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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의 팔방미인 '옐로우칼'

외계생명찾아 60년

한때 세계를 움직였던 과학계의 대스타 칼 세이건은 어떤 사람인가. 외계생명 탐사와 과학대중화 활동, 그리고 그의 행복했던 삶을 더듬어 본다.
 

1985년 과학소설 '접촉'을 발표했을 때.


지난해 12월 20일 칼 세이건이 시애틀에 있는 프레드 허친슨 암연구센터에서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행성 연구의 대가로서, 외계생명체 탐사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과학저술가이자 TV 해설가로서 칼 세이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 게 없다. 10권의 과학서를 냈지만 그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소리를 우주선에 실어

1934년 뉴욕에서 태어난 세이건은 시카고대학교에서 천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외계생명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천문학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그의 일생이 거의 행성과 외계생명체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1950년대부터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때 그는 194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유전학자 H. J. 뮐러의 밑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NASA(미항공우주국)가 파이어니어 10호를 발사할 때였다. 파이어니어계획은 1958년부터 1979년까지 추진됐던 우주탐사계획이다. 1972년 발사된 파이어니어 10호는 목성에 13만km까지 접근해 사진을 찍어 지구에 전송하고, 목성의 중력을 이용해 태양계를 탈출한 인류 최초의 우주선이 됐다.

그러나 파이어니어 10호가 기억되는 것은 여기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구인이 ET(외계생명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세이건은 우주 어느 곳엔가 우리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파이어니어 10호를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계생명체가 지구인을 알아볼 수 있도록 ‘지구인 그림엽서’를 실었던 것이다. 이 그림엽서는 화가였던 그의 첫부인 린다가 그렸다. 그러나 지구인 남녀를 나체로 표현한 까닭에 저속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지구인 그림엽서는 1973년 발사된 파이어니어 11호에도 실렸다.

파이어니어가 외계생명체와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부정적이겠지만 세이건은 과감하게 외계인 접촉을 시도했다. 과학, 꿈, 낭만의 3박자를 갖춘 그의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7년 보이저 1호, 2호가 발사됐을 때 그는 더욱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번에는 ‘지구의 소리’를 30cm의 LP판에 녹음해 실었던 것이다. 그 레코드 판엔 바다의 파도소리, 개구리 우는 소리,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일부, 암스트롱의 트럼펫 연주, 아기 우는 소리, 그리고 도시의 소음도 들어 있었다.

세이건은 같은 코넬대학교에 근무했던 드레이크교수가 만든 드레이크방정식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드레이크박사는 1960년 미국 국립전파천문대의 30m 전파망원경으로 우주와 교신을 시도한 바 있다. 그는 빛의 속도로 15년쯤 가야 하는 거리에 태양과 똑같은 모습을 한 에타 에리다니(ε Eridani)라는 별 주위에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오즈마계획이다.

세이건은 처음 외계생명체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드레이크박사의 영향을 받아 드레이크방정식에 따라 외계생명체의 존재 확률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우리은하에는 1천억개의 별이 있는데, 그 중 약 10억개는 태양과 크기, 질량, 온도가 같다는 사실을 세이건은 알아냈다. 그가 알아낸 이런 사실들은 다른 천문학자들과 견해가 같다.

그러나 세이건은 더 나아가 10억개의 별 중에서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사는 곳은 10개 정도라고 주장했다. 즉 우리은하 전체에서 외계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확률은 1백억분의 1이라는 것이다. 지구는 앞으로 영원히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은 아니다. 태양이 50억년 후면 팽창해 지구는 그 속으로 타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이건은 우리은하 중 10개의 별에서는 항상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드레이크방정식의 답을 구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세이건의 결론 역시 확인할 도리는 없다.

외계생명체에 점점 빠져든 세이건은 우주선을 이용해 태양계를 탐사하는 것 이외에도 거대한 전파망원경을 사용해 외계인들간의 통신을 청취해 외계인의 존재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근래에 들어 미항공우주국이 재정난으로 외계생명체 탐색프로그램(SETI)을 중지하려 하자 그는 전세계 시민들에게 호소해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세이건은 코넬대학교의 천문학과 교수이자 행성연구소장, 행성협회장, 미국과학진흥협회 천문부장, 미국우주학회 행성부문 의장 등 수많은 보직을 가지고 많은 과학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이러한 업적은 그후 여러 종류의 상으로 충분하게 보상됐다. 그는 행성탐사계획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NASA 특별과학공로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국제우주항공상, NASA 봉사상, 케네디우주항공상, 옛소련 우주항공가연맹의 치올코프스키상, 국립과학원의 최고상인 공공복지메달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격식을 차리기 싫어했던 세이건은 터틀넥 스웨터를 즐겨입었다.


