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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오렌지 향에는 오렌지가 없다

[특집] 이 향에 지구의 기억을 담을 수 있다면

한때 바나나맛우유는 바나나는 전혀 들어가지 않고 바나나 향만 들었으니 가짜 식품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바나나라고 향기를 내는 분자가 바나나 우유와 다른 것은 아니다. 둘 다 0.1%도 안 되는 이소아밀아세테이트라는 냄새 물질로 바나나 맛을 낸다. 


우리가 바나나에서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은 기껏해야 단맛 정도다. 다른 음식도 다르지 않다.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실 때 혀로 느끼는 단맛과 신맛에 코로 느끼는 오렌지 향이 오렌지 맛의 실체다. 더구나 오렌지 향은 리모넨이라는 단 한 가지 냄새 물질이 90% 이상 기여한다. 그래서 리모넨 냄새를 맡으면 오렌지를 떠올릴 수 있다. 


레몬, 자몽 등 다른 시트러스(귤속) 과일에도 리모넨이 많지만 이들에는 다른 냄새 물질도 있어서 향이 조금씩 달라진다. 오렌지처럼 한 가지 냄새 물질이 90%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다른 식재료는 여러 가지 냄새 물질이 혼합돼 향을 이룬다. 


그러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후각이 마비된 사람은 모든 음식이 식감과 단맛, 짠맛 정도만 차이가 나고 모두 똑같은 맛으로 느껴진다.

 

 

냄새의 정체는 물질의 형태? 진동?

 

과학자들은 혀로 느껴지는 맛은 5가지에 불과하고, 수만 가지의 향이 다양한 음식의 풍미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수많은 냄새를 도대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그 비밀을 풀고자 했다. 


우리가 오렌지의 냄새를 맡으면 리모넨 같은 냄새 물질들이 코의 후각상피로 들어간다. 코의 상단에는 작은 동전 크기 정도의 영역에 1000만 개 정도의 후각세포가 분포해 있다. 과학자들은 그 끝에 후각수용체가 있어서 냄새 물질이 콧속으로 들어오면 그 수용체를 자극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후각수용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알기 힘들었다.


후각수용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에는 ‘형태설’과 ‘진동설’이 있다. 형태설은 분자의 형태를 구분한다는 이론이다. 냄새 물질은 저마다 형태가 달라 그 형태에 적합한 수용체와 결합해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효소가 기질과 결합하는 원리, 면역세포가 작동하는 원리, 약물이나 호르몬이 작용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어서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형태설에 강하게 반발한 이론이 진동설이다. 향도 시각이나 청각처럼 냄새 물질의 파동(진동)을 구분하는 감각이라는 이론이다. 진동설은 향기를 연구한 과학자 루카 투린이 본격적으로 주장하면서 논쟁의 전면에 등장했다. 투린은 구아야콜과 벤즈알데하이드 두 냄새 물질에서는 바닐라 향이 나지 않지만 적절한 비율로 섞으면 바닐라 향이 나며, 이것은 두 분자의 진동 패턴을 합친 것이 바닐린(바닐라빈(열매)의 추출물. 바닐라향의 주성분)의 진동 패턴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냄새 물질 가운데에는 분자 형태가 완전히 다르지만 같은 향기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분자 형태가 거의 같은데도 향기는 전혀 다른 경우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냄새는 분자의 형태가 아니라 분자의 진동으로 느끼며, 수용체에 냄새 분자가 결합할 때 수용체의 전자가 양자터널링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각이 가능하다는 설명으로 발전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사과에서 사과 향을 제거한다고 사과의 무게가 줄어들지 않으므로 향은 물질이 아니라 사과가 일으키는 진동이 물결처럼 전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진동설을 반박하는 증거가 나왔다. 광학이성질체이다. 광학이성질체 관계인 분자들은 분자량, 형태, 작용기 심지어 진동수까지 똑같다. 진동설에 따르면 광학이성질체들은 같은 향기가 나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향기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왼손 장갑을 오른손에 끼우기 힘든 것처럼 비록 진동수는 같지만, 형태가 달라 후각수용체와의 결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동설은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진동설의 주장이 힘을 잃어가는 중에 형태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실험마저 등장했다. 바로 ‘동위원소이성질체’ 실험이다. 냄새 물질은 주로 탄소, 수소, 산소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 수소(H)의 일부를 중수소(2H)로 바꾸면 분자의 형태는 같고 진동만 달라진다. 형태설에 따르면 같은 향기가 나야 하고, 진동설에 따르면 다른 향기가 나야 한다. 


