체를 처음으로 찾아낸 공로로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doi: 10.1016/0092-8674(91)90418-x 이후 우리 몸속 유전자의 무려 2%가 냄새를 맡는 후각수용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doi: 10.1073/pnas.0307882100 2003년 독일 보훔 루르대 연구팀은 정자에도 후각수용체가 있어 난자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밝혔고, 2013년 독일 드레스덴대 연구팀은 정자가 난자가 흘리는 냄새(꽃향·bourgeonal)를 맡아 난자를 찾아간다는 것을 증명했다. doi: 10.1126/science.1080376, doi: 10.1093/chemse/bjt009
이후 많은 연구를 통해 후각수용체가 우리 몸속 다른 조직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계속 밝혀졌다. 이를 이소성 후각수용체라 부른다. 화학물질 센서인 이소성 후각수용체는 우리 몸 여기저기 존재하면서 몸 안팎의 화학물질을 감지함은 물론 이를 자극하는 화학물질을 찾아 조직의 기능을 조절한다.
이소성 후각수용체를 특정 질환의 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 2009년 미국 에모리대 연구팀은 근육에 발현하는 후각수용체를 찾아냈고, 백합향을 이용해 손상된 근육의 분화와 재생을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doi: 10.1016/j.devcel.2009.09.004 2013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등 공동연구팀은 장내에 있는 후각수용체가 장내미생물이 만든 화합물을 감지해 호르몬과 혈압을 조절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doi: 10.1073/pnas.1215927110 간의 지방세포에도 백합향에 반응하는 후각수용체가 존재하는데, 2017년 필자의 연구팀은 연세대 연구팀과 함께 이 후각수용체를 삼나무에서 정제한 오일의 성분인 α-세드렌이란 화학물질로 활성시키면 지방세포를 축소시켜 지방간을 예방 혹은 치료할 수 있음을 밝혔다. doi: 10.1038/s41598-017-10379-x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은 우리 몸 조직에 발현하는 이소성 후각수용체를 찾고 있으며, 이들 이소성 후각수용체를 자극하는 화학물질을 찾아 치료제로 개발하려는 연구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향기로운 백화점, 당신의 충동구매를 유도한다
향기는 마음을 치유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디퓨저에서 퍼지는 향기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향기는 평상시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물론 우울증 치료에도 이용된다. 2020년 필자의 연구팀은 아모레퍼시픽 연구팀과 공동으로 유향(olibunum)이 갱년기 여성들의 우울감과 초조감을 개선하는 데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유향은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선물했다고 알려진 향기다. 반면 아로마테라피에 많이 활용되는 라벤더향의 경우 갱년기 여성들의 우울감과 초조감에 효과가 없었다. doi: 10.5607/en20036
향기가 단순히 냄새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가장 빠르게 간파한 사람들은 기업가들이다. 향기를 이용해 소비 심리를 자극해 제품 판매를 늘리거나 제품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는 경영전략을 향기마케팅이라 한다. 향기마케팅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이미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
대표적으로 꽃, 향수, 화장품, 혹은 비누 등 직접적으로 제품에 향기를 입혀 소비자에게 권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꽃집에서 라벤더 아로마 향기를 풍겨 꽃 판매를 유도하거나, 백화점에서 향수 묻힌 조향지를 나눠줘 향수 판매를 촉진하는 방법이 있다.
브랜드 이미지를 특정 향기와 연계해 소비자의 뇌에 각인시켜 그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는 간접적인 향기마케팅도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브랜드 이미지를 기억시키는 데 향기를 활용하면, 이후 동일한 향기로 자극했을 경우 막연히 브랜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물론 그 브랜드를 더 정확히 인식하게 된다.
간접 향기마케팅은 주로 호텔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거나 고급 자동차 판매에 활용된다. 예를 들어 특정 호텔에서의 좋은 경험이 호텔 로비에서 나는 향기와 함께 뇌에 각인되면 향후 여행을 계획할 때 그 호텔을 다시 선택하게 만든다. 독일의 고급 자동차 회사들도 조향팀을 두고 향기마케팅을 자사 브랜드 이미지 각인에 적극 활용한다. 이들은 자동차 시트, 운전대 가죽, 대시보드 등 재질에서 나는 향을 테스트하고 브랜드 이미지 고유의 향기로 맞춘다. 차 안에 앉았을 때 느껴지는 자동차 브랜드 이미지 고유의 향기는 소비자가 다음에 자동차를 구매할 때도 그 브랜드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간접 향기마케팅이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생필품보다는 삶의 질을 높이는 물건을 판매하는 백화점이다. 백화점 1층에 화장품 상점이 자래매김한 이유다. 각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한 소비자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소비 심리가 자극된다. 단순히 화장품 구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화점 전체에서의 소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실제 소비자가 향기에 노출되면, 향기가 없는 환경에 비해 구매욕구가 높아지고 쇼핑 시간을 훨씬 짧게 느끼며, 더 많은 상점을 방문하게 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향기가 있는 매장을 방문한 소비자가 그 매장을 다시 찾고, 주변 사람들에게 매장을 추천하는 비율도 높았다. 향기에 노출된 소비자가 충동구매 경향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에 카지노에서는 슬롯머신에 향기를 입혀 이용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향기는 우리의 소비욕구에 대한 절제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 소비자는 향기 경험을 통해 같은 값에도 더 높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니, 향기마케팅은 판매자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만족을 주는 셈이다.
메타버스 과몰입하고 싶다면? 향기가 필수
‘메타버스 안에서 떠난 제주여행에서 유채꽃 향기가 퍼진다면?’
미래사회에서 후각의 경험은 더욱 중요해질 예정이다. 최근 급속히 확장되는 메타버스가 대표적이다. 지금은 시각, 청각, 촉각에 머무르는 메타버스 환경에 후각이 더해지면 더욱 실감 나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 필자의 연구팀은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향기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향을 선별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세상의 향의 종류는 1조 가지가 넘는다. 우리가 구현하는 기술은 4차원(4D) 극장이나 메타버스 환경에서 눈으로 보는 사물이나 장면과 매칭이 되는 향기를 선별, 제공해 뇌가 좀 더 실감 나게 느끼게 만드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커피 마시는 장면이 나올 때 아라비카 원두의 향기가 난다면, 관객들은 과거 자신이 마시던 커피 향을 떠올리며 추억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필자의 연구팀은 ‘커피 마시는 장면=아라비카 향’처럼 대표 향기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후각은 멀리서부터 날아든 향기는 물론 우리가 살아온 세월조차 느끼게 해주는 마법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과 청각을 잃은 헬렌 켈러는 후각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우리 코에 머무는 냄새가 뇌로 들어와 설렘과 행복한 기억을 만드는 소중한 자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를 통해 뇌로 전달된 향기의 신호는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일도 하며, 쇼핑의 본능을 깨우기도 한다. 최근에는 메타버스, 인공지능(AI) 등과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오늘 우리도 향기 좋은 차 한잔과 더불어 코를 통해 들어온 향기가 바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보면 어떨까.
※필진소개
문제일.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서 신경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존스홉킨스의대 신경과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과학과 교수로 후각을 이용한 질병 진단 및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향기가 보여요’가 있다.
cmoon@d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