돈과 명성을 얻은 과학전도사

외계생명체에 관심이 많았던 세이건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천부적인 대중감각일 것이다. 그는 1966년 쉬클로프스키와 함께 ‘우주의 생명’이란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병원생활을 할 때까지 13권의 대중과학서를 펴냈다. 1977년에는 ‘에덴의 용’으로 언론인의 꿈으로 통하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또 1980년에 그가 제작해 만든 13편의 ‘코스모스’ TV시리즈는 에미상과 피바디(Peabody)상을 휩쓸었다. 코스모스는 이후 60여 나라에서 5억 이상의 시청자들을 매혹시켰다. 또 저서 ‘코스모스’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70주 동안 머물렀고 15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코스모스 TV시리즈는 세이건에게 또다른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코스모스를 만들고 보이저호에 지구인의 소리를 담는 과정에서 함께 일하던 프로듀서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앤 드루이안은 매력적인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글솜씨도 뛰어나 ‘한 이름난 실연녀’(A famous broken heart)라는 소설을 쓴 바 있다. 보이저호에 지구인의 소리를 넣은 것은 사실 그녀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세이건은 ‘혜성’과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란 책을 그녀와 함께 썼다. ‘혜성’은 그들의 결혼기념 작품. 결국 첫부인 린다는 사랑의 적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버림을 받았다.

세이건은 1994년 처음으로 생긴 아시모프상도 수상했다. 과학소설의 대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기념해 만들어진 이 상은, 과학을 일반인들에게 알기쉽게 이해시키는데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수상식에서 그는 상아탑에서 일반인과 격리돼 그 위에 군림하려는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만약 과학자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일반인과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생각이 기괴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학은 아직도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져있다면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겠는가?”

한가지 아이러니한 일이 있다. 우리는 미국에 세이건과 같은 스타과학자가 여럿 있는 줄 아는데, 세이건 자신은 우리처럼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에 비해 과학자들이 언론 매체에서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불평했다. “왜 우리 미국에는 TV 드라마에서 우주의 비밀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의 영웅적인 우상인 과학자가 없는가?”

또 미국 국민은 상당히 과학에 대한 대중적 소양이 뛰어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칼 세이건은 80년대 말 미국이 일본에게 시장을 많이 잠식당하자, “미국 국민의 과학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본에게 막대한 무역적자를 허락했다”며 국민과학교육 캠페인에 돌입했다. 그는 “과학에 대한 무지는 경제를 좀먹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나아가서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다”고 경고했다.

세이건은 과학을 널리 알리는 대중과학자이기도 했지만 대표적인 무신론적 인본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쓴 ‘사망의 골짜기’에서 그가 안고 있는 절망적인 불치병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도 죽은 다음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기억, 그리고 나의 육체의 일부분이라도 지니고 다시 부활한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역사가 아주 오래된 세계 여러 종교들이 전통적으로 영생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고히 믿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단지 ‘희망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아주 오묘해 깊은 사랑과 도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과학적 근거가 없는 보랏빛 이야기로 우리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다. …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생애에 제공받은 훌륭한 기회들에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내겐 훨씬 더 좋다.”

그는 또 미신과 사이비 과학에 대해 맹렬히 싸웠다. 그는 ‘악마가 출몰하는 세계: 어둠 속을 밝힐 과학’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미국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상상 속의 것들과 현실의 세계를 구별 못했는가? 20세기 말이 다가오는데도 미신과 사이비과학에 대한 유혹은 더 심해지고, 비과학적 비이성적인 말들이 우리들에게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에 대해 나는 몹시 우려한다. 인종간 국가간 갈등이 증폭될 때, 빈곤이 횡행할 때, 국가와 개개인의 자신감이 도전을 받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때, 극단주의자들이 우리 주위에서 보이기 시작할 때, 이 오래된 적들은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세이건은 과학을 잘 알고, 꿈이 있고 낭만을 지닌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척 돈과 상을 밝혔다고 한다. 그는 코스모스라는 TV시리즈로 6천만달러 이상 벌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 왜 그렇게 돈을 밝히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세이건은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들려줬다.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학문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겠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도 하고 돈도 벌겠다고 다짐했다고.

세이건과 동시대에 대중과학자로 널리 이름이 났던 사람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와 로버트 자스트로우가 있었다. 아시모프는 4백권에 이르는 과학서를 써서 이 분야의 세계기록을 세웠다. 또 자스트로우는 NASA 출신으로 스타워스를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TV와 신문 등을 누비며 여론을 이끌었던 과학자다. 그러나 이들을 제치고 상복은 늘 세이건 차지였다. 물론 상금도 상당했다고 한다.

뛰어난 언술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던 세이건은 여행을 즐기고 사교를 즐겼던 멋쟁이 과학자였다. 그는 늘 푸른색 셔츠가 아니면 터틀 넥의 스웨터에다 황갈색 골덴 상의를 걸치고 다녔다. 그래서 코넬대학생들은 그를 ‘옐로우 칼’(노란 옷을 입은 칼 세이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젠 옐로우 칼을 볼 수가 없다. 1994년 그는 척수형성부전이란 병으로 두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한때 그의 누이로부터 골수를 이식받아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지난해 갑자기 폐렴이 겹치면서 병세가 악화돼 2년 동안의 투병 생활은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칼 세이건의 주요 저서
*국내에서 번역된 책임

●우주 속의 생명(1966년), 쉬클로프스키 공저
●우주커넥션(1973년)
에덴의 용*(1977년)
지구의 속삭임-보이저호의 우주여행 기록(1977년), 편저
브로카의 뇌(1979년)
코스모스*(1980년)
혜성*(1985년), 앤 드루이안 공저
접촉(1985년)
핵겨울-핵전쟁 이후의 세계*(1985년), 편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길-핵전쟁과 무기경쟁의 종말(1990년), 리차드 투르코 공저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1992년), 앤 드루이안 공저
창백한 푸름 점*(1994년)
악마가 출몰하는 세계(1996년)
 

199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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