2015년 에릭 블록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 연구팀은 사이클로펜타데카논이라는 냄새 물질을 하나는 일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수소를 동위원소로 치환해 준비했다. 그 뒤 이 물질에 반응하는 수용체(OR5AN1)를 세포 표면에 발현시켜 반응 정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수용체는 두 가지 분자 모두에서 반응했다. 진동수는 다르지만 형태가 같아서 둘 다 반응했으니 형태설이 승리한 것이다. doi: 10.1073/pnas.1503054112


형태가 비슷한 분자인데 향이 전혀 다른 경우는 후각수용체가 광학이성체를 구분할 정도로 형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후각수용체는 냄새 물질 전체와 결합하지 않고 분자의 일부와 결합하는데 결합부위를 발향단이라고 한다. 분자의 전체적인 모습은 비슷해도 발향단의 모양이 다르면 다른 향기가 된다. 나머지 부분의 형태가 달라도 발향단 부위만 닮으면 같은 향기가 될 수 있다.


발향단 형태가 서로 전혀 다른 분자에서 비슷한 향기가 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뇌와 관련이 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냄새 수용체를 가진 후각세포라도 뇌에서 같은 후각영역에 연결되면 같은 향기로 느껴진다.

 

냄새를 구분하는 뇌의 원리는 아직도 모른다

 

냄새 수용체의 정체는 밝혀져 있다. 1991년 미국의 리처드 액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와 린다 벅 교수가 후각세포에서 향기 분자를 식별하는 수용체가 G단백질 연결 수용체(GPCR)임을 밝혔다. 두 사람은 이 공로로 2004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렇게 밝혀진 코의 후각수용체의 종류가 무려 400종이다. 미각수용체 30종(이 가운데 25종이 쓴맛), 시각 4종 등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다.


콧속에 있는 후각세포 1000만 개의 신호는 후각망울에 같은 냄새끼리 모이는데 여기에 있는 신경세포는 5000개 정도다. 냄새 물질이 코를 자극하면 5000개의 전구로 된 전광판에 다양한 형태로 불이 켜지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는 패턴을 보고 그것이 사과향인지 딸기향인지 구분하고 그 딸기가 신선한지 잘 익었는지도 가려낸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아직 우리의 뇌가 어떻게 수만 가지 향 속에서 좋은 냄새와 악취를 구분하는지 모른다. 특정한 악취 물질이 있어서 그 물질만 들어가면 무조건 악취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악취 물질도 일정 농도 이하에서는 악취로 느껴지지 않는다. 평범한 냄새도 맥락에 맞지 않거나 농도가 지나치면 이취나 악취가 된다. 


냄새 물질은 후각망울의 전광판에 불을 켤 뿐, 그것이 좋은 향인지 나쁜 향인지는 전적으로 뇌가 의미를 부여해 결정한 것이다. 분자를 감각하는 후각수용체가 없으면 그 물질은 전혀 냄새가 없는 물질이 된다. 


사람마다 가진 후각수용체도 제각각 다르다. 불과 세 가지 색수용체로 작동하는 시각에도 색맹이 있는데 400가지 수용체로 작동하는 후각은 얼마나 다양한 취맹이 있을지 확인하기도 곤란하다. 모든 사람이 다른 코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람마다 같은 냄새를 다르게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른 코와 입을 가졌는데 어떻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많은지 오히려 그것이 훨씬 신비한 현상이다.


향은 다양한 기억을 남긴다

 

우리가 애써 수용체를 만들어 맛과 향을 감각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맛은 원래 독과 위험이 넘치는 자연물 중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구분하는 기능에서 출발한 것이다. 몸에 필요한 음식을 맛있다고 느끼고, 몸에 해로운 음식을 맛없다고 느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감각은 생존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의 입과 코는 음식 속의 영양분을 단번에 파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쓴맛을 제외하면 혀의 미각수용체는 고작 5종뿐이고, 그것으로 느낄 수 있는 성분은 식품의 2~10% 정도다. 그래서 소량의 맛이나 향을 추가해 입과 코를 잠시 속이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입과 코는 음식 맛의 표정을 살피는 정도이지 최종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우리 몸의 내장기관은 소화과정을 통해 탄수화물은 포도당으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지방은 지방산으로 분해해 흡수하고 그 양까지 정확하게 측정한다. 장에 가서야 맛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런 결과와 감각의 결과를 통합해 음식에 대한 판단모형을 구축한다. 향이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뇌에 축적된 음식의 모형과 패턴을 통해 감각한 대상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축적되면 판단 모델은 보다 정교해지고 좀 더 다양한 식재료의 맛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필진소개

최낙언.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1988년 해태제과에 입사해 기초연구팀과 아이스크림 개발팀에서 근무했다. 2000년부터 서울향료에서 소재, 향료 응용기술을 연구했다. 현재는 편한식품정보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dbcl